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그때 왜 울었어? (1)
한때 내가 본 누구보다 네모난 헤어스타일, 네모난 안경, 네모난 눈, 네모난 턱, 네모난 상체와 네모난 하체, 네모난 발(발마저도!)을 가졌던 이 남자. 나이가 들면서 각이 조금씩 옅어지고, 네모난 형태의 동그라미가 되어가고 있는 이 남자.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도화니’라고 부르는 62세 김도환은 내 아빠다. 우리는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는다.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아마도), 자기 얘기를 잘 안하는 60대 남성과 30대 여성이 부녀로 만나서 그렇다.
가끔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경우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내게 거실 쇼파에 멍때리며 앉아있을 수 있을 시간과 내 이야기를 꺼낼 마음의 여유가 주어졌을 때. 내가 집을 숙소처럼 사용하니, 일 년에 한두 번 될까 말까 한 기회다. 다른 하나는 아빠가 술을 마셨을 때.
어렸을 땐 아빠가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는 날을 기다리기도 했다. 아빠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다. 거기엔 부모님과 안락한 30평대 아파트에서 살고,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니는 내가 상상하기 힘든 세계가 있었다. 성장소설이나 청소년 인문학 서적에도 나오지 않는 멋진 모험이, 가슴 아픈 먹먹함이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술 먹고 내게 술주정한다고 싫어했지만, 나는 네모난 아빠가 유일하게 눈물을 보여주는 시간이라 좋았다. 물론 이야기는 이리 튀고 저리 튀었고, 아빠 기억 속 가장 선명한 부분들만 내게 얘기해줬다. 나는 토막난 이야기들을 들으며 아빠가 왜 울었는지 어림짐작하곤 했다.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면, 아빠가 술기운에 토막난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는 거다. 십 대 후반이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아빠의 레퍼토리를 다 알아버렸다. 언젠간 아빠가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 더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한 지 벌써 몇 십 년. 좀 늦었지만, 아빠가 정년퇴임을 한 틈을 타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아빠, 그때 왜 울었어?
아빠는 60살이 되던 2022년에 코레일에서 정년 퇴직을 했다. 30대 중반부터 다니기 시작해 27년간 다닌 직장이었다. 정년이 58세에서 60세로 연장됐지만, 코레일엔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탓에 마지막 2년은 임금피크제로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고 기존 임금의 2/3을 받았다. 박근혜 정권 때 청년 실업을 구제한다고 임금피크제를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청년 실업이 해결되었는지는 미지수다. 돈을 더 벌기 위해 한때 교대 근무까지 했던 아빠 같은 사람에겐 임금피크제가 좋지 않았다. 만약 아빠가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중간에 해직되고 경력이 무효가 되지 않았다면, 아빠는 부족하지 않은 연봉과 안정적인 연금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노년을 준비했을 터이지만.
마지막 현장 근무는 2022년 12월 중순이었다. 오랫동안 아빠는 열차를 수리하는 일을 했다. 퇴직하기 전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간 선배들의 퇴직 회식에서 사람들을 대표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왔는데도 말이다. 당시엔 큰 고민 없이 선배들에게 고생했습니다, 열심히 잘 사셨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사십시요, 하고 말했더랬다. 그런데 퇴직할 때가 되어서 사람들의 문자와 전화를 연달아 받다 보니 마음이 이상해졌다. 아빠는 그동안 고마웠며 사람들에게 텀블러를 맞춰 돌렸다. 그에 대한 답연락으로 한 후배가 “선배 떠나면 많이 보고 싶을 거다”고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그걸 보니 갑자기 울컥했다. 코레일은 이직률이 매우 낮기 때문에, 그 후배와도 몇십 년을 쭉 봐온 사이였다. 그 사람들을 놔두고 자신은 떠나가는구나, 싶었다.
"그런 감정은 뭐랄까. 자기 연민? 나르시시즘? 이런 걸 수도 있겠지. 왜냐면 나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정년퇴직이라는 걸 한 번도 생각 못 해봤거든. 이십 대 초반부터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계속 해고되었으니까. ‘내가 온전하게 정년퇴직을 할 수 있을까?’, ‘명예롭게 퇴직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거야. 코레일에 들어가서도 두 번 해고가 됐으니까."
나와 친구들은 한 직장에서 계속 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정년퇴직을 꿈꾸지 않는다면, 아빠는 노동운동을 했으므로 정년퇴직을 꿈꿀 수 없었다. 그에게 회사 생활은 노동운동과 사실상 같은 말이었다. 회사에 취직하는 건 돈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노동운동을 위해서였다. 코레일에 들어간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당시에는 지금처럼 비정규직이나 플랫폼 노동자들이 많지 않았어. 이삼십 명, 이런 데[회사나 공장]는 사장도 다 불쌍한 사람이거든. 그런 사람들하고 싸울 게 아니니까, 적어도 이삼백 명 되는 사업장을 가야 하는 거지."
아빠는 21살, 22살 쯤에 공중전화 부품을 가공해서 조립하고 전화국에 납품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지금은 공중전화를 잘 사용하지 않지만, 오늘날 공중전화에서는 당연하게도 전국으로 전화를 걸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서울은 서울로, 부산은 부산으로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아빠가 다닌 곳은 공중전화 네트워크를 전국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부품을 만들었다. 전망이 좋았지만, 아빠는 그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순노동 정도였다. 초촐인데다 아무런 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 회사에서 처음으로 해고를 당했다.
"불만이 있고 의견이 있으면 회사에 얘기해야 될 거 아니야. 그런데 누구도 얘기를 안 하니까, 모여서 회사에 의견을 전달하자고 했지."
다른 회사 사람들은 이십 대 중반, 삼십 대 중반인데 아빠는 스무 살, 스물한 살이었으니까 다들 형이었다. 형들 술자리에 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빠는 술을 못 마시고 안 좋아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단순노동을 하니 사람들과 일하면서 얘기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잔업까지 마치면 밤 10시였으므로, 술자리가 유일하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이었다.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회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놨다. “도대체 왜 광복절에 안 쉬는 거야?” 8월 15일은 광복절,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로 국가가 지정한 휴일이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출근하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불만스러워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가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럼 우리도 쉬게 하죠. 한번 해봅시다!” 한 명 한 명 만나가면서 서명을 받았다. 잘 모르는 형들하고 밥 먹고 술자리에 같이 앉아 있느라 서른여섯 명에게 서명받는 데 못해도 두세 달은 걸렸다. 서명을 받은 뒤엔 ‘그날’ 쓸 유인물도 만들었다.
"8월 15일이 공휴일이니까 쉬게 하라. 뭐 거기에 몇 가지 더 넣었겠지. 환경문제라든지 임금 문제, 그런 기본적인 걸 대변해서 써놓은 거야. 예전에는 A3 정도 되는 큰 게 있었어. 지금처럼 빳빳한 종이가 아니라 모조지 같은 거 있잖아. 거기에 손으로 써가지고 복사하는 데 가서 한 20장 정도 복사하고 오는 거지. 아이고. 옛날 일이네."
인제 와서 40년 전 이야기를 꺼내기 새삼스러워하는 아빠를 대신해 내가 한 번 상상해본다. 혼자서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본 것도 처음, 혼자서 대자보를 써본 것도 처음, 혼자서 회사와 대면하려고 길을 나서본 적도 처음.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누가 도와주지 않았는데, 혼자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다 보니 어느새 ‘그날’이 되어버렸다. 아빠는 출근 시간보다 30분 더 일찍 나와서 회사로 향한다. A3 유인물 스무 장과 서른여섯 명의 서명을 받은 종이를 손에 꽉 쥐고. 모조지로 된 종이는 한없이 얇고 가벼웠지만, 아빠가 기댈 수 있는 건 그 종이가 유일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유인물에 쓰여 있는 말은 모두 법에 나와 있는 말이었고, 사람들의 싸인은 모두 한마음으로 모아낸 것이었으니까.
또래 친구에게 아침 일찍 출근 카드를 다 빼라고 했다. 회사의 출퇴근 시스템은 아침에 카드를 찍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 다시 찍고 나오게 되어있었다. 출근 카드가 없는 걸 보면 사람들이 당황해서 한 데 모일 거라고 생각했다. 몇 달 동안 서명을 받았지만, 150명 중 36명밖에 안 됐다. 나머지 사람들은 상황을 모르니까, 운동장에 모아서 얘기해봐야겠다 싶었다. ‘그날’ 아침 8시, 저 멀리 옥상에서 출근 카드를 뽑는 역할을 맡은 친구가 아빠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회사에 들켜서 못 했어!” 회사에서는 출근하는 사람들을 다 밀어 넣고는 공장 문을 다 닫아버렸다. 그래서 아빠는 혼자 회사 운동장에 서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혼자는 아니었다. 관리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열 시인가 열 시 반인가, 그쯤 총무과장이 탕비실로 끌고 갔다. 반성문을 쓰라면서 윽박질렀다. “너 위장취업자지!?” 예전에도 그런 애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대학교 학업을 마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다른 사람의 신분을 도용해 공장으로 숨어들었던 사람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빠는 진또배기 초졸 출신이었다.
아빠는 반성문을 절대 쓰지 않겠다고 버팅겼다. 총무과장도 지쳤던 걸까, 오후가 되자 나이가 어리니까 봐주겠다며 내쫓았다. “너 해고된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라.”
"그렇게 끝난 거야. 그때만 해도 해고를 자기 마음대로 시킬 수 있었어. 노동자들이 뭘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지. 대들면 경찰서로 연행되거나 구류를 받게 했어."
그런데 왜 반성문을 쓰지 않았어?
"반성문을 써야 될 이유가 없지!"
잘리잖아 그러면? 아빠도 직장이 필요했잖아.
"잘리면 어쩔 수 없지. 자기들 맘대로 하라고 그래. 반성?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어차피 혼자 남았으니까 당연히 걔네가 나를 일 하게 하진 않을 거고."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이런 느낌인가?
"아니 그런 걸 떠나서 반성문을 쓸 이유가 없는 거지!!"
몇 달에 걸친 일이 흐지부지되고, 혼자 회사 운동장에 서서 아빠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때는 분노했을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그 감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아빠는 그때의 아빠를 ‘꼬맹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의 결의를 모아내고 행동,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두세 달은 너무 짧았다. 아빤 자기야말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으면서 자기 생계 걱정은 안 했지만, 다른 사람들 생계 걱정은 했다.
"내가 좀 성급했던 거지. 그 사람들도 거기서 해고되면 생계 문제라든지. 특이 이십 대 후반이나 삼십 대 중반에 가정이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힘들 거 아니야. 이십 대 초반에도 그게 힘들지. 왜냐면 딴 데 또 가는 게 만만치 않거든. 독산동이나 구로 공단에는 블랙리스트라고 해서, 회사 총무과장들하고 경찰하고 요주 인물 명단을 쭉 뿌려. 그래서 재취업이 굉장히 어려운 거야. 활동가들이 특히 그렇고. 일반 사람들도 회사 다니다가 열 받아서 관리자하고 싸웠다, 그러면 취업이 힘들지."
전국의 해고노동자,시국사건 관련자,운동권학생등 8천여명의 명단을 컴퓨터 디스켓에 입력한 불랙리스트가 부산 북구 감전동 신발제조업체인 금호상사에서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이번에 발견된 블랙리스트는 부산지역 뿐만 아니라 구로공단,마창노련 등전국 주요공단 해고노동자와 대학생들의 명단이 망라돼 있어 전국 단위에서블랙리스트에 의한 조직적 "노동탄압"이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있다.16일 금호상사의 전산실에 입력된 블랙리스트 디스켓의 출력용지 사본에 따르면 "사원 체크 리스트"라는 제목의 이 블랙리스트에는이름,주민등록번호,성별,현주소,본적지,특기사항,구분 등 7개 항목으로나뉘어 있다. (- 운동권 8천명 블랙리스트 발견/부산 신발업체서, 한겨레 신문, 1991-09-17)
아빠는 혼자 운동장에 있다가, 혼자 해고당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됐을까? 아빠는 ‘그날’ 저녁, 원래 함께하기로 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걔네가 아빠한테 그래. 너가 잘했다. 노동자들이 언제 찍소리를 하겠냐. 다 아빠 또래들이지. 공고 졸업하고 온 애들."
아빠는 정년퇴직을 하고 한 달 동안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아빠는 방에 계속 있었다. 밥도 거의 먹지 않았다. 거실에도 나오지 않았다. 가끔 정년퇴직을 축하한다며 밥이나 술을 먹자는 친구들의 부름에만 밖을 나섰다.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있었다. 붓기가 가시지 않았다. 아빠는 그렇게 꼬박 한 달을 보내고 나서야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요즘에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선경도서관에 가서 책 보다가 월요일에는 광교산에 가서 바람 쐬고 있어. 거실에는 일부러 잘 안 나가. 테레비 안 보려고. 도서관에는 밥을 안 사 먹으려고 집에서 먹고 2시쯤 가지. 그리고 집에 오면 여섯 시 여덟 시 쯤. 그전에는 한 끼 먹었는데, 체력이 좀 딸리더라고."
당신이 한두 달 동안 한 끼만 먹을 때 온 식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빠는 모르지.
"운동은 요즘엔 수직 운동을 하지는 않아. 수평 운동을 하는데. 왜냐면 수직 운동이 무릎 관절에 안 좋을 것 같아서. 버스에서 내려서 저수지까지 걸어오면 한 시간 걸려. 그리고 이제 시간에 대한 개념이 많이 없어져서 공간에 대한 개념으로 일상을 보내. 시간을 쪼개서 살 필요가 없는 거지. 회사에 출근하면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야 하잖아. 이제는 출근을 하지 않고 특별히 하는 일이 없고. 그래서 아빠한테는 일주일이 하루일 수도, 한 달이 하루일 수도 있는 거야. 지금 사회 체제에 있는 애들이 보면 완전히 미친놈이지. 왜냐면 걔네는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서 사니까."
그러면서 아빠는 얼마 전에 SNS에서 본 이야기를 해줬다. 여섯 시간을 하루로 삼아, 남들을 하루를 4일처럼 사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그 사람을 보며 “괘씸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야, 이런 애들이 있구나 그러면서 나는 다른 관점으로 살아야겠다 싶었어. 그래서 아빠는 일주일이 하루야."
음, 아빠 말을 들어보니 40년을 정리하기에 한 달은 조금 짧지 않나 싶으면서도, 한 달이면 새로운 생활을 맞이하기에 나쁘지 않은 동면 기간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우리한테 시간이 별로 없는 거 같다, 그런 말을 하잖아. 근데 내가 생각할 때는 시간이 아예 없는 거야. 이걸 인지하는 건 인간이 만들어놓은 개념이잖아. 보통 이 사회에서 급하게,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쓸데없이 시간에 과몰입돼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면 일상이 편해져. 바쁠 게 없어."
사실 정년퇴직에는 사회적인 역할을 어느 정도 다 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아빠는 정년퇴직을 하며 뭔가를 해야겠다는 강박을 그만하게 됐다고 했다. 그에게 ‘뭔가’는 노동운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정년퇴직 후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했다. 계속 캐묻자 아빠는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며 질문을 막았다.
"좀 자유롭다고 할까. 노동운동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났으니까. 허전한 것도 없어. 스스로 생각할 때 그렇게 잘하진 않았지만, 그냥 열심히 살았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그냥 내 조건, 내 상황에서는 열심히 살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열심히 살지 않았나, 하는 구간에 들어 아빠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었다. 목이 메더니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렸다. 아빠는 한 손으로 안경을 벗으며 한 손으로 뒷주머니에서 또 다른 손수건을 꺼냈다. 푸하하. 아니 아빠, 손수건을 두 개나 가지고 다녀?
"어? 크흐흐. 이건 코 푸는 거[전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