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꽃이 피는가 했는데 금세 탐스러운 분홍색을 드러냈다. 아기 엉덩이 같은 모양의 복숭아를 보고 있노라면 살짝 꼬집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조심스럽게 한 알 한 알 따서 바구니에 쌓았다. 복숭아끼리 붙어 짓무르지 않도록 다른 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여름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여름이다. 장마 소식이 올라오기 전에 어서 따야 당도를 유지할 수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
과수원은 15도 정도 내리막 경사가 이어지다 골짜기를 만들고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져 마치 V자 모양처럼 보였다. 1000그루 정도 되는 복숭아나무가 오와 열을 맞추어 V자로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앞에도 복숭아, 뒤에도 복숭아, 건너에도 복숭아... 보이는 것은 강렬한 태양을 머금은 파란 하늘과 복숭아뿐이었다. 그나마 저 멀리 마을이 보이고 새로 난 도로에 차들이 질주하고 있어서 도시에서 멀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아직도 일을 마무리하려면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벌써 피곤이 몰려왔다. 선크림을 발랐는데도 땀으로 진작에 지워졌다. 햇빛을 가리는 모자와 선글라스 때문에 더 더운 게 아닐까 싶어 벗었다. 정수리가 금방 뜨거워지는 것을 보니 이번 여름도 장난 아니게 더울 모양이다. 서둘러 모자를 눌러쓰고 가위를 손에 들었다.
건너편에 몇몇 남자가 복숭아를 수확하고 있다. 한 남자가 손짓하며 소리를 질렀다. 식사하라는 신호, 배우지 않아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가위를 내려놓고 장갑을 벗어 복숭아 바구니에 넣어두고 원두막이 있는 과수원 꼭대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과수원 주인이 물방울이 맺힌 유리 주전자를 들어 시원한 물을 먼저 따라주었다. 7명의 남자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복숭아에 관한 이야기 말고는 다른 말이 없었다. 한 남자가 나서서 질문을 던졌다.
"다음 주까지는 여기서 일하는 거 맞죠?"
"네! 어서 서둘러야 내놓을 수 있습니다. 품삯은 더 쳐드릴 테니까, 조금만 더 서둘러주세요."
식사는 도시락, 유명 프랜차이즈에서 내놓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농촌에서 아낙들이 지고 온 다라이속에는 각종 제철 음식이 가득했었는데, 시대가 많이 변했다. 원두막이라고 하기에는 호사스러운 농막을 보며 여기서 밤을 지새워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가 3개나 있고, 에어컨에 전기난로까지 없는 게 없다.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사장님 여기 수확하면 얼마나 벌어요?"
"얼마 못 벌어요."
"그래도, 봄부터 여름까지만 일하는 건데요. 나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주인은 머뭇하더니
"올해는 볕이 좋아서 5000만 원 정도 나올 거 같아요. 일하는 거에 비하면 돈도 안돼요."
4개월 정도 일하고 5000만 원이 별거 아니라는 사장의 말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장갑을 끼고 가위를 들었다. 한 구루 복숭아를 땄을까 싶을 때 주인이 새 바구니를 들고 내 곁에 왔다.
"이 동네 사람이라고 하셨죠?"
"네, 이 동네 토박이죠. 할아버지 아버지 때부터 쭉 살았어요."
주인은 악수를 청하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 동네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여기 살고 있어요. 저기 신도시 개발되기 전부터... 아버지,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적부터 여기 살았죠."
도로 너머에 펼쳐진 신도시가 보였다. 미세먼지로 뿌옇게 변해 희미하게 보였지만, 많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넘쳐나던 신도시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아까 궁금했는데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과수원은 오래 하셨어요?"
"아니요. 이건 부업으로 하고 있어요."
"부업이요?"
나는 깜짝 놀랐다. 과수원을 부업으로 한다고? 5000만 원을 부업으로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래 한 계절 일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다른 일도 하세요?"
"제 진짜 직업은 관세사입니다. 수출입을 지원해 주죠. 평일에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일을 합니다. 예전에는 고정으로 일했는데, 지금은 프리로 일해요. 관세사 수입이 더 많으니 과수원은 부업이죠."
주인은 털털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나는 주인의 손을 잡으며 묻고 싶은 게 더 있다고 했다. 신도시 개발되던 그때 혹시 땅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보상을 받았는지? 얼마나 받았는지?
"그때 아버지가 보상을 많이 받았죠. 지금 돈으로 하면 50억도 넘을 겁니다. 아버지는 농사꾼이 돈이 있으면 안 된다고 그 돈으로 여기에 또 땅을 사셨어요. 천직이 농사꾼인데 어쩌겠어요. 제가 이어받아 이렇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땅을 놀리면 안 되잖아요."
"지금이라도 여기 팔고 다른 땅을 구입하시면 더 낫지 않을까요?"
주인은 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저 도로가 더 이어지고 나면 어디에 아파트를 지을 거 같아요? 과수원은 부업이라니까. 토박이면 잘 아실 거 아닙니까?"
갑자기 낮은 구릉의 복숭아밭이 도시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산 전체가 몇 평인가? 높지도 않으니 밀기도 좋고, 흙을 팔아도 돈이 얼마란 말인가? 넓게 펼쳐진 과수원을 멍하게 바라봤다. 오전에 보던 풍경과 사뭇 달라진 이 금싸라기 땅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