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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이 맺히듯 끝을 맺는 시기

절기가 보여주는 가을秋

1.


    사람들은 어떻게 계절의 변화를 느낄까? 이를테면 나는 쥐똥나무 꽃냄새를 맡으면 곧 여름이 온다는 걸 안다. 그 끈적한 단내만으로도 여름이 느껴진다. 이번 가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부터 바람이 다르게 느껴지면 곧 더위가 물러간다는 걸 안다. 나는 그런 변화를 느낄 때면 알수없는 경이를 느낀다. 무시무시하게 나를 힘들게 했던 더위가 마른 바람에 납작 엎드리다니! 쥐똥나무 꽃냄새도, 마른 바람도 사소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여름과 가을을 맞이하는 태도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여름에는 오로지 덥고 바쁜 시기를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가을에는 더위의 고비를 넘기고 한해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되면서 괜시리 마음이 다급해진다. 여름만 지났을 뿐인데 내가 그동안 뭘 했는지, 그리고 남은 기간동안 뭘 해야하는지 헤아려보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선선하고 느긋해진 날씨처럼 한가로워진다. 더이상 더위를 피하지 않아도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면서 바람과 단풍을 즐기고 싶어진다. 고대사람들은 조급함과 여유가 함께있는 이 가을을 어떻게 보냈을까?  






2.


    가을이 여유롭다고 느껴지는건 아무래도 명절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명절이라고 해서 마냥 노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한숨 돌리기엔 충분하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한가위같은 명절을 중추절이라고 부르는데, 가을에 전통적인 기념일을 챙기는 건 전세계적으로 비슷하다. 이렇게 가을에 국가적으로 기념일을 갖는 것은 한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며 여름 동안 길러온 작물을 거두고 서로에게 격려를 보내고 결과물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추석이나 중추절같은 명절에는 조상이나 신에게 한 해의 결과물을 보고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바치면서 다음 해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축제를 벌였다.


    추석은 음력 9월 보름날로 정해지다보니 태양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절기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하지만 추석이 대체로 처서(處暑)와 백로(白露)사이에 있기에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농사를 대부분 마무리했을 것이다. 일년에 가장 중요한 대업을 마무리했으니 얼마나 생활이 여유로웠겠는가.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 달리 사람들의 일상은 추수가 끝나도 이어졌다. 사람들은 농사를 마무리하며 여름 동안 사용한 기물들을 정비하고 정돈하는 시간을 가졌다. 농사기구뿐만 아니라 곡식이나 물건의 양을 측정하는 도구들도 정비했으며 국가적으로는 군사들의 무기를 다시 갖추고 포악한 자를 토벌하기도 했다. 또한 여름동안 미뤄두었던 형법을 고치고 범죄자들의 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농사라는 큰 일을 마친 뒤에도 그 끝을 벼리고 다듬으며 잘 마무리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3.


    이런 가을의 모습이 사실 아주 낯설거나 이상한 모습은 아니다. 우리도 학기동안 배운 공부를 정리하는 시험을 치르고 프로젝트를 마무리짓는 보고회를 하는 등 잘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가. 그래서 고대사람들이 마무리에 힘쓰는 모습이 일의 순서에 있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단순한 마무리를 위한 것 보다도 계절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먼저 앞서 있던 것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정수리 위에 떠있는 더울 서暑를 통해 태양과 양의 기운, 그리고 양의 기운이 가장 강해지는 여름의 특성을 알았다. 그런데 이 양의 기운이 가을이 되면 그 영향력이 아주 약해진다. 그 시기가 바로 처서處暑다. 8월 초에 입추가 되면 서서히 가을로 전환이 되면서 처서가 된다. 처서는 더위(暑)가 멈춰서게(處) 된다는 의미로 마치 사면초가 상태가 되어버린 더위를 떠올리면 된다. 갈 곳이 없어진 양의 기운을 품은 더위는 더 이상 자신의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고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이다. 


    이런 변화로 인해 자라나는 양의 기운의 영향을 받던 식물들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더뎌진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성장하는 힘은 어딘가로 흩어져버리지 않고, 남아있는 기운을 응집시켜 하나로 모으게 된다. 그 이미지로 절기에서는 이슬(露)을 보여준다. 백로(白露)와 한로(寒露)에서 사용되는 로露는 풀잎에 맺히는 이슬을 의미하는데 이 이슬은 봄의 비(雨)와 대비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마른 땅에 스며들어 잠들어있던 동물과 식물을 깨우지만, 이슬은 땅으로부터 만들어져 땅이 가지고 있던 기운이 잎사귀 끝에 맺힌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사람들은 땅의 기운이 하나로 모여 응집된 이슬의 모습에서 곡식과 과일이 그 영그는 모습을 떠올렸다.



    고대사람들에게는 더이상 식물이 자라지 않고 낱알과 과일 씨앗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모습을 보며 어떤 전환의 시기를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세상의 변화에 순응하기 위해서 농사를 마무리하고 주변을 갈무리하기 위해 애썼다. 만일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지 않고 계속해서 농사를 하기 위해 애쓰거나 시기와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면 분명히 실패했을 것이다. 어떤 일을 수렴하고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것은 계절의 변화에 감응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있다. 주역에서는 이렇게 변화하는 기운을 감지해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담은 괘가 있다. 바로 지천태괘(地天泰卦, ䷊)다.






4.


    태괘(䷊)의 형상을 보면 위에는 땅을 의미하는 곤괘(☷)가 있고 그 아래에는 하늘을 의미하는 건(☰)괘가 있다. 위에 있어야 하는 하늘이 아래에, 아래에 있어야 하는 땅이 위에 있어 위 아래가 뒤집혀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습을 보고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 크게 빗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괘는 땅과 하늘의 기운인 음양이 조화롭게 소통되어 사계절의 흐름에 맞추어 편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위아래가 뒤바뀐 모습의 태괘는 어떻게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태괘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니, 길하고 형통하다. 泰, 小往大來, 吉亨 (태괘의 괘사)


    우리는 태괘를 통해 우리는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은 누구보다 조화로운 상태를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완벅히 균형을 이루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천둥과 비에서 생명력이 태어난다고 보았던 준괘(屯卦, ䷂)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완벽한 균형과 동등한 힘이 조화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면 무엇을 조화라고 볼 수 있을까?


    태괘(泰卦, ䷊)를 보면 그 단서를 알 수 있다. 작은 것이 앞서고 큰 것이 뒤따라오는 모습도 충분히 형통한 형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화로운 상태란 무엇이 앞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어떻게 감응하느냐의 문제라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앞서는 음의 기운에 순응하고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지천태괘의 태(泰)는 오늘날 편안하다, 크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들은 후대에 소리를 빌려 사용되면서 부여된 의미이고 원형을 살펴보면 사람(大)이 흐르는 물(水)에 양손(廾)을 뻗고 있는 모습으로 본 뜻은 미끄럽다 부드럽다에 가깝다. 마치 음양의 기운이 서로 소통하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보통 양의 기운이 먼저 앞서고 그 뒤에 음의 기운이 뒤따른다고 생각하곤 한다. 음기陰氣라고 하면 보통 작고 어둡고, 차갑고, 음습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기에 이보다는 밝고 활기차보이는 양기를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과의 괘사가 흥미로워진다. 태괘의 괘사에서 나오는 소(小)와 대(大)는 음기와 양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땅地과 하늘天이 겹쳐있는 태괘(䷊)의 형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기서 앞서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작은 것(小)이다. 그러니까 어떤 순간에는 땅의 기운이, 음의 힘이 앞서서 평안한 상태도 있다는 것이다. 앞서는 음의 기운을 따르는 것은 무엇일까? 고대 사람들이 가을에 한 해동안 해온 일을 마치는 것이 대표적인 음의 기운을 따르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지치거나 힘들 때 무리하지 않도록 쉬어 가는 것도 음의 기운을 따르는 것일 수 있다. 어떤 변화의 순간에 스스로를 고집하거나 원하는 상태를 밀고 나가기보다는 그 변화에 순응하고 따르는 것이 하나의 소통 방법일수 있다.


    순응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또다른 단서도 있다. 여씨춘추에서는 계절이 시작할 때마다 하늘의 모습과 땅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다음은 가을이 시작할 때 땅의 모습을 설명한 문장이다.


양풍이 불고 흰 이슬이 내린다. 늦 매미가 울고, 매가 새를 죽여서 진열 해 놓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살육을 시행한다. 涼風至. 白露降. 寒蟬鳴. 鷹乃祭鳥. 始用刑戮. (여씨춘추 맹추기)


    이 양풍涼風은 서늘한 바람이라는 의미인데, 음효가 가장 많은 곤괘(☷)의 바람으로 구분된다. 내가 가을의 문턱에서 느낀 서늘한 바람이 바로 양풍이라고 할수 있겠다. 음의 기운을 가진 바람, 그러니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서서히 이슬이 맺히고 여름을 붙잡듯 매미가 울면서 계절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거다. 찬 바람을 거스르지 않는 것, 그 기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평안한 상태에 이르는 지혜였다.  






5.


    고대사람들이 계절의 변화와 함께 발맞추어 생활하고자 했던 것도 이런 순응을 통해 세상의 변화에 감응하려는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왕성한 성장을 이루고자 하는 여름의 욕망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 끝맺을 줄 아는 것은 실제로도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태괘같이 소통과 감응을 통한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찬바람이 불면 그 기운을 따르고 이슬이 맺히는 모습을 보며 그 방법을 알아채는 것. 이렇게 환경에 순응하고자 했던 고대사람들의 노력은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고려하지 않고 일을 벌리는 나에게 굉장히 필요한 자세이기도 하다. 세상의 형세를 잘 살피고 그것과 함께 발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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