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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Aug 16. 2021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

여름의 라끌렛

달력은 8월을 가리키고 있지만, 여름을 의심할 정도의 기온이 연이어지고 있다. 25도를 넘긴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비가 왔다가 개고, 바람이 불었다 하루에 사계절이 다 나타나는 변덕스러운 파리지앵 성향을 그대로 닮은 날씨다. 지구 반대편 고국의 무더위 소식을 들을 때마다 미안해질 정도로 선선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특별히 약속한 건 아니지만, 마치 연례행사처럼 시댁 가족들은 매년 8월 중 주말을 잡아 시부모님 댁에서 모인다. 고향을 떠나 각자 프랑스 내륙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여행 전후 일정에 맞춰 들르는 휴게소처럼 부모님 집에 머무르고, 맞이할 기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 시부모님은 장성한 자녀들의 가족들 모두 기꺼이 대접한다.

절약이 몸에 밴 시어머니 C는 삼 형제 가족이 도착하기 몇 주 전부터 식단을 짜둔다. 그녀의 냉장고 문에는 재료 그램수부터 장 보는 날, 각자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매 끼니때마다 완성할 메뉴 등을 에이포 용지에 적어 붙여둔다. 줄콩 한올까지 어찌나 철저하게 계산하는지 갑작스레 부족한 재료를 사러 나가는 일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모두가 도착하는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가족들이 향유하는 시간은 몇 주 전부터 그녀가 연필로 꾹꾹 써 내려간 계획표로부터 시작한다.


올여름 가족모임에서 시어머니는 어떤 메뉴를 준비할지 고민한 것 같다. 보통 여름 방문에 그녀는 제철 생선에 찜 요리를 하거나 로스트비프,  차갑게 조리한 파스타. 혹은 정원에 파라솔로 그늘을 만들어 바비큐를 구워 먹는 등으로 식단을 짰는데, 바람과 비 소식도 이어지는 이상기온 탓에 사흘 동안의 열한 명의 식단을 고민해야 할 일이니 쉽지는 않았을 거다.


결국 그녀는 모두가 모인 토요일 저녁 라클렛을 준비했다. 사실 이곳에서 라클렛은 준비랄 것도 없이 이미 재단되어 나온 전용 치즈들과 곁들여먹을 육가공품만 상에 올려 내면 된다 (아, 곁들여 먹을 감자는 쪄야 하는 수고는 필요하다). 보통 손수 요리를 장만하는 시어머니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 뭔가 특식은 마련하고 싶었지만 애매한 기후에 무얼 해야 할지 모를, 그녀의 고민의 결과물 같았다. 전용 그릴의 열기와 치즈를 구워 먹는 어마어마한 칼로리로 추위를 회복하기 위해 주로 겨울에 먹는 이 음식을 식단에 올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날 최고 온도 23도를  웃돌지 못한 주말 저녁에 바지런히 차려진 모둠 치즈 한상은 어색함이 없었다. 오히려 뽀얗게 속살을 드러낸 슬라이스  치즈들은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계절을 찾지 못했더라도 그릴에서 지글거리며 구워진 치즈는 역시 맛있었다. 몸에 맞는 포근한 목화솜 이불을 덮듯 물컹해진 치즈는 포슬포슬한 감자 위에  맞게 서서히 굳어 갔다. 열기를 잃기 전에 붉은 샤퀴트리를 쫑쫑 썰어둔 앞접시에 연거푸 녹인 치즈들을 부어 신나게 먹었다.  개의 치즈를 구워냈는지 기억에 없을 정도로.. 두어 시간 꼬릿한 냄새를 풍기며 식탁에 앉아 웃고 떠들고 굽기를 반복했더니 의자에서 일어날  배가 불러 저녁 동안 먹은 것들이 식도까지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먹을 때는 입안의 즐거움으로 지나침을 모르는 것. 잠들 때까지 미처 소화하지 못한 라클렛은 결국 탈이 났다. 속이 메슥거리고 명치 아래가 쉴 새 없이 답답해 잠이 깼다. 식은땀에 등짝이 축축하고 얼굴은 허옇게 떴다. 사실 라클렛을 먹고 탈 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년 전 겨울 라클렛을 먹고 남은 치즈로 다음날 그라탱을 해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땐 밤늦게 급체 증상이 나타나 숨도 쉬기 버거울 만큼 가슴통증이 있었다. 응급 의료서비스에 전화하고 인근 응급실에 가야 할지 고민한 상황이었는데, 전화 응대 해준 담당의사의 문자 처방전으로 24시간 약국을 방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미련한 사건이다. 연달아 이틀을 단백질과 고지방 덩어리를 먹었으니 어쩌면 탈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고생을 하고는 다음 라클렛부터는 양 조절을 철저히 하겠다며 결심했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까맣게 잊었다니…


간밤에 내 입안을 행복하게 해 준 치즈 덩어리들은 위장 속에 얼마간 머물고는 다시 유턴하여 입 밖으로 쏟아졌다. 한껏 내뱉고 나니 흐르던 식은땀도 답답한 통증도 멈췄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젯밤 그릴팬에서 보글보글 끓던 치즈 가장자리 기름이 퍼뜩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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