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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A Sep 11. 2021

[아저씨와 그림]

KUA Conte #10 :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이야기


요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캐리커처 의뢰가 들어온다.

지금도 내 앞에 서 있는 아저씨를 그리고 있다. 이 아저씨의 얼굴에 길게 자라난 수염은 정말 독특하다.



" 아저씨는 어떻게 그 긴 수염을 기르신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수염이 풍성하게만 나지

아저씨처럼 그렇게 길게 나진 않던데.. 다들 놀라워하겠어요!




" 허허, 이걸 기르느라고 애 좀 먹었단다.

그렇겐 안보이겠지만 조금씩 다듬어주어 모양을 잡아나가며 길렀지.

너도 긴 수염을 갖고 싶니?



 입과 턱을 모두 가려버려 불편함만 줄 것 같은 그 긴 수염을 갖고 싶진 않지만,

얄궂게 생긴 눈썹, 착해 보이지만 어딘가 의심스러움을 품은 처진 눈,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뭇가지처럼 몸이 빠짝 마른 아저씨는 특징이 참 많아 캐리커처를 그리기엔 최적화되어있다.

완성된 그림을 건네주니 아저씨 얼굴에 화색이 돈다.


" 와하하! 정말 나랑 비슷하구나?



모네의 캐리커쳐 



 아저씨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그림을 이리저리 번갈아 보더니, 

흡족한 듯 웃으며 내게 그림값을 쥐여주었다.

오늘은 세 사람이나 그렸으니 내일은 오랜만에 좀 쉬어도 될 것 같다.

요즘은 자주 가는 미술 재료상에 진열해 놓은 내 캐리커처 그림들 덕분 때문에 사람들이 더 찾아오는 듯하다.


나 오스카 클로드 모네, 이곳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르아브르에서 캐리커처를 그린 지 벌써 3년째다.


수염이 난 모양, 머리 스타일, 눈과 눈썹의 모양이나 코의 크기,

입 모양들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보니 내 눈을 사로잡는 특징을 따라 그림을 그려줬을 뿐인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똑같게 그려놨다며 내 그림을 후한 값에 사 간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밭에서 온종일 일하는 내 어릴 적 친구 페임도 하루 일당으로 5프랑이 전부라는데,

내 그림값은 한 점에 그 네 배를 웃돌고 있으니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도 이제는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번 돈을 모아 꼭 파리로 떠나 더 많은 그림을 그려야지!






진열장에 전시된 그림을 바꾸려 새로이 그린 그림들도 가져왔고, 재료를 더 구입할 겸 미술 재료상에 왔다.



아? 그런데 이게 웬걸?

내 그림 옆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그림은 뭐지?

평이함이 이루 말할 것 없는, 그저 풍경을 옮겨다 놓은 이 그림…

하단에 작가의 사인을 들여다보니.. E...u.. 외젠 부댕?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재료상 아저씨에게 물었다.


" 아저씨, 이 그림은 뭐예요?


" 아, 그 그림! 이 르아브르에서 꽤 명성을 크게 얻는 사람이 그린 것이란다.

파리에서 공부했다 하던데… 그림이 정말 사실적이지 않니? 르아브르의 풍경을 잘 옮겨 놓았어.


"그.. 그렇네요? 뭐, 사진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요?


"하하. 잘 봤어.

그 사람, 사진술 가게를 오래전에 차렸었다가 파리를 다녀오더니 그림을 그리더군.

그의 아버지도 이 지역에선 꽤나 유명한 사진 가게를 했었지.



그 사이 출입문이 열리는 종이 경쾌히 울렸다. 손님이다.


"여어 - 위젠, 잘 지냈어? 자네 그림은 아직 팔리진 않았네만?


아, 저 사람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인가보다.


"잘 지내셨어요? 이제 날씨가 선선해지다 못해 추워지려고 하는 것 같아요.

바닷가라 그런가.. 파란색 물감이 떨어져서 좀 사러 왔어요.


"요즘도 밖에서 그림을 그리나?

안에 있으면 그렇게 쌀쌀한 느낌은 아닌데 말이야.

아마 밖에 계속 있으면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어.


"네,

아무래도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그림에 담으려면

바깥에서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쉽지 않네요.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니. 별 희한한 그림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다.



" 여기 이 젊은 청년은 오스카야!

당신 그림 옆에 위치한 저기 저 캐리커처들!

저 그림들을 그린 사내지



" 오, 그렇군요? 안녕하세요? 저는 외젠 부댕이라고 합니다.


" 아.. 저는 오스카 클로드 모네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뒤로하고 그와 짧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나이가 내 곱절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재료상에서 본 내 캐리커처가 너무 좋았고,

기회가 되면 실제로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어 참 반갑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어떻게 캐리커처를 그리게 됐는지, 왜 캐리커처를 그리는지,

앞으로 더 이런 그림들을 그릴 것인지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다 캐물었다.



" 사람들의 특징을 어쩜 그렇게 잘 잡아내는지 정말 놀라워요!

오스카는 정말 눈썰미가 뛰어난 것 같네요!


" 그저 제 눈을 사로잡는 특징을 부각되게 그리면 되는걸요.


" 눈을 사로잡는 특징들을 단숨에 찾아내 그림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모든 이들이 갖고 있진 않아요.

정말 뛰어난 재능이죠!

우리 이 재료상 밖에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요?


나는 그와 밖에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더 나눠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의 이름만큼이나 지루한 그의 그림에서 무엇도 기대할 수 없어 에둘러 거절했다.


 " 앞으로 그려야 할 의뢰가 한 달은 더 밀려있어 시간 내기가 빠듯할 것 같아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뵙죠.


"어떠한 형태의 그림이든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는 정말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일이죠.

그래도 이틀에 하루 정도는 쉬지 않나요?

금요일에는 쉴 법도 한데?



금요일인 내일, 쉬기로 맘먹은 일이 생각나 더 회피할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사람을 피하고 싶었다.

내 그림을 인정해주는 건 좋지만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은,

그것도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그림을 그리는 이 아저씨를 만나 뭐하나 싶었다.


" 만나서 무엇을 하고 싶으신 거죠?


"그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 그래요.

한 번 시간을 내어 주겠어요?




쉬는 날에도 그림을 그리자고?

나는 그의 말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정말 어른들은 피곤하다.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기분이나 원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본인의 요구사항만을 이야기하는 꼴이라니..

난 단호히, 그렇지만 그는 어른이니 예의를 차려 훗날 만남을 거절을 하고 재료상을 도망치듯 나섰다.




며칠이 지나, 미술 재료상을 지나 걸어가는데 누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 오스카~!!


뒤를 돌아보니 지난번 미술 재료상에서 만난 부댕 아저씨, 그였다.

못 들은 척 빨리 걸어 저 모퉁이로 사라질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동네에 하나뿐인 이 재료상을 드나들려면 그를 계속 마주칠 수밖엔 없단 생각이 들어 멋쩍게 인사를 했다.



" 아, 안녕하세요 아저씨, 잘 지내셨죠?


" 요즘도 아주 바쁜가요?


" 네에… 아무래도 의뢰가 많이 밀려있다 보니… 바쁘네요!

지금도 그림을 그리러 5번가로 걸어가던 길이예요.



" 5번가면 이 앞이네요!

몇 시에 끝나나요? 카페에서 따스한 차라도 함께 할까요?

날이 더 쌀쌀해졌잖아요. 제가 사겠습니다.


" 아녜요,

끝나면 날이 어두워지는 늦은 오후가 될 거라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에이, 그러지 말고요.

오후 다섯 시면 끝나나요? 여기 재료상 바로 옆 카페 메종에서 만나죠!



거절할 새도 없이 그는 다시 미술 재료상 가게로 휙 들어가 버렸다.

정말 막무가내다.

작업을 마치고 거절치 못한 약속 덕에 카페에서 그를 잠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나와 다른 그림 (엄밀히 말하자면 내게 전혀 매력이 없는 그림)을 그리고는 있지만,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사진 가게를 운영하다 많은 예술가를 만난 이야기,

이후 그림에 뜻을 품어 파리로 건너간 이야기,

그곳에서 만난 다른 예술가들과 그들이 그려낸 그림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아주 조금은 그에 대한 내 마음이 열렸다.


그리고 그 찰나에 그는 다시 물어왔다.



" 자, 그러지 말고 내가 지난번에 말했듯 함께 그림을 그리러 가보면 어때요?

캐리커처라는 그림 장르도 좋지만,

오스카의 눈썰미로는 더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그림 장르요?


"그건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내가 하는 밖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같이해보면 어떤가요?


" 밖에서요?

이렇게 날씨도 쌀쌀하고 요즘은 부쩍 흐린 날도, 갑자기 비가 오는 날도 있는데요?


"아니야.

밖에서 그림을 그려보면 그 예측할 수 없음이 진짜 좋을 거예요.



다시 거절하긴 힘든 제안이었다.

그렇게 약속을 정해놓고, 시간이 흘러 어느새 오늘 그날이 되었다.

이젤과 붓, 캔버스와 물감까지 챙기려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사진과 비슷한 그림을 그리자고 이 애먼 고생을 하다니...

그렇다고 이제 와서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댕 아저씨가 말한 언덕을 타고 올라가니 르아브르 항구가 한눈에 보이는 지점에 다다랐다.

그리고 부댕 아저씨가 그곳에서 이미 그림 그릴 준비를 다 마치고 항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는 소리 질러 그를 불렀다.



" 아저씨!


" 여어 오스카!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었죠?


" 장비를 다 갖고 오는 게 쉽지가 않네요.

이 날씨에도 땀이 나요. 언제 오셨어요?


" 나는 이제 익숙해서 그런지 그다지 힘들진 않아 좀 빠르게 올라왔어요,

자, 봐요. 저어기 항구! 정말 평온하지 않나요?

바닷물결이 일렁이며 햇살을 반사하는데 그게 참 예뻐요.

저걸 바라보다 보니 오스카가 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네.


햇살을 바로 받는 이 언덕 위에 올라있자니 제법 쌀쌀했던 바닷바람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부댕 아저씨의 이젤이 세워진 바로 옆, 평평한 땅을 찾아

내가 가져온 이젤을 올곧게 세우고 캔버스를 올려놓은 후에야

나는 눈 앞에 펼쳐진 항구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 아저씨가 말하는 저 바닷물결의 햇살이 참 아름답네요.

매번 실내나 건물 사이에서 사람들을 그리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데요?

와, 저 구름 좀 보세요.

바람이 서쪽으로 부니 서쪽으로 방향으로 뭉게구름들이 흩어지고 있어요.

구름 사이로 흘러나오는 햇살이 아름답네요.


" 거봐, 내가 말했죠?

당신은 눈 앞에 펼쳐진 바깥세상의 모든 것을 캐치하는 중이네요.



클로드 모네가 그린 르아브르 항구 




늦가을에 내리쬐는 햇살,

그 햇살 사이사이로 자리 잡은 구름,

아직은 시원한 느낌을 주는 바람,

배에서 흘러나와 바람으로 흩어지는 연기,

일렁이는 바닷물결.



그 어느 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이 완벽했다.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불현듯 들었고, 나는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알게 되었다.





⋇ 위 글은 클로드 모네(Claud Monet)의 작품과 삶을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KUA about




- 프랑스 파리에서 식료품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클로드 모네(1840-1926)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사의 화파 중 하나인 ‘인상주의'를 창시한 사람입니다.



- 그가 5세 때 가족은 파리를 벗어나 노르망디의 작은 항구 르아브르로 이사했고, 모네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그림 실력으로 15세 때부터 사람들의 캐리커처, 초상화 등을 그려 판매하며 지역 내에서는 이미 화가로 유명해졌습니다.



- 1858년, 그의 나이 18세에 한 미술 재료상의 진열장에 그의 그림을 전시했고 추후 그의 스승이 된 외젠 부댕 (Eugene Budin, 1824-1898) 을 그곳에서 만납니다.



- 모네의 캐리커처 그림을 본 부댕은 모네의 민첩하고 재빠른 눈썰미에 큰 감명을 받아 계속해서 모네와의 만남을 원했으나, 모네는 짜증을 내며 거절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끈질긴 요청 끝에 부댕과 모네는 만났고 이후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 외젠 부댕은 풍경 화가로 당시에는 프랑스에서 흔하지 않던 “en plein air” 기법(야외 회화 : 밖에서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를 모네에게 가르침은 물론 밝은 색조와 물의 기법 등 다양한 그림 기법들을 알려줍니다. 훗날 모네는 부댕을 ‘모든 것을 빚진 사람’으로 일컬었습니다.



- 모네는 처음으로 부댕과 함께 그림을 그린 시간을 가진 이후, 자연의 아름다움과 감사함에 매료되어 풍경화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후 빛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기법들을 선보이며, 인상파의 대표 화풍을 보여주는 ‘인상 : 일출', 그의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인 지베르니 정원의 ‘수련 시리즈’ 등을 내놓습니다.










오스카 클로드 모네



외젠 부댕 



모네의 <인상,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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