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16. 행복은 욕심일까?
배정환
태성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누구보다 사업에 적극적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백화점에서 옷을 구입했고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나이키 조던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가끔 어머니는 기사아저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외출하기도 했다. 태성은 잔디가 발목까지 올라오는 정원에서 어머니와 차 마시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최소한, 밖에서 보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친구들도 태성의 집에 놀러 오고 싶어했다. 친구와 유행하던 게임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유명 빵집에서나 먹던 빵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태성이 사춘기를 지날 때, 어머니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병명이 우울증이라고 했다. 기사와 일주일에 한 번은 병원에 다녀오는 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기사도 걱정이 되었는지 태성에게 말했다.
"어머니, 차안에서도 말이 부쩍 줄었어."
오랜만에 집에 놀러온 어머니 친구가 말했다.
"너처럼 다 가진 여자가 무슨 우울증이냐?"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했다. 태성이 옆에 있으면 불편해하는 표정을 보이곤 했기 때문에 태성은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 아버지도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확실히 줄었다. 어머니는 사업 때문에 아버지가 바쁘다고 둘러댔지만, 태성도 더 이상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급하게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를 봤다. 그 앞에는 어릴 적부터 이모라고 부르던 어머니 절친이 앉아 계셨다. 두 분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기에 저토록 서럽게 우실까? 이모를 배웅한다는 핑계로 따라나서며 이모에게 물었다.
"엄마 무슨 일 있죠? 요즘 걱정이 돼요."
"너도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알만한 나이지. 니 아빠 딴 집 살림 차렸단다. 지 혼자 성공한 줄 알고 어떻게 니 엄마한테 이럴 수 있니? 태성아 니가 엄마 잘 보살펴줘라. 아들밖에 더 있니?"
예상은 했지만, 이모 입으로 직접 듣고 보니 아버지에 대한 분노보다 어머니를 향한 걱정이 앞섰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에 살 수 있음에 감사할 수만은 없었다. 아버지가 가끔 집에 들어오시는 날에는 먹구름이 집안을 감쌌다. 아버지는 웃으며 식사도 하고 TV도 봤지만 어머니는 방에서 나오기 꺼려하셨다. 태성도 아버지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온 어느 날 태성 방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태성아! 요즘 공부 잘하고 있지?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아빠에게 부탁해라. 용돈은 있니?"
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태성의 손에 수표 한 장을 쥐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가 방을 나간 후 태성은 핀셋으로 돈을 집어 서랍에 넣었다. 어머니는 얼마나 아버지가 더러워 보일까? 어머니가 걱정되어 잠도 오지 않았다. 어서 다음 날이 밝아 아버지가 출근하기를 바랐다.
어느 날부터인지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태성은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 회사 앞에 찾아가 퇴근하는 아버지를 택시로 미행했다. 아버지는 경기도 신축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나름 평수가 꽤나 되는 큰 아파트였다. 주차장에서 아버지 차를 찾았다. 평소에 기사를 쓰던 아버지가 손수 운전을 해 왔다면 여기가 맞을 듯싶었다. 엘리베이터가 마지막으로 찍힌 10층을 기억했다.
다음 날 새벽 아파트로 향했다. 사람들과 덜 마주치려고 10층 꼭대기로 얻었을까? 비상계단에 앉아 양쪽 현관문 어디서건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다만 그게 아버지가 아니길 바랐다. 나오더라도 아버지 혼자 나오기를 바랐다. 집이 멀어서 출퇴근하기 좋은 곳으로 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돌아갈까 수없이 되뇌었다. 헛소문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아침 햇살이 떠오르고 출근시간대가 되자 엘리베이터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현관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렸다. 태성은 엘리베이터 앞에 당당히 섰다. 아들로서 더 당당해 보이고 싶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아버지를 따라 젊은 여자가 따라 나오며 포옹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현관 앞에 선 아들을 마주한 아버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태성이 더 당황했다. 태성은 여자의 아래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남산만 하게 배 불러온 젊은 여자는 얼른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철썩! 아버지는 다짜고짜 태성의 따귀를 때렸다.
"건방진 자식!"
"아버지... 어머니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전혀 모르는 족속들~"
태성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계단으로 뛰어 내려왔다. 왜 아버지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가족 부양을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족속들이란 말이 더 이상 가족이 아니란 말로 태성의 머리를 울렸다. 어머니가 지금의 아버지 모습을 봤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간통죄로 고소할 수도 있을 텐데 어머니는 조용한 이혼을 택했다. 위자료로 힘들게 살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병원약은 늘어만 갔다. 아버지는 분명 성공한 기업인이 맞았다. 성공이 뭐길래 저토록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걸까? 행복을 꿈꾸며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을 사람들 아닌가? 이렇게 쉽게 이혼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성공이란 게 뭐길래? 행복이란 게 뭐길래? 여러 사람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지 혼란스러웠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들어간 날 어머니가 태성을 불러 앉혔다.
"왜 너마저 엄마를 힘들게 하니? 너라도 마음잡고 살아야 엄마 마음이 편할 거 아니니."
"죄송해요. 그래도 저는 아빠를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는 네가 하는 게 아니야. 우리는 우리대로 잘 살면 된다. 너는 나중에 결혼하면 가족들에게 이런 짓 안 하면 되는 거야."
태성은 자신이 어머니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태성은 옛날 생각을 하며 혼자 맥주를 마셨다. 문득 소파에서 잠든 딸을 보며 자신의 삶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태성은 가정을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엄마 없이 자란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딸의 얼굴에서 아내를 찾아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은지에게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건 아닐까? 행복이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