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멀리 계곡사이에서 시작한 바람소리와 작은 언덕을 넘어오는 규칙적인 물소리
그리고 아주 가끔씩 들리는 양 떼의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
바람이 세지는가 싶으면 목방울소리도 함께 들렸다.
어린양은 높은음으로 울어댔고 덩치 큰 양은 굵게 길게 울대를 떨었다.
양은 '임호'를 등지고 어디론가 향해 무리 지어 이동했다.
하늘 위로 이름 모를 새들이 가끔씩 울며 날아갔다.
평온한 어느 초원의 아름다운 풍경! 끝없이 펼쳐진 초록 위로 양 떼들은 작아졌다.
멍하니 움직이지도 못한 채 임호는 그렇게 그곳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낯선 곳이지만 마음은 한 없이 평화로웠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발은 땅에 딛고 있지만 중력을 느낄 수 없다.
그때 한참을 서있던 임호 곁에 말을 탄 목동이 다가온다.
목동은 긴 막대기를 든 채 한 무리의 양 떼들을 또 몰고 나타났다.
말에서 내려 임호를 쳐다보며 목동은 물었다.
Who are you?
임호는 목동을 쳐다보았다.
상기된 볼은 좀 튼 듯 보였고 이제 막 자라난 듯 한 코밑과 갸름한 턱선엔 솜털이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낯설진 않은 얼굴 어디선가 본 듯 한 모습.
임호는 목동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I don't know
목동은 말에서 내려 임호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Where are you from?
그리고는 긴 막대를 들어 양 떼들에게 휘둘렀다.
2진 양 떼들은 일제히 불규칙적인 괴성을 지르며 뭉게구름처럼 한 무리가 됐다.
임호가 대답이 없자
목동은 점점 넓은 초원으로 걸어갔다.
막대기를 흔들며. 그리곤 움직이지 않는 임호를 향해 소리치듯 외쳤다.
This is Scotrand!
임호가 병실에서 눈을 뜬 건 사고가 난 후 거의 40일 만이다.
빠르게 그리고 한 없이 느리게 수많은 그림들이 임호의 머릿속을 헤엄쳐 다녔다.
본능적으로 팔다리에 힘을 주고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스스로에게 들을 수 없었다.
잠깐만.
심연의 울림을 듣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자.
뭐든 들었던 내용들, 이야기, 소리, 소음 뭐든 이어보자.
그러나 모든 것은 흩어질 뿐 선명하지 않다.
한참을 그렇게 애쓰는 임호의 의식 안에 속삭임이 들어왔다.
'호야~'
그것은 분명히 나의 아버지 하나 음성만 기억이 나는 임호의 아버지 목소리다.
'호야~'
임호는 환청이란 걸 알면서도 그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아빠?'
그 짧은 두 마디였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정적을 깬 건 회진 간호사의 까랑한 하이톤의 목소리.
아마도 임호의 바이탈사인 모니터를 본 것일 것이다.
그렇게 임호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잠에서 깨어났다.
스코틀랜드의 목동은 까맣게 잊은 채.
민철은 임호가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한 번도 임호를 친구라 생각한 적이 없는 이기적인 성격의 유망주
아무 걱정 없이 하루 8시간 이상을 연습장에서 보내는... 임호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친구
사고 이후 민철은 한 번도 병실을 찾지 않았다.
연습장에서 임호의 어머니를 만날 땐 온갖 걱정된 얼굴로 배우처럼 연기를 했다.
'어머니 호는 금방 일어날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민철이 임호를 넘지 못하는 벽이라고 생각하는 건 임호의 평균 타수도 비거리도 아닌
그의 퍼팅감이었다. 반면 민철은 매번 퍼팅에서 고배를 마셨다.
골프란게 한 가지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닌 운동이지만 결정은 늘 퍼팅에서 나기 때문이다.
임호는 특히 라이를 잘 읽었다. 발의 감각으로 높낮이를 파악하고 잔디의 결을 읽고 특유의 손감각으로
거의 컵에 붙는 거리감을 자랑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았다.
주치의는 임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임호는 화상이 심했다. 낙뢰가 느티나무를 때렸고 나무밑에서 아이언을 들고 있던 임호의 팔로 빠져나갔다.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가면서 심폐소생을 받았다. 다행히 숨은 돌아왔지만
전기가 온몸을 헤집고 나간 후라 어디가 어떻게 망가졌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피부과의사는 아이싱을 열심히 했다. 흉부외과는 장기를 스캔했고 신경정신과의사는 머리 사진을 찍었다.
협진은 임호를 앞에 두고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그 누구도 임호의 상태를 낙관하지 않았다.
실제로 사고 당시 나무 주변에 있던 8명 중 2명이 사망했고 5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었다.
그중 선수는 임호뿐이고 사망자는 캐디였다.
뉴스는 당시 짧고 굵게 연일 보도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약속이나 하듯 사라졌다.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사고 이후 임호도 대중들에게 잊혀갔다.
그리고 젊은이들 위주로 소위 MZ세대를 중심으로 골프의 인기도 많아졌다.
민철의 가업도 승승장구했다. 유명 프로 선수들의 스폰서 기업으로 브랜드를 알렸다.
오랜만에 뉴스에서 임호의 소식을 짤막하게 언급했다.
민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6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낙뢰로 쓸어졌던 임호선수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임호는 아직 누워있다.
눈은 떴지만 그야말로 식물인간.
잠시 복잡했던 머리를 식히려 눈을 감았다.
다시 어느 혹은 그 초원이 펼쳐졌다.
양 떼가 나타났다. 낭만적이던 초원엔 폭풍이 몰아 치고 있었다
젖은 양 떼들은 머리를 숙인 채 수십 마리씩 한 몸처럼 어디론가 흘러갔다.
무섭고 멍청해 보였다. 사납고 저돌적이다. 마치 양의 탈을 쓴 멧돼지 같이 거렸다.
늑대가 와도 전혀 흩어지거나 뒷걸음치지 않을 성난 군중 같은 흐름이었다.
임호는 한참을 그렇게 비를 맞고 양 떼를 보고 있었다.
목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임호는 지금 살아 있는 것조차 믿기 힘들고 살았지만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이 더 싫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 누워있는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