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id Kwon Aug 19. 2021

[작은 꿀벌처럼 맛집천재] 식물과 치즈의 깨달음


얼마 전 미몰레트 치즈를 처음 먹었습니다. 프랑스의 단호박색 치즈입니다. 진한 주황색을 보고 아주 짤 거라고 내심 굳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먹어보니 말린 어란처럼 맛있게 짭쪼름해서 곧 저를 중독시켜버린 취향에 맞는 치즈였습니다. 어찌나 맛있게 먹었는지 한국 사람들은 잘 먹지 않는다는 껍질까지 서슴없이 맛있게 먹었어요. 그리고 이 치즈를 백화점 시식대에서 먹는 모양새대로 깍뚝썰기를 하는게 아니라 마치 포를 뜨듯이 어슷하게 얇게 깎아낼 때 혀에 닿는 맛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사람도 경험도 이 미몰레트 치즈처럼 겉으로 보이는 보이는 모습 때문에 생기는 편견으로 애초에 멀리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접하느냐에 따라 이면을 볼 수 있다는 걸 치즈가 깨닫게 해주었어요. 



식물을 매개로도 색다른 깨달음을 얻은 일이 있습니다. 한 번은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였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정한 사람이 좋은데 그 다정함을 잘 묘사해주는 글을 발견한 적은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떤 소설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렵고 고된 삶을 성실히 살아요. 그 주인공이 생계를 위해 매일 집을 나서기 전 골고루 햇빛을 받으라고 식물들을 아껴주면서 조금씩 화분을 돌려 놓아주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화분을 돌려 놓아주는 속마음 묘사를 보고 주인공을 향한 시나브로 스며드는 사랑이 시작됐습니다. 어떤 사람의 다정함을 깨닫는 것, 사람에 스며들어 마음의 문이 열리는 건 아주 작은 계기들인 것 같아요.



식물이 사람의 이면을 보게 해 준 일도 있었어요. 취업해서 일했던 첫 번째 직장은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이 있어서 그 직장이 있던 동네조차 퇴사 후 몇 년간 얼씬도 하지 않았어요. 세월이 꽤 흘러 한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면접관이 먼저 알은 체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첫 직장에서 같은 팀이던 상사셨어요. 첫 직장에서 몇 없는 저를 괴롭게 하지 않았던 분 중 한 명이었지만 솔직한 심정은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공고에 올렸던 것보다 높은 금액으로 계약을 제안해 주었고 일감이 간절했던 제 새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면접관으로 다시 만난 상사를 대하기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첫 직장에서 오래 보고 매일 같이 밥을 먹었는데도 단 하나도 몰랐던 상사의 여러 모습들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상사는 전 직장에서 허리에 병이 생겨 큰 수술로 6개월간 거동이 어려워져서 결국 퇴사하게 되셨다고 하셨어요. 그 기간 동안 우울증이 생겼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작은 어항을 만들면서 취미 생활을 하다가 그 다음에는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셨다고 해요. 



이 상사는 액션 배우처럼 커다란 체구에 어디 하나 약한 모습 따위는 없을 것 같은 외양입니다. 그럼에도 회사에서도 거리낌없이 우울증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솔직하게 속을 털어놓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속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모습이야 말로 회복에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엄격해 보이는 협력 회사의 높은 사람을 보고도 “저 사람도 공황장애야”라고 짤막하게 말해주시기도 하셨어요. 아무리 나이 먹어도 모두 다 그저 인간이라는 것, 각자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해 나가는 사회인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 직장의 회사 건물은 낡았지만 공간이 컸고 녹색이 가득했어요. 알고 보니 그 중 대부분의 식물들은 상사가 댁에서 가져다 두신 거였어요. 가끔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는데 상사가 보기보다 훨씬 섬세한 분이고 지브리 음악을 좋아하신다는 점, 식물의 세계는 토질부터 습도 관리까지 제가 모르는 깊고 넓은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은 거의 식물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짤막한 대화를 통해서 첫 직장에서 저의 직속 사수가 저를 힘들게 했던 것에 대해 아신다는 이야기와 제가 고쳐야 할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셨어요. 회사 내에서는 서로 무관심하게 모른 척하거나 모르고 넘어가는 줄 알았던 일들은 ‘상사들도 사실 정확히 알고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또 세월이 흘러 경험이 쌓여 달라진 시선으로 저와 첫 직장에서의 일들을 다시 바라보고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어요. 들추기 싫었던 기억을 헤집어서 들여다 보니 회사와 관리자의 입장이 머리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회사에서 프로젝트가 끝나고 정규직 제안을 받았습니다. 고민 끝에 떠나기로 마음 먹은 날 상사가 몬스테라 아단소니의 화분을 선물로 주셨어요. 구멍이 뚫린 잎사귀를 가진 식물인데 구멍이 뚫려서 밑의 잎사귀도 햇빛을 받게 도와준다는 점이 상냥하게 느껴진 식물이에요. 처음에는 단지 잎사귀가 몇 개 뿐이었지만 오늘 보니 어찌나 잘 자랐는지 원래 주셨던 화분받침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풍성해졌어요. 곧 새로운 분갈이를 해주려고 합니다. 이 식물을 매일 돌보면서 고마운 마음,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마음, 용기가 생겨나요. 제가 마주치자마자 도망가고 싶었던 상사가 나눠주신 살아야겠다는 마음, 그리고 용기예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