여행과 공황
더 이상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다.
나는 고장 났다.
공황이 왔다.
세비야의 거리에서
분명 매끄러운 하루였다.
오전에 나와서 세비야 대성당과 스페인 광장을 구경했다. 멋졌다. 햇빛은 바르셀로나의 그것만큼이나 강렬했고, 어제 창살 너머로 언뜻 보았던 것과 같이 동화 속 마을을 연상케 하는 아기자기한 모양새였다. 점심은 고모부가 알아둔 숙소 근처의 'Espacio Eslava'라는 레스토랑을 갔다. 'Navajas a ia plancha'라는 맛조개 요리가 가장 맛있었고 이 외에 고기 요리 2개, 계란 요리 하나와 샹그리아 2개를 시켰는데 모두 괜찮았다. 모두 양이 적어서 그런지 여러 요리를 시켜서 다양한 풍미를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여행 전부터 입맛이 없던 차라, 개인적으로는 양이 적은 점이 나에겐 꽤 장점이 되었다. 아무래도 음식을 남기는 건 눈치가 보이니 말이다.
누구 하나 불만을 가지는 일이 없고, 튀는 구석 없었다. 나도 계속 웃었다. 실실 웃었다. 시계 시침이 북동쪽으로 기울면 숙소로 군말 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낮잠시간을 가졌다(물론 나는 자지 않았다). 매끄럽다. 그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둑어둑한 8시에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모두 꽤 오래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나도 피곤했고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입맛이 더 없었다. 고모부가 예약한 'Az-Zait restaurante'라는 가게는 코스 전문점으로, 코스타입이 세 가지로 나뉘고 각각 가격과 양이 달랐다. 많이 먹지 못하니 저렴한 것을 시키자고 건의했지만, 감사하게도 아주 비싼 코스를 주문해 주셨다.
독특한 풍미였다. 새우카르파쵸와 토마토 냉수프, 양고기, 관자 요리 등등 쉬지 않고 줄지어 음식이 나왔다. 양고기의 잡내가 심했다. 아무도 억지로 먹으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왠지 다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마구 먹었다. 물론 웃으며 먹었다. 피로감이 평소보다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과민해졌다. 그가 가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흘깃 쳐다보며 그 사람에 대해 얘기했다. 그 눈빛과 태도에 집중해서 오목조목 스트레스를 받았다. 두 사람은 이게 뭐 어떠냐고 했다.
드디어 디저트 시간이었다. 조금만 견디면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샤벳과 치즈가 있었는데 너무너무너무 친절한 서버는 끌차에 열 가지도 넘어 보이는 치즈를 끌고 나와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해 줬다. 물론 스페인어로 말이다.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아주 아주 아주 천천히 치즈를 한 조각씩 썰어주었다. 치즈에 대한 그의 프로의식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고모부는 본인의 치즈를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했다. 나는 샤벳을 선택했고, 후딱 비워놓았다. 이제는 아주 피로한 상태였다.
그는 대양에 대해 얘기했다. 세비야의 바다가 지중해인지 대서양인지 하는 얘기였다. 나는 대충 바르셀로나의 바다가 지중해였으니 세비야의 바다도 지중해일 거라 대답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아닐 거라고 했다. 그리곤 친히 지도를 켜서 나에게 설명해 주며 샐쭉 웃었다.
그의 입꼬리 따라 뭔가 일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통제가 안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픈 곳은 없는데 손발은 덜덜 떨리고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뻥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배에 대고 몸을 구부렸다. 옆에 있던 고모는 왜 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핑계를 댔다. 갑자기 급체를 한 것 같다는 같지 않은 핑계를 대고 속이 답답하다며 자리를 뛰쳐나왔다.
가게 앞에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서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 사람들을 지나쳐서 더 걷지 못할 때쯤 인도 한복판에 주저앉아 울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다. 나는 고장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