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연기자
모두 훌륭한 엑스트라였다.
큰- 구멍이었다.
두 손을 모두 포개는 것뿐만 아니라 온몸을 비틀어 넣어도 막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구멍에서 쏟아지는 것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사고와도 같은 그것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곧이어 고모가 따라 나왔다. 사람 많은 인도 한복판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동양인 여자 하나 찾는 일은 쉬웠을 것이다. 그녀는 체한 거면 업히든지 해서 얼른 숙소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고모부를 데려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는 그녀를 붙잡았다. 참을성 없는 그녀는 얼른 쉬어야 한다며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만-잠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거대한 구멍에서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걸 무력하게 응시했다. 그 큰 구멍도 모자라서 나의 눈알을 비집고 그것들은 삐져나왔다. 옆에서 그녀는 계속 무어라 말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고 싶어서 나는, 작게 '나, OOOO 있어. 체한 거 아니야'하고 말했다. 그 단어를 모르는 눈치였지만, 본인 나름 소화시키는 시간을 가지는 듯 보였다. 그리곤 나를 일으켜 세웠다. 심각한 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누워있다가 오래간만에 선 사람처럼 어색하게 섰다. 손과 발의 경련이 더욱 잘 느꼈다. 눈물은 계속 나왔다.
고모는 나를 안았다. 세게 안았다. 혼자 작게 흐느끼던 소리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귀에 가로막혀 공명을 일으키며 나의 귀에 다시 돌아왔다. 공명을 일으키며 다시 돌아온 나의 약함은 왠지 모르게 나를 안정시켰다. 깊은 날숨만 내쉬다가 거의 질식할 때쯤, 내뱉은 숨이 가시 나를 찾아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 귓가에 대고 그녀는 무어라 말했다. 이 날은 일기를 안 쓰고 바로 자버려서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 힘을 주려는 말을 했을 것이다. 대신 나를 안았던 손의 힘만은 기억난다.
그러면서 그녀는 웃으며,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너 쳐다보고 있어.'하고 말했고 나는 살짝 웃었다. 눈물을 계속 흐르고 있었다. 살짝 추스르고 들어가겠다고 하고 그녀를 먼저 들여보낸 후,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많은 인파가 있었다.
가게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숙소까지 들어가는 단 몇 분 동안 실실 웃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위는 입 밖에 없었다. 여전히 통제가 안 되는 눈에서는 눈물이 실실 나왔지만, 입은 계속 웃으며 호탕한 말이 계속 실실 삐져나왔다. 세비야의 골목에 가로등이 많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제법 기묘했을 것이다.
이 이후의 리스본과 런던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감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스스로 무감한 것을 의식하고 있어서 그런지, 기록하는 것도 대부분 멈췄다. 여행에서의 시간을 보람차게 쓰려는 노력도 멈추었다. 하루 끝에 일기 쓰는 것도 멈추었다. 그저 하루에 의미 없는 사진 몇 장 찍는 게 다였다. 그리곤 지금이다.
이상하게도 그때 세비야의 밤을 떠올리면, 나의 눈물이나 포옹 같은 감정적인 것들보다 주위의 인파가 기억난다. 모두 서서 각자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스페인어였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나는 거기서 또 한 번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던 것을 이제는 안다.
모두 훌륭한 엑스트라였다. '카메라 렌즈'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주저앉아 펑펑 우는 동양인 여자와 곧이어 그녀의 엄마뻘 되어 보이지만 닮진 않은 여자와 깊은 포옹을 하는 상황을 모두 지켜봤을 텐데도 괜히 흘낏거리다가 나와 눈 마주쳐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프로 엑스트라인 것이다.
아마 내가 훌쩍 거리며 가게로 다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일제히 연기를 멈추며, '아- 참 긴 테이크였어.', '그러게, 여자주인공이 오열하는 연기를 잘하더군.', '그러게. NG 없이 한방에 가는 건 오랜만이야'하며 일제히 흩어졌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