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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07. 2023

픽 미 픽 미 픽 미 업

[일] - 2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프로듀스 101>은 꽤 인상 깊은 프로그램이었다. 막후에서 진행되던 아이돌 채용 과정을 전 국민 앞에 드러낸 까닭이다. 101명의 아이돌 후보생이 나와 <Pick Me>라는 노래에 맞춰 칼군무를 추던 장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명 한 명이 간절하게 손을 뻗어 외친다.


픽 미 픽 미 픽 미 업. 나 좀 뽑아주세요. 픽 미 픽 미 픽 미 업.


사실 TV 프로그램의 형식으로 풀어내서 그렇지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지금도 수많은 취업준비생과 수험생이 ‘픽 미 업’을 되뇐다. <프로듀스 101>은 9.18: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보다 희박한 가능성에 목을 매고 있는 사람 정도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을 조금 더 돌려 조선시대로 가면 그 유명한 과거시험이 약 2,000:1의 경쟁률을 자랑한다. 한정된 자리를 두고 의자 뺏기를 하는 문화는 실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저언하, 저를 제발 뽑아주시옵소서. 픽 미 픽 미 픽 미 업.


97년도 IMF 사태가 터지고 기존 경제체제가 붕괴한다. 당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과 함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도 함께 받아들인다. 그 뒤로 노동 시장은 아주 유연하게 몸을 뻗더니 거의 연체동물이 된다. 대표적인 현상이 비정규직의 대량 양산이다. 2021년 기준, 전체 임금 근로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43.0%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 비율은 63.6%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한 고용관계는 덤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사태를 야기한 정부에 대한 분노의 물결이 삼천리강산을 뒤덮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단번에 깨부수어 준 계기가 2020년에 일어난 소위 ‘인국공 사태’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이하 인국공)가 비정규직 보안 검색요원 약 1,900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자 한 정책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공기업 취업준비생들은 이제 공부할 이유가 없어졌다며 부러진 연필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기 시작했다.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막아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올라왔다.


공정성과 노력. 청년 세대에 남아있는 마지막 보루다. 이들의 분노는 겉으로는 ‘인국공’을 향한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면 ‘성과란 공정하게 노력하여 얻어낸 결과물이어야 한다’라는 추상적 분노에 가깝다. 인국공은 그저 모두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놓여 있을 뿐이다.


물론 온정주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정말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불공정의 산물인지, 또한 연필까지 부수며 지키고자 했던 ‘노력’이 공정성을 가르는 척도가 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신분제도가 사라진 시대다. 이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건 능력주의다. 부자가 사회적 부를 쓸어 담는 이유는 뭘까? 그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가난한 이가 밥을 굶는 건 ‘본인의 능력 및 노력 부족 때문’이다. 적어도 ‘공정하게’ 설계된 시스템하에서 일어난 경쟁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게 능력주의의 제1 규칙이다.


인국공 사태는 이 지점에서 능력주의 신자의 역린을 건드린다. ‘제대로 된’ 채용 과정 없이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사람은 정규직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정규직이 되고 싶거든 우리처럼 NCS(국가직무 능력표준) 시험을 치르고, 에너지 드링크를 위장에 쏟아붓고, 도서관 지박령이 되어야 한다. 일견 그럴듯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과연 공정할까?


마이클 샌델 교수는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어떤 시스템이든 완벽하게 공정할 수 없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지능, 부모의 재력, 건강, 운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노력을 해도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문턱을 넘는다. 다른 누군가는 아무리 시도해도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결과물만으로 한 사람을 온전히 판단할 수는 없다. 결과에는 수많은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운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것도 아주 큰 비중으로. 따라서 공정한 기회만큼이나 분배의 정의도 이루어져야 한다.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나락에 떨어지거나, 한번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부를 독식해서도 안 된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공정성이라는 원칙마저 쉽사리 무너진다. 고위층 자녀가 누리는 ‘부모 찬스’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쓰이는 사회다. 거칠게 그어진 ‘노력’이라는 선 하나로 그 모든 불공정을 해결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프로듀스 101> 역시 불공정 이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디션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증거가 속속 발견되었다. 국민 프로듀서를 운운하며 ‘저희는 공정한 능력주의를 통해 인재를 선발합니다.’라던 제작진은 위선자였다.


간담이 서늘하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프로그램에서도 온갖 부정이 판을 친다. 사각지대에서는 오죽할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정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탈락해야 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탈락의 이유를 오로지 ‘자기 능력 및 노력 부족’으로 돌리며 자책해야 했을까.


픽 미 업을 외치며 뻗은 저 수많은 손을 보라. 저들에게 “이번 게임은 졌지만 다음 게임이 있어”라고 대책 없는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그런 판에 박힌 말조차도 삼키게 된다. 공정이라는 거짓말을 도무지 믿기가 어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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