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하기, 분리하기, 곁눈질하기
A 대리는 인사철만 되면 섭외 1순위인 일명 '일잘러'다. 적극적이고 사람 좋은 성격에, 업무도 야무지게 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덕분에 동기 중에서 가장 빠르게 대리 직급을 달았고, 앞으로도 고속 승진이 예정되어 있다. 그는 '회사가 곧 나, 나는 곧 회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웬만한 회식이나 추가 근무에도 몸을 빼는 경우가 없다. 언젠가는 사장이 되어 조직을 끌어가겠다는 야망도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넵넵'이다. 메신저나 문자를 통해, 심지어 전화로 업무를 지시해도 그는 항상 "넵넵!"을 크게 외친다. 가끔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비웃을 때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직장은 본디 지시하고, 지시받는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누군가의 지시를 듣고, 지시를 내리는 이 모든 흐름은 자아에 한점 오점도 남기지 않는다. 그는 한없이 편안하니까.
B 과장은 반쯤 영혼이 나간 상태로 출퇴근을 반복한다. 그에게 회사란 일종의 메타버스와 같다.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의탁해야 하는 제3의 공간. 그는 가능한 한 일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해야 할 업무만 마친다. 마칠 시간이 되면 칼같이 일어나는 건 기본이고, 티 타임도 최대한 활용해서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을 줄이려 한다. 어차피 받는 월급은 똑같으니까.
그의 영혼이 돌아오는 순간은 퇴근 이후, 그리고 주말이다. 그는 최근 탭댄스 동호회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1년에 한두 번은 배낭을 꾸려 3박 4일 트래킹을 다녀오기도 한다. 직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는 '나와 직장은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하며 산다. 생계를 위해 다니는 곳에 에너지를 필요 이상으로 쓸 이유가 없다. 워라밸이나 챙겨준다면 크게 바라는 것도 없다.
C 사원은 벌써 세 번째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중고 신입이다. 총무팀 경리, 콘텐츠 마케터를 거쳐 이번에는 화장품 MD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에게 회사란 일종의 학교와도 같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자 발판이다. 그렇다고 업무를 게을리하진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일을 시키면 기쁜 마음이 앞선다. 여기서 잘 배우면 다른 데에서도 써먹을 게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퇴근해서도 이직 준비와 부업 탓에 바쁜 시간을 보낸다. 부모님은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직 준비냐며 타박을 하지만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 어차피 이곳은 자신의 종착지가 아니다. 덕분에 직장에서 쓴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 나가면 보지 않을 사람에게 마음을 쓸 이유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