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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07. 2023

퇴근한 김에 퇴사까지

[일] - 3

젊은 세대는 퇴사를 꿈꾼다. 단순히 꿈만 꾸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긴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신입사원의 1년 이내 퇴사율은 23.2%다. 경력 2년 이내로 확장하면 거의 절반 가까이가 퇴사를 결정한다. 직장인의 2대 허언이 ‘나 퇴사할 거야’랑 ‘나 유튜브 할 거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렇게 보면 적어도 퇴사하겠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셈이다.


퇴사 릴레이가 이어지자, 직장에서는 난리가 난다. 일반적으로 5년에서 7년 정도 업무를 익혀야 회사에 보탬이 될 수 있는데 3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절반이 나가버리니 말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코로나 사태로 인한 구인난까지 겹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처음에는 ‘MZ세대’의 개인주의나 열정 부족 탓을 하더니 요즘에는 조금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양새다. 뒤통수에 대고 아무리 욕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이제야 ‘어떻게 하면 어르고 달래 다시 회사로 데리고 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시작한다. 사내 문화를 개선하기도 하고, 소통창구를 늘리기도 하고, 연봉을 올려주기도 한다. 물론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곳이 수두룩하지만 말이다.


100명의 퇴사자가 있다면 100개의 이유, 그리고 욕망이 있다. 퇴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뭘까? 자신의 욕망을 현재의 직장이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누군가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누군가는 업무에서 주체성을 갖고 싶어 한다. 누군가는 의미 있는 일에 투신하고 싶어 한다.


만약 많은 돈을 벌고 싶다면 각종 부업, 금융투자 등에서 유의미한 수익을 내는 게 가능하다. 자기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크리에이터나 사업가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직장이 곧 직업이던 시절은 갔다. 여러 개의 직업을 동시에 갖는 N잡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겸직을 틀어막고 야근으로 진을 빼놓으니 아예 회사를 박차고 나간다.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봐도 직장인 상당수가 퇴사를 꿈꾼다. 하지만 망설인다. 힘들게 들어갔으니, 본전은 건져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고, 무작정 나오기에는 불안하기도 하고, 그냥 귀찮기도 하다. 관성의 법칙은 정신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멈춰있던 사람은 계속 그 상태에 머물려고 한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익숙함을 뒤로 하고 떠난다.


이직을 제외하면 퇴사 이후의 세상에는 아직 안정적인 대안이 없다. 당연하다. 제도권 밖의 들판은 춥고, 배고프고, 위험한 법이다. 따뜻한 울타리 안에 오래 기거할수록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진다. 파랑새가 회사 밖에 있다는 걸 깨달아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퇴직하고 나와야 하지만 그때의 일은 막연하게 다가온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자. 그렇게 다음 월급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가 지난다.


그렇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이제 한숨 돌리고 열심히 채찍을 때리면 되는 걸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의 저출생이 만성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70만 명이 넘었던 연간 출생아 수는 2022년 기준 24만 명대로 떨어졌다. 이는 채용의 대상이 되는 인력 풀(Pool)이 과거의 3분의 1 정도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중소기업은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지방대학도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출생아 수가 20만 명 아래로 떨어진다면 철밥통 같은 직장도 위험하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안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닐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갈 곳은 많다. 한국처럼 이민자도 잘 받지 않는 나라에서는 해외인력으로 충원하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당장 퇴사해서 사업을 시작해야 하나? 아니면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직장으로 옮겨야 하나?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하나? 사는 게 머리 아픈 이유는 단순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가 아니다. 선택지는 않은데 어느 것 하나 손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게 보면 의사결정의 문제지만 근본적으로는 삶의 기준을 묻는다.


난 무엇을 따라 살 것인가?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자기 기준이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뻣뻣하게 굳어버리거나, 잘못된 선택을 내리게 된다. 선택의 결과는 미리 알 수 없더라도 적어도 동기는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결과가 나오든 후회가 없다.


전작인 『퇴근한 김에 퇴사까지』의 서문 일부를 발췌하며 끝을 맺고자 한다.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이루어짐은 대부분 운에 좌우된다. 노력은 다만 그 운을 담아낼 그릇을 빚어내는 작업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릇을 빚어내며 그 결마다 느껴지는 감촉에, 그 눅진한 향에 한껏 스며들 수 있다.


삶에 스며듦. 그건 삶만으로 내 안을 충만하게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은 외부 세계에서 자신의 갈증을 푼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왜 이리 허무한 걸까?’ 회사에 다니면서도 수없이 답해야 했던, 대개는 애써 무시하며 덮어야 했던 의문. 내가 퇴사하는 진짜 이유는 어쩌면 충만함을 위해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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