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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07. 2023

주 52시간 같은 소리 하네

[일] - 1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교통체증으로 길이 꽉 막혀있다. 현지인 친구에게 오늘 무슨 행사라도 있냐고 물어봤다. 퇴근길 러시아워(Rush hour)란다. 황당할 정도다. 시계를 보니 3시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러시아워라니. 저녁 6시에 ‘안전 칼퇴’를 하는 것이 사내 복지로 받아들여지는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황당한 경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말만 되면 마트가 문을 닫질 않나, 금요일에는 다들 오전 근무만 하고 집에 가질 않나, 대부분의 공공서비스가 예약제로 운영되질 않나. 필요할 때마다 자판기처럼 이용할 수 있는 한국의 서비스에 비하면 불편한 점 투성이다.


2022년, 고용노동부는 ‘인구 고령화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노동생산성과 성장잠재력 약화가 우려된다’며 현행 주 52시간 근로시간제를 개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18년부터 간신히 시행되어 온 제도를 손보겠다는 브리핑이 나오자마자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최근 쟁점이 된 이른바 ‘69시간 근무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맹비난받았다.


한국 임금노동자의 연간 근로 시간이 OECD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21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연간 근로 시간은 1,928시간이다. 독일 노동자에 비하면 576시간을 더 일한다. 하루 8시간 근로를 기준으로 하면 72일을 더 쓰는 셈이다.


1년에 72일을 더 일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그 괴리감은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적일많버’(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가 덕담으로 오가건만 적게 일하는 것도, 많이 버는 것도 둘 다 요원하다. 사실 둘 중 하나라도 하고 있다면 운이 좋다.


아침이 있는 삶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저녁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현행 52시간 근무제조차 저녁을 온전히 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는 인고의 순간은 근로 시간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워라밸의 ‘워’ 자라도 뱉어내려면 “역시 요즘 MZ세대들은….”으로 시작하는 비수를 피해 달아나야 한다. 인사와 동시에 가방을 챙기고, 미처 상사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사무실을 나서는 신속함이 포인트다. 그렇지 않으면 기어이 뒤에 이어지는 대사에 발목이 잡히고 만다. “...회사보다 자기 삶이 우선이구먼, 허허. 나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국내 1인당 GDP(국내 총생산)는 2020년을 기점으로 이미 3만 달러를 넘었다. 보릿고개를 매년 힘들게 넘기며 신음하던 과거에 비하면 눈이 부신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나라와 가정을 위해 희생한 국민이 빚어낸 기적이다.


과거에 정부는 젖과 꿀이 흐르는 선진국에 대한 서사를 풀어놓았다. 지금은 이렇게 고생하지만 언젠가 선진국이 되면 그 과실을 모두가 나눠가질 수 있다고. 그러니 지금은 자신을 불살라 성장의 동력이 되어달라고 호소했다.


이 스토리는 꽤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효과도 확실했다. 그리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추게 된 지금도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며 그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대체 구원의 날은 언제 찾아오는 건지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이 슬쩍 고개를 들 때마다 위에서는 ‘한국은 유례없는 위기 상황’이라며 타이른다.


“사실 위기 상황은 건국 이래로 늘 있지 않았나요?”


“이번에는 차원이 다르단다. 그러니 선진국이 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으렴.”


“그게 언제인가요?”


“언젠가는 찾아오겠지만 지금은 아니란다. 자, 일해야지?”


넵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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