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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Jun 29. 2021

진짜도 모르면서...

베트남 쌀국수

2003년쯤인가 보다. 분당에 새로운 베트남 쌀국숫집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집에 있는 아빠와 내게 점심 먹으러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서울에만 몇 집 있다는 쌀국수 식당이 남쪽으로도 내려온 모양이다. 경기남부 최고로 시크한 동네 분당에.. 엄마는 교회 젊은 집사님들 덕분에 ‘앞서가는 유행’을 파악하신 듯했다. 30분을 차로 달려, 낯설고 깨끗한 동네 어느 대로에 위치한 식당을 발견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블루 파스텔톤의 파사드는 누가 봐도 세련돼 보였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넉넉한 좌석 중 맘에 드는 테이블을 골라 앉고 위풍당당하게 소고기 쌀국수 세 그릇을 시켰다. 손바닥만 한 하얀 국그릇 안에 곱게 타래튼 굵은 쌀면은 찰랑찰랑 한 육수에 담겨 있었고, 그 위에 생숙주와 편 썰어진 고기 몇 점이 얹혀있었다. 송송 썰어낸 파 고명을 얹혀 가지런하게 서빙되었다. 낯선 향의 태국 바질과 고수는 작은 접시에 따로 담겨 나왔던 것 같다. 만일 국수 안에 잠겨 나왔더라면 나와 두 부모님은 평소에는 맡아볼 일 없던 해괴한 향에 입도 대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정갈한 모양에 비해 맛은 별로였다. 집에서 자주 해 먹는 물국수도 간장 양념 듬뿍 넣어 풀어먹는 우리 식구 입맛에 베트남 쌀국수란 녀석은 맹맹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은 테이블마다 구비해 놓는 해선장이나 스리라차 소스도 없었던 것 같다. 있었다 한들 그 두 소스를 가지고 입맛에 맞게 제조해 먹는 방법을 몰랐을 테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둘러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빠는 한 말씀하셨다.


" 아이고 그거시 식사냐아 ? 그냥 간식이지? "



공식적으로 차이나타운이라 구획되지 않았지만 파리 중국인 동네quartier chinois 에는 무수한 베트남 쌀국숫집이 있다. 한때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였으니 이주한 베트남 사람들 덕분에 쌀국수가 전파되었을 거라 추측했다. 불어로는 어감도 별로인 똥끼누와즈 (Soupe Tonkinoise, Tonkin 지역의 수프)라고 불러서 처음 접하기 영 낯설었지만, 먼저 파리에 입성한 친구를 따라 맛본 그 고기 국물을 잊을 수가 없다. 반질거리는 고깃기름이 동동 떠다니는 육수 한 숟갈 맛보고는 나도 모르게 '크아' 하고 속 풀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숩 똥끼누와즈는 진짜 베트남 사람들이 한 거라 다르구나, 한국에서 허접하게 맛본 쌀국수는 가짜였구나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의 베트남 국숫집은 중국인이 운영한다. 일부 쌀국수집의 시작은 베트남 이주자들에 의해 탄생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한 유명한 베트남 사람이 운영하는 유명한 쌀국수 집은 없다. (있다면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오리지널을 맛보고 싶다. )하지만 중국인이 하는 쌀국숫집도 대부분은 이것저것 다 몰아넣은 거시적 메뉴의 그저 그런 집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 13구 베트남 국숫집 Pho 14는 캄보디아 사람이 주인이다. 프랑스 현지인들은 면을 국물에 말아먹는 형식을 여전히 어색해하지만 가끔 먹는 저렴한 별식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2018년 가을, 9월치고는 날씨가 꽤 쌀쌀했던 그날, 한국의 온 가족이 나와 함께 추석을 보내겠다며 모두가 큰맘 먹고 프랑스 땅에 발을 디뎠다. 파리 여행에 적격인 계절임에도, 하필 여행 내내 날씨가 도와주질 못했다. 유난히 쌀쌀한 주간에 가족들이 입성한 것이다. 그날의 일정은 오전에 에펠탑을 보고, 사돈 네 가족과 샹젤리제에서 만나 바토무슈 유람선을 함께 타기로 한 날이었는데, 아침 내내 상공 800미터 위에서 추위에 떠는 가족들을 보니 점심에는 뜨끈한 국물을 먹어야지 싶었다. 그래서 떠오른 메뉴가 베트남 쌀국수였는데, 한국에서 먹는 그 맛보다 더 진한, 어쩌면 원조 일지 모를 쌀국수의 진수를 보여줘야지 하며 속으로 완벽한 계획이라며 자신만만했다. 가족들은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 전경을 오들오들 떨며 관람하고 있을 때, 나는 핸드폰을 들고 구글링에 전념하며 근처의 베트남 레스토랑을 열심히 찾아 헤매었다. 점심 이후 동선이 샹젤리제라 지하철을 타도 30분 이상 떨어진, 왕복까지 치면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중국인 동네의 맛집으로 단순히 안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검색 끝에 나름 구글 평점도 괜찮고 에펠탑에서 멀지 않은 16구의 ‘홍강’이라는 식당을 하나 발굴해냈고 가족들의 관람을 마치길 기다린 뒤 지하철을 타고 식당에 도착했다.

가게 내부는 만다라 문양이 끝없이 이어진 목재 부조물로 장식되어 어두침침했고, 천정의 누런 세라믹 조명 갓도 시원찮아 보였다. 물이끼가 듬성듬성한 커다란 어항도 거슬리고, 한창 점심시간인데도 손님이 없는 게 맘에 걸렸지만 후끈한 실내 공기로 몸을 녹일 수 있어 처음에 그저 고마웠다. 사장으로 보이는 빼삭 마른 중년의 남성이 두툼한 메뉴판을 각자 하나씩 나누어주고 열어보는 순간 그제서야 잘못 왔다 싶었다. 포인트 10 정도의 글씨 크기로 다섯 페이지 앞뒤 장 빼곡히 기재된 엄청난 메뉴를 열어본 뒤 중국인이 하는 ‘범아시아적’ 식당임을 눈치챘다. 모든 메뉴를 가족들에게 번역해 줄 수고로움도 필요 없는, 한다 한들 고르는데 배곯을 판이다. 향채를 뺀 소고기 쌀국수 5그릇과 곁들여 먹을 월남쌈 몇 롤을 주문했다. 16구에 위치해서 그런가, 시세와도 동떨어진 16유로짜리 (13구 맛집에서 9 유로면 먹는다) 국수 그릇은 별 볼일 없는 우리 집 살림 국그릇보다도 작았다. 맛은 두말할 필요 없다. 15년 전 아빠가 간식 아니냐며 타박한 그 분당 쌀국수만큼이나 밋밋함이 밀려왔다. 추위를 녹여줄 진한 국물 맛을 기대했던 터라 육수라고도 언급할 수도 없는 맹물 때문에 화가 밀려왔다. 가족들에게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을 기가 막힌 고기 육수를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칼바람에 시린 손으로 검색한 노력이 겨우 이 정도라니! 카운터 쪽에 빈둥거리며 서있는 사장을 불러, 이거 육수 맞냐? 16유로나 받고 전식보다 못한 이 사이즈는 뭐냐? 한 페이지 빼곡한 다른 국수도 마찬가지냐? 하고 따지고 들었다. 당황한 남자가 반박도 못하고 머뭇거리자, 동생은 내 허벅지를 툭툭 치며 복화술 하듯 분위기 망치지 말고 그냥 먹자고 조용히 채근했다. 끼니 같지도 않은 쌀국수로 위장을 채우고 샹젤리제로 걸어가는 길목에 이번엔 엄마가 말씀하신다.


" 딸, 우린 잘 먹었어. 근데 우리 딸 타국 생활 오래 하더니 성격이 모나 졌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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