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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Jul 14. 2021

봄날의 푸릇한 마늘향

명이나물

" 울릉도에서만 채취하는 귀한 나물로 담근 장아찌예요. 삼겹살이랑 함께 먹으면 기가 막힙니다."


막걸리 브랜드명이 시리게 박힌 빨간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는 쟁반에서 반찬들을 상위로 옮겨 내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시끌벅적한 고깃집에서 서빙 아주머니의 잔뜩 힘들어간 한마디는 유난히 귀에 박혔다. 이파리 길이에 맞춰 다른 반찬 종지와는 다르게 긴 접시에 빈약하게 담긴 장아찌에 자연스레 시선을 떨구었다. 초록의 흔적은 희미하게 남아 간장색으로 물들여진 채 뉘어 있는 몇 장의 이파리들이 얼마나 맛있길래?

‘기가 막힐’ 정도의 맛이라고 하니 잘 익힌 삼겹살 한 조각을 돌돌 말아 한입 넣었다. 그 울릉도 이파리 녀석은 씹을 때마다 예상하지 못한 마늘향을 입안에 가두고는 돼지기름의 느끼함을 중화시켜주었다. 고기쌈에 넣어 먹는 생마늘보다 훨씬 훌륭한 가니쉬였다. 애당초 열 장도 안되게 제공되었으니 장아찌는 순식간에 고깃상에서 증발해버렸다. 울릉도 장아찌 한 접시 더 달라고 외쳤지만 정말 귀한 나물이라 다른 반찬들처럼 리필이 안된다는 거절로 돌아왔다. 단호한 인색에 주눅 들어 빈 젓가락질로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기념일이라  맘먹고 예약해둔 파리 11구의 미슐랭  하나짜리 레스토랑에서 명이를 다시 만났다. 명이는 뜨거운 수증기를 맞고 숨이 죽은  돼지안심 스테이크  옹졸히 올려져 있었다. 장아찌가 아닌 모습으로 만난  처음이라 명이인 줄도 몰랐다. 훤칠한 청년은 본식 접시를 내려놓으며 노르망디 들판에서 자란 바유 종자의 돼지 안심을 숙성하여 구워낸 스테이크, 몽모렁시 숲에서 채취한 야생 곰마늘잎과 당근을 고열의 수증기에 쪄서 곁들인 요리라는 구구절절한 식사 이름을 한번 읊고난  스테이크는 야채와 함께 먹으라며 권장했다. 이름조차 희한한 곰마늘(ail des ours) 찜을 나이프로 잘라, 돼지 조각 위에 얹혀 맛보고 나서야 알았다. 우리네 삼겹살 집에서 만난  마늘향 나던 명이 라는걸. 소위 국뽕맞은 민족주의자 같은 질문일지라도 명이와 돼지의 조합을 간파한   셰프에게 묻고 싶었다. " 당신, 분명 한국에서 삼겹살 먹어   있죠? "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유럽의 숲에서 명이가 자란다는 건 나보다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던 한인 어른들에게 들었다. 독일은 지천에 널렸고, 프랑스에도 일드 프랑스 내 파리 인근 숲에만 가도 봄녘의 들판 음지에서 채취할 수 있다는 것을. 햇살이 강해지는 5월 말만되도 명이 잎은 억세서 먹을 수 없으며, 5월 초 1~2주 사이가 일 년 중 채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이라고 한다. 나름 다양한 식재료를 선보이려고 노력하는 동네 슈퍼에서 올 봄 명이나물 팩을 팔고 있었다. 누런 끼가 덜한 것으로 고르고 골라, 고작 100g씩 소분된 소담한 양이었지만, 자그마한 반찬 두통 가득 명이 장아찌를 담아 헐렁한 우리 집 밥상에 보름 동안 제 역할을 다해냈다. 나 스스로 이런 것도 해 먹는다는 대견함에 인스타그램에 자랑스럽게 사진도 올렸다.

‘ 립소야, 20분 뒤에 집 앞으로 내려와 봐’

인스타그램에 명이 장아찌 사진을 올린 사흘 뒤 어느 날, 우리 집에서 꼭 고만큼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는 이웃 마담 L의 문자를 받았다. 시간 맞춰 집 앞에 나갔더니 그녀는 주말 동안 상 클루 숲 산책길에 명이 무더기를 발견했고, 딸과 함께 열심히 뜯어왔다며 한 봉지 가득 명이나물을 쥐어주었다. 니가 해먹은 장아찌뿐만 아니라 호박 채 썰어 같이 부침개 해도 맛있고 겉절이 담아먹어도 맛있으니 시들기 전에 먹으라며 당부하고는 유유히 떠났다. 한참 밀려오는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었지만 명이 잎사귀 높이에 맞춰 몸 굽혀 채취했을 그녀들의 노고와 그 고생의 결과를 나까지 나누어줌에 감사하며, 들고 오자마자 주방으로 향했다. 명이 이파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갖고 있는 살림 중 가장 큰 플라스틱 다라이(사실 샐러드 그릇이지만 다라이가 더 어울리는 형태다)에 담아놓고 찬물에 식초를 풀어 몇 분 담가 두었다. 정성껏 여러 번 씻어내는 작업이 이어지자 집안에 은근한 마늘향이 퍼졌다. 마담 L의 조언대로 한 줌은 저녁에 먹을 부침개용으로, 두 줌은 데쳐서 무쳐먹을 나물로, 그래도 남은 건 장아찌용으로 나눴다. 초여름 밥상에 입맛을 돋워 준 명이는 이제 조금의 장아찌로만 남아있다. 끝물의 녀석은 오늘 저녁 수육과 함께 마무리 짓는 것으로 작별 인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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