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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Feb 27. 2024

삶을 긍정하고 긍정하고 긍정하자

비록 공허할지라도

말장난 같지만, 인생에서 '인생'보다 더 큰 화두가 있을까? '우리는 왜 사는 걸까?'라든지, '이제 뭐 하면서 살아야 할까?'라든지, 시점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쯤 되면 '인생의 정답'을 누군가 자신 있게 들고 나와 눈앞에 들이밀었으면 하는 헛된 희망을 품게 된다.


이는 그 누구도, 혹은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선물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나조차도 나에게 무엇이 가장 좋을지 알지 못한다. 나보다 현명할 수 있는 타인은 내 내면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까. 둘째, 결과는 상당 부분 운에 좌우된다. 세상은 더 큰 확률을 향해 치달아간다. 다만 어딘가에 몸을 숨긴 행운이나 불행 역시 언제 튀어나올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무런 기준도 가치도 없이 살아갈 순 없다. 인생은 낭비하기에는 너무 짧고, 동시에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너무 길다. 평소 마음에 두려고 노력하는 최소한의 인생 가이드라인을 정리해 보았다. 충고를 한다는 느낌보다는 '얘는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바쁜 현대인을 위한 요약]

인생에서 공허함은 기본값이다.

삶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다.

사람을 믿지 말자. 적어도 그냥은.

세상에서 확실한 건 내 감정뿐이다.

뭘 할지 모르겠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정 모르겠다면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일을 하자.

삶을 긍정하고 긍정하고 긍정하자.




1. 인생에서 공허함은 기본값이다.


처음부터 꽤 무거운 얘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련다. 삶은 본디 공허한 것이다. 특별히 염세적이거나 비관적인 시선을 갖지 않더라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다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럼에도 인생을 한없이 긍정해야 한다.


공허하다는 건 뭘까?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없이 세상을 부유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 부여받은 생명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혹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없다. 생명은 우연의 산물이고, 아무리 좋게 봐도 광대한 시공간에서 찰나만을 점유할 뿐이다. 물론 삶을 탄생시킨 원인은 존재한다. 다만 그 자체가 사는 이유는 아니다.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설령 어떤 사명을 부여받아 이 땅에 태어났다고 믿어도 수시로 올라오는 공허감을 원천차단하기는 어렵다. 감정은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반영이니까. 그러니 "왜 이리 삶이 공허하지?"라고 묻는 건 잘못된 질문일지 모른다. 공허의 들판에 목적, 의미, 감정, 존재감 등 작위의 깃발을 세우는 것, 그게 삶이 아닐까?



2. 삶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다.


그렇지만 삶의 공허감을 자각하는 것과 허무주의에 빠져 사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허무주의는 말한다. 모든 게 공허하고 부질없다면 삶을 영위할 이유는 무엇인가? 카뮈는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유일하게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자살'이라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다면 모두가 자살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왜냐면 공허함의 유일한 결론이 자살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그리고 공허하다. 이 두 가지 정보를 접한 누군가는 놀랍게도 거대한 의미의 성을 쌓아 올린다. 타인을 돕고, 자주 충만함을 느끼고, 세상과 인간을 한껏 감각하며 살아간다. '공허하지만, 그게 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정답이 없으니 나 자신을 위해 살아도 되겠네?'라고 여길 수도 있다.


허무주의는 허무하다.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척 하지만 실은 자신의 감정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일 따름이다. 인생에 정답이 있다는 말은 못 하겠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오답은 있다. 오답만 피해도 썩 좋은 삶이다.



3. 사람을 믿지 말자. 적어도 그냥은.


그래도 살다 보면 '오답'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타인은 많은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이도 내 일상을 파괴할 수 있고, 최악의 숙적이 의외의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니 나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지는 말자. 날 위하는 사람도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4. 세상에서 확실한 건 내 감정뿐이다.


그럼 무얼 믿어야 할까? 가장 확실한 것, 감정이다. 감정은 오랜 기간 동안 이성에 짓눌려왔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이성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감정이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주요한 척도로 떠올랐다.


이성은 객관, 감정은 주관의 영역이다. 객관은 말 그대로 손님의 시선이고, 주관은 주인의 시선이다. 감정을 가진다는 건 그만큼 삶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외부세계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세상에서 오롯이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경험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나는 감정을 가진다, 고로 존재한다.'


뇌의 특정 영역이 비활성화되어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되면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한다고 한다.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의외로 '이성적인' 판단보다 '감정적인' 판단이 많이 개입하는 셈이다. 물론 감정에만 기대어 결정을 하면 안 되겠지만 생각보다 밝게 길을 비춰줄 수 있다.



5. 뭘 할지 모르겠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렇다면 뭘 하며 살아야 할까? 간단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결과는 알 수 없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내가 가진 시간은 한정적이다. 지금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떠올려보자. 그게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감정은 여정의 든든한 동행이 된다.


거창한 청사진, 너무 먼 미래의 목표, 불안한 마음에 괜히 뒤적거리는 일은 후순위로 미루자. 뭘 할지 고민되는 상황에서는 좋지 않은 대안이다. 지금을 살아가기에도 인생은 짧다.



6. 정 모르겠다면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일을 하자.


그래도 정말 모르겠으면 방법이 있다. 많은 사람이 좋다고 하는 일을 따르면 된다. 물론 이게 정답은 아니다. 나만의 정답은 내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배척할 이유도 없다. 방금 떠올려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운동

예술 감상

산책

글쓰기

돈 벌기

사랑과 우정 쌓기

독서

건강에 좋은 음식 먹기

정리 정돈하기

샤워하기



7. 삶을 긍정하고 긍정하고 긍정하자.


삶이 그토록 공허하다면, 답이라는 게 없다면 왜 긍정해야 할까? 긍정은 낙관과 다르다. 인생을 긍정하는 건 장밋빛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긍정과 부정을 가르는 건 '받아들임'이다. 받아들인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진 않는다. 다만 이 공허하고 힘든 세상을 이겨낼 힘을 준다.


이 지구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각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잘나 보이는 사람도,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어리든 나이가 들었든, 어떤 인종이나 성별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든 마찬가지다. 삶은 고통이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고통. 그래서 끌어안아야 한다.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큼 큰 폭력은 없다. 긍정하고, 또 긍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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