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행行갈피'는 무엇인가요?

출발

by 정주구



밤을 새웠다.

여행에 대한 설렘이 아니라 부담이 묵직한 무게로 눈 두 덩이를 짓이기고 있었다. 결국 20분 정도의 얕은 설 잠을 자고 일어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새벽이 주는 정적 덕분에, 밤새 불안으로 떨렸던 몸과 마음은 차게 식어서 차분한 마음으로 마지막 점검을 했다. 짐의 대부분은 전 날에 거의 싸두었고 당일까지 사용하는 안경, 스킨케어제품 등 자잘한 것들을 챙기며 다시 한번 준비물 점검표를 확인한 후 캐리어를 닫았다. 전날 게으름 때문에 처리하지 못한 쓰레기를 버리고 집을 간단히 정리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집 청소를 깔끔하게 해 놓는 것은 좋은 여행의 시작과 마무리를 할 수 있는 것에 도움을 준다. 시작할 때는 허겁지겁 나가는 것보다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집을 돌본 후 떠나는 것이 여행 중 집에 대한 잡걱정의 새싹이 돋는 것을 방지해 줄 뿐만 아니라 여행에 돌아와서는 피로한 나를 맞이하는 깔끔한 집이 여독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방에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조정하고 나의 작은 레몬나무가 그동안 빛을 잘 볼 수 있도록 창틀에 놓아두었다(당연히 물을 흠뻑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레몬나무까지 챙겼으니 이제 정말 떠날 준비가 다 되었다. 냉장고 문이 잘 닫혔는지, 보일러는 꺼졌는지, 콘센트 정리는 잘 되었는지 한번 더 점검한 후 집을 나섰다. 평소 잡 걱정이 많은 나로서는 여행 중 '의심 잡초'가 돋아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긴 여행에 흔히 생길 수 있는 집의 안위 문제에 대한 '의심 잡초'를 아주 깡그리 토벌하고 나오니 시간은 약 오전 7시 언저리였다. 이른 아침의 차분한 공기에 시끄러운 캐리어 끄는 소리가 뾰족하게 도드라졌다. 약 2시간 후면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요즘엔 긴 여행을 시작할 때면, 첫 노래에 신경을 쓴다. 그 첫 노래의 분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선곡을 한다. 물론 그저 바람이기 때문에 노래 분위기에 여행이 맞춰진 적은 없으나, 그 바람이 담겨 노래에 특별한 기록이 새겨진다. 여행에서의 첫 노래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듣는 노래들도 묘미가 된다. 여행 중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혹은 특수한 감정이 들 때 들었던 노래는 일상에 돌아와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책갈피가 되는 것이다. 여행의 책갈피니 '행行갈피'라 불러야겠다. 이 행갈피는 사람들마다 다른데, 혹자는 향으로 기억하기도 하고, 도시의 랜드마크가 들어있는 스노우볼이나 컵, 또는 돌 같이 부피가 작은 것을 가져와서 여행을 추억한다. 나도 사람들의 여러 행갈피를 따라 해 봤던 경험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무 살의 첫 여행에서 사 왔던 스노우볼이다.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여행할 때 모았던 스노우볼에는 특별한 추억이 있지 않지고 그저 여행의 상징정도로 사 왔던 것이다. 아쉽게도, 집에 있는 유리컵들도 얼마 못 가 운명을 다하는 우리 집에서, 스노우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후로도 몇 번의 깨진 스노우볼 잔해들을 치운 뒤 행갈피 목록에서 스노우볼은 사라졌다. 이후, 여행의 추억을 야금야금 먹고사는 나에게 행갈피 선택은 꽤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스노우볼뿐만 아니라 몇 개의 행갈피가 여행을 채웠다. 한 여행당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 있기도 해서 돌아오는 캐리어는 항상 무거워져 있었다. 막상 여행에서 돌아와 캐리어를 정리할 때면 별 감흥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또 그렇다고 버릴 수 없는 애물단지처럼 집의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되는데,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행갈피일수록 고집이 세지는 듯하다.


'너 나를 버리면 그 여행을 버리는 거야'

'몇 년 동안 나를 한 번도 찾지 않았지만 너는 나를 절대 버릴 수 없어'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이기에 그 시선을 외면할 수 없고, 추억 없는 책갈피에는 먼지가 쌓여 갔다. 이런 시행착오 후로는 책갈피를 가져오는 것에 일종의 책임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화려한 기념품샵을 가볍게 외면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질구레한 것들은 캐리어 틈에 꼭 끼어서 돌아왔다. 여행 중 맛집에서 먹은 음식에 끼어있던 소스의 뚜껑, 인 앤 아웃 모자(점원에게 모자를 달라고 하면 흔쾌히 줬다), 돌아와서 보니 그다지 예쁘지 않은 값싼 팔찌, 빈티지 마켓에서 산 오래된 엽서,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드로잉이 가득한 스케치북 등. 스노우볼보다는 나름 추억이 담긴 책갈피들이지만 어디에 놓아두기 애매한 것들이다.

머쓱한 책갈피도 분명 있다. 호기롭게 샀지만 여행의 기억이 좋지 않아서 마주할 때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근데 값비싸서 버리기도 뭐 한. 바로 향수다. 향으로 여행을 기억한다는 말이 좋아서 여행 중 고가의 향수를 샀는데, 그 여행의 전체적인 인상이 좋지 않아져 버려서 향수를 사용할 때마다 여행에서 느꼈던 힘들었던 감정이 묘하게 피어올랐다. 향수 같이 값비싼 행갈피는 가격만큼이나 진중히 고민한 후 선택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뜻밖의 수확은 괜찮은 행갈피의 발견이다. 발견이라기보다는 인식에 가깝다. 모든 여행에 있었지만 크게 인지하지는 못했던, 돈이 들지 않고, 방의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해서 먼지 쌓일 일도 없는 그런 것이다. 바로 노래이다. 아까 말한 첫 노래만큼이나 여행 중에 듣는 노래들은 훌륭한 행갈피가 된다. 처음, 중간, 끝을 그때 당시 노래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더더욱이 좋다. 이번 여행의 노래 행갈피를 정리해 본다면


첫 노래: 나상현씨 밴드의 <주인공> / 김고은의 <어두운 마음은 오늘 밤 지나갈 거야>

중간 노래: 다섯의 <,> / 신인류의 <작가미정> / 김윤아의 <Going Home>

마지막 노래: 나상현씨 밴드의 <주인공>


으로 추릴 수 있겠다. 뒤에 진행될 이야기들을 읽어보신다면 위의 노래를 곁들이는 것이 글을 음미하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여행에서의 갈피, 좋은 여행이든 안 좋은 여행이든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나만의 무언가를 찾아보자. 당신은 당신만의 行갈피 내지는 *여행서표를 무사히 찾았나요?




*읽던 곳이나 필요한 곳을 찾기 쉽도록 책갈피에 끼워 두는 종이쪽지나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