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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억 속에서 다시 만난다

이토록 선명한 너를 기억하는 일

by 김이은

너의 이름이 떠오른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너는 나를 찾아온다. 서랍 속 오랜 편지를 다시 꺼내보는 것처럼. 오늘은 너의 얼굴을 천천히 그려본다. 동그라미. 동그랗고 하얀 얼굴. 진한 쌍꺼풀, 댕글댕글 검은 눈동자. 양갈래로 땋은 머리. 씩 웃으면 토끼 앞니. 끔뻑끔뻑 공작새 깃털 같은 속눈썹. 이토록 선명한 너라면, 어디선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 이곳저곳에 이름을 검색했다.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세상에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하나하나 눌러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너의 얼굴은 오직 하나뿐인데.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걸까. 너를 찾으며 기쁘고도 슬펐다. 우리가 주고받았던 작은 쪽지들을 기억한다. 오늘은 연필을 들고 종이에 이렇게 썼다.

[있잖아, 엄마도 아빠도 늦는 날에는 아파트 주변을 혼자 걸었어. 기억나? 나는 2층, 너는 8층에 살았잖아. 궁금했어. 너는 자고 있을까? 높은 층이라 손으로 짚어보지 않으면 헷갈려. 꼭대기 층에서부터 아래로. 하나, 둘, 셋, 넷. 너의 방 창가를 손으로 콕, 세어봤어. 불이 꺼져있는 날에는 네가 잘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켜져 있는 날에는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쪽지를 쓰고 접었다. 눈을 감으니 또 다른 장면이 떠오른다. "나를 때렸어, 만져 봐." 너는 비밀을 주었다. 그것은 우리의 비밀이 되었다. 비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 네 뒷머리에 내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이 나고, 머리가 심장처럼 뛰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연필을 들고 종이 위에 다시 썼다.


[기억해. 너를 때리는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던 날. 나는 그 어른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어. 슬프다. 무섭다. 비참하다. 화난다. 갈기갈기 찢고 싶다. 애통하다. 가슴이 아파. 그런데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너와 헤어진 장면은 이토록 선명하다. 이사 가던 날, 네가 준 쪽지에 그려진 그림은 어른이 된 너의 모습이었다. 여자는 키가 크고, 머리가 길고, 눈이 반짝거리고, 안녕을 말하고 있었지. "엄마 아빠랑은 헤어진대. 나는 그 사람과 시골에서 살게 될 거야."나는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주친 척 없고, 너와 비슷한 사람을 찾은 적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억 속에서 너를 만나는 일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네가 나를 찾아올 때면 반갑고 슬프다. 나는 마음껏 반가워하고 슬퍼할 것이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만난다. 잊히지 않도록 너를 쓴다. 언젠가 너를 단번에 알아채고 안아줄 수 있도록. 기쁜 마음과 슬픈 마음은 언제나 함께다. 나는 이제 두 마음을 꽉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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