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공단 계획이 발표되자 땅값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장님은 매일 동네 방송으로 사람을 모았다. 아버지는 이장님께 받은 종이를 가지고 오셔서 뚫어져라 쳐다보시며 돋보기를 쓰고 계산기를 두드리셨다. 농사만 짓는 아버지가 이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건 처음 봤다.
"막내야, 이리 와봐라."
"네, 아버지"
나는 빨갛게 옷 칠한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나란히 앉았다.
"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가라. 아버지가 팍팍 밀어줄게. 이제 아버지 돈 많다."
대학을 가고 싶다고 가는 것도 아닌데, 좋은 대학은 어떤 대학인가?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로 들렸다. 내 성적으로는 지방 전문대도 어려운데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해 보였다. 대학 등록금을 대주신다는 말인지? 과외비를 주신다는 말인지 묻지 않았다. 하긴 과외금지 시절이라 달리 방법도 없던 시절이긴 했다.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던 형이 동네에 새로 생긴 공장으로 내려왔다. 나이 차이 나던 형은 일찍 서울 올라가 공단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누나도 집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좀처럼 집에 찾아오지 않던 누나가 아버지 선물을 사들고 드나들었다. 술 마시지 않으면 말이 없던 매형이 술을 사들고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님, 제가 그동안 일이 바빠 제대로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그래, 김서방. 일도 바쁠 텐데.. 고맙네."
누가 봐도 땅 보상금 때문에 벌이는 일이란 걸 알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 김서방 사업 자금으로 돈해주면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어머니는 매형이 돌아가고 나면 아버지를 앉혀두고 신신당부하셨다.
"이 사람아. 돈은 있고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건데, 자식들 잘 되면 좋지 않은가?"
형이 서울 가며 혼자 쓰던 방을 다시 함께 쓰면서 불편하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밤이면 술 마시고 들어와 술 주정까지 하는 형 때문에 힘들었다. 서울 가기 전에는 고등학생이라서 괜찮았는데 성인이 된 형은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듯 보였다. 그래도 가끔 목돈을 쥐여주는 형 때문에 친구들에게 거드름을 피울 수 있어 고마웠다.
"형도 아버지 돈 때문에 내려온 거야?"
"야 인마, 누가 그래?"
"다들 아버지 돈 때문에 난리인데 뭘, 모를 줄 알아. 나도 다 보여."
"넌 아직 어리니까 몰라. 그건 아버지 돈도 아니야. 집 안 대대로 내려오는 땅이잖아. 아버지도 물려받은 돈이지. 아무튼 넌 그런 거 몰라도 돼."
개구리 잡으러 다니던 저 길 끝에 길이 닦이고 공장이 들어섰다. 밤이고 낮이고 연기가 솟아올랐고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이사 왔다. 학교에도 한 달에 수십 명이 전학을 왔다. 이러다 우리 동네가 이방인으로 가득 채워지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됐다.
"아버지, 우리도 이사 가요?"
"그럼, 이사 가야지. 여기도 조만간 길이 생기고, 빌딩이 들어온단다. 좋은 집을 알아보고 있다."
"아버지 우리도 2층 집으로 이사 가요. 서울로 가면 안 돼요?"
"농부가 2층 집 무슨 소용이 있냐? 서울 가서 뭐 해 먹고 사냐?"
아버지 말을 들으면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드라마에서 보던 서울 2층 양옥집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로 전학 간 친구들은 명동, 남산, 대한 극장, 종로를 이야기했다. 멀지도 않은 서울인데 여기와는 너무 달라서 나는 마치 시골 깡촌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도 서울로 이사하고 싶었다.
"막내야, 여기 전철도 들어온단다."
"아버지 전철이 뭐예요?"
"너 수원 갈 때 타는 기차 있잖아. 그거랑 비슷하다. 그거 타면 서울까지 간다더라. 여기도 서울처럼 변하는 거지. 좋지?"
"서울이요? 그럼 서울 친구들도 만나러 가기 쉽겠네요."
"그렇지. 너도 서울로 대학가라."
서울과 연결되는 전철이라... 생각만 해도 가슴 뛰었다. 서울로 전학 간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나도 서울 사람이 될지 몰랐다. 서울로 가고 싶었다.
우리 집이 부자가 되고, 서울에 방도 얻어준다고 하시는데, 서울로 이사 갈 핑계가 없었다.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서울권 대학 가기에는 성적이 너무 부족했다. 마음만 명동을 떠돌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담임과 대학 입시 상담을 했다.
"어머니, 이 성적으로는 지방대 가는 것도 기적입니다."
당연한 말인데도, 어떻게든 서울로 가고 싶었다. 어머니 대신 내가 대답했다.
"서울로 원서 써주세요. 안되면 재수할래요."
어머니는 옆에서 한숨만 쉬셨다.
그해 대입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나는 부모님을 졸라 재수생 신분으로 노량진에 입성했다. 대학생 아들을 두고 싶은 부모님 마을을 교모하게 이용했다. 그래도 서울은 서울 아니던가? 나름 꿈에 그리던 목표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