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ure 시리즈 첫 번째, 영화 [화양연화]
- 본 내용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앞서, 제가 문학이나 문화·영화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감독의 의도, 연출, 미장센 등을 모두 파악하지는 못합니다. 때문에 작품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이런 작품도 있구나" 하는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합니다.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대뜸 자랑하려는 게 아니고) 저는 현재 연인이 있습니다. 연인을 사랑하냐면 당연히 사랑하고 있고요.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는 기억 상자를 꺼내 짤막하게 얘기할 수 있을 텐데, 어쩌다가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쉽사리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말이 잘 통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 재밌고, 만나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샌가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다행히 상대방도 같은 감정이었기에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언제, 어디서 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사람 관계나 감정에 대해서 인과 원인을 따지기는 어렵죠. 애초에 잘 따지려고도 하지 않지만. 특히 "왜 좋아?", "왜 싫어?"라는 말에 "그냥"이라고 답할 때가 많은 걸 보면, 호불호에 대해서는 더 한 것 같아요. 이 외에도 세상일에는 원인을 모르는 채 일어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처음엔 분명 흥미가 없었는데, 어느샌가 갑자기 상대를 의식하고, 생각하게 되는 과정을 보고 '입덕 부정기'라는 말이 생길 정도면요.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사랑하게 된 적, 다들 한 번은 있을 것 같아요.
보고 듣고 쓰는 걸 좋아하는 한 사람의 생각거리를 담은 [eature] 시리즈의 첫 번째- 나도 모르게 시작되어 버린, 완숙한 어른의 사랑을 보여준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입니다.
지역 신문사의 편집 기사로 일하는 주모운/차우(양조위)와 무역 회사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소려진/리첸(장만옥)은 같은 날, 같은 아파트에 이사를 오게 됩니다. 서로의 배우자는 일이 너무 바빠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은 주모운과 소려진은 좁은 아파트, 좁은 국수 가게 길목에서 자주 만나게 되면서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여느 때와 같이 홀로 집을 지키던 두 사람은 저녁을 같이 먹게 됩니다. 그곳에서 주모운은 소려진이 자신의 아내와 똑같은 핸드백을 가지고 있고, 반대로 소려진은 주모운이 자신의 남편과 같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각각의 배우자가 서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된 두 사람은 배우자의 불륜 상황에 대해 반응하는 예행연습도 해보고 함께 소설도 쓰는 등 만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마음도 함께 깊어집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하지 못합니다. 같은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주모운은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로 향하고, 소려진도 이사를 갑니다. 이후 소려진이 주모운을 찾아 싱가포르를 방문하기도 하고, 시간이 흐른 뒤 서로가 살던 홍콩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지만 둘은 인사 하나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영영 헤어집니다.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주모운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방문하는데요, 앙코르와트 벽에 난 구멍에 대고 무어라 속삭인 뒤 풀을 뽑아 구멍을 메우고, 그곳을 떠나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소려진 : 우리만 아니면 된 거 아닌가요?
주모운 :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신경 안 썼어요. 그들처럼은 안 될 거라 믿었죠. 근데 아니었어요. 당신은 남편을 떠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떠나려고요.
영화의 제목 <화양연화>란 인생에서 꽃과 같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영어 제목은 'In the Mood for Love',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고요.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이 인생에서 꽃과 같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임을 제목에서부터 알려주는 것 같네요. 이제 여기서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가 관건이겠죠.
두 사람의 만남은 대단하지 않아요. 마주치자마자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인 만남도 아니고, 죽을 뻔한 사람을 살려주는 등의 극적인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극입니다. 그냥 옆집 사는 이웃이었는데, 각각의 배우자가 서로의 배우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걸 알게 되고 동병상련을 겪게 되죠.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하기엔 그 아픔을 아는 자가 제일 잘 알 수 있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위안이었을 겁니다. 원래 아프고 답답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뿐일지라도) 조금은 가벼워지니까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 그 반대로도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정말 자주 마주칩니다. 오고 가는 동선이 비슷하기도 한데, 가는 길목이 다 좁아요. 집도 좁고, 자주 가는 국숫집 길도 좁습니다. 동일한 아픔을 가진 두 사람이 그렇게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심지어 사는 곳도 바로 옆집), 의식이 안 된다고 하면 정말 강철 멘탈일 것 같네요. 심지어는 일 하는 곳도 좁습니다. 굳이 넓은 곳을 찾아본다면 식당처럼 밖에서 만나는 장면 정도일까요. 당시의 홍콩 시대상을 보여주는 현실적인 무대였을 수도 있지만, 이를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도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였던 동방호텔 2046호실도 그다지 큰 방이 아니었고요. 여러모로 둘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놓이게 됩니다. 무협지 소설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한몫했을 거예요.
하지만 둘은 어른입니다. 자신들의 모습이 서로의 배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불륜이라는 행동을 인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괴로워합니다. 차라리 각자 이혼하고 돌아온 싱글로다가 맘 편히 만나면 참 좋았을 테지만, 60년대는 지금처럼 상당히 자유로운 시대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캐릭터가 또 착해요. 내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는데, 그 현장을 들이닥쳐 깽판 치려는 생각은 못 하고 서로에게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리니까요. 보통의 K-드라마였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쌍방불륜(..)이라는 이상한 관계가 성립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영화는 결국 두 사람이 헤어지는 방향으로 끝이 납니다.
영화에서는 창문틀, 거울과 같은 프레임을 정말 많이 사용했어요. 왜 이렇게 많은가 생각해보니, 앞서 얘기한 좁은 공간을 이 프레임을 통해서도 나타내는 것 같아요. 펼쳐지는 무대뿐 아니라, 관람객이 보는 시각적인 부분까지도요. 두 사람은 각자의 상황에, 서로에 대한 감정으로 인해 답답한 상태입니다. 그 심정을 프레임도 활용해 이중으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어요. 더 갑갑하고, 숨통이 막히는 듯 애절하게 말이죠.
정적인 장면도 많습니다. 뒤에서 사람들은 재미나게 마작을 하고 있고, 선풍기 날개는 하릴없이 돌아가는데 소려진은 창가에서 밖을 그저 멍하니 쳐다봅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우산이 없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데, 정말 세차게 쏟아지는 비와는 반대로 주인공은 멈춰 서있습니다. 생각이 많은 두 사람의 시간은 멈춰있는 것 같지만, 세상은 그런 마음도 모르고 흘러만 갑니다. 주모운/소려진이 세상과 단절된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을 주면서요. 하지만 그 정적인 분위기로 인해 배우의 심리 연기를 오래 관람할 수 있었고, 가슴 와닿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대사·대화가 없거나 많지 않았는데도 말이에요.
또 한 가지 특이점은 자막으로 시작해서 자막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좁디좁은 공간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어오다 마지막에 와서야 겨우 넓은 바깥(앙코르와트)으로 확장되는데, 그럼에도 결국엔 자막으로 끝나요. 그런데 오히려 이 효과가 극 중 내내 내비쳤던 쓸쓸함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느껴졌어요. 오히려 앙코르와트 장면으로 끝났다면 조금이라도 답답했던 속이 뚫리는 느낌이었을 거예요. 제 생각이지만 그런 느낌을 바란 것 같진 않습니다.
그 시절은 지났고, 마치 한 무더기 벽과도 같다. 먼지 낀 유리창틀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그는 줄곧 과거의 모든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 만약 먼지 낀 유리를 깨뜨릴 수만 있다면, 오래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배우 양조위 때문이었습니다. 꽂히는 배우가 생기면 필모그래피를 정주행 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연기도 잘하는데 잘생기기까지 했다?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중경상림을 보고 이어서 화양연화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아비정전을 보고 있습니다.)
화양연화 영화는, 조금 저렴한 단어를 쓰자면 '내로남불'로 끝나지 않고 굉장히 어른스럽게 끝냈다고 생각해요. 소려진이 계속해서 우린 그들과 다르다며 선을 긋거든요. (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의 감정과 관계를 합리화하지 않고 헤어짐을 선택합니다. 만약 주모운과 소려진 각각의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해서 "복수해주겠어"라는 심정으로 둘이 사귀게 되었다면, 해명할 수 없이 명백한 불륜이었겠죠. 차라리 불륜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진심으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면 아마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극찬받진 못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결국 새드엔딩으로 끝나게 된 두 사람의 사랑이 과연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순간이었을까요? 영화는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이 흘러갑니다. 시작은 1962년이었지만 엔딩은 1966년입니다. 물론 10년 뒤로 넘어가는 영화도 많지만, 4년이란 시간도 결코 짧은건 아니거든요. 여기에 더해 '기억'이란 참 무서운 것입니다. 기억은 나도 모르게 미화될 수 있어요. 추억 보정이라고도 하죠. 주모운과 (마지막에 나오진 않았지만) 소려진에게 있어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슬펐던 그때가,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 화양연화였을 겁니다.
화양연화를 보면서 (비교적) 최근에 보았던 영화 <헤어질 결심>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비슷한 컨셉(배우자가 있는 상황)에, 결말의 분위기가 비슷해서요. 비록 한쪽은 각자의 길을 가고 한쪽은 극단적이었지만.. 헤어질 결심도 어른들의 사랑을 표현해낸 영화이기에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추천을, 반대로 헤어질 결심을 재밌게 본 분이라면 화양연화도 즐겁게 보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이 영화를 나이가 조금 들어서 본 걸 다행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지금도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지금보다 더 어린 나이었다면 영화를 올곧이 감상하기에 생각도, 경험도 부족했을 것 같아요. 왠지 모르게 오늘 애절한 감성에 젖고 싶은 날이라면 이 영화를 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