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특집 닫는 글

[특집 '장애' 닫는 글] 편집장 상민

항상 인권 관련 추천 도서 목록 상단에 위치하는 책 중 하나인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결정장애.’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우물쭈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너무 많이 고민하는 나의 부족함을 꼬집는 간명한 말 같았다.


이후 이 표현을 즐겨 쓰던 저자는 혐오 표현에 관한 토론회에서도 이 말을 사용해 다른 참석자 중 한 명에게 지적을 받았다. 이후 그는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에게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맞다. 일반적으로 ‘장애’는 누군가를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 변주 또한 참으로 다양해서 ‘병신’, ‘애자’, ‘머저리’, ‘또라이’ 등과 같은 욕설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비장애인을 힐난하고 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장애를 욕설로 쓰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명확해지는 사실은 '결정장애'가 혐오 표현이라고 할 때, ‘장애’는 오직 ‘부족함’, ‘열등함’ 내지는 ‘비하’의 의미로만 환원됨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 역시 이 말이 혐오 표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쓰기를 멈췄었지만, 좀처럼 찜찜했던 것은 블랙보드가 ‘서버 장애’로 먹통이 되었을 때나 ‘선로 장애’로 인해 내가 탄 열차가 지연되었을 때 같은 순간이었다. 왜 ‘결정장애’는 안되고 ‘서버 장애’, ‘선로 장애’는 괜찮지?


물론 그 장애가 나타나는 대상이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지점에서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국어사전 역시 ‘장애’의 뜻을 ‘어떤 사물의 진행을 가로막아 거치적거리게 하거나 충분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함 (또는 그런 일)’과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로, 즉 대상이 사물이냐 사람이냐에 따라 나누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뜻이 같은 한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가 전자의 뜻으로부터 이어져 나왔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사물에게 있으면 혐오 표현이 아니지만, 사람에 해당하게 되면 그것은 혐오 표현이 된다(로봇이나 인공지능에 대한 혐오가 가능한지는 논쟁의 대상이라도 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선로나 서버에 대한 혐오가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자명해지는 점은 ‘장애’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낙인으로 작용하는 사회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에서 시작된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서는 고유한 속성으로서의 장애는 없고 손상(impairment)만이 있으며, 장애(disability)는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물론 이 말에 온전히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 손상은 분명 일정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고 그로 인한 적절한 치료와 돌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치료와 돌봄의 인프라가 없는 곳에서 장애는 단순한 특질이 되지 못하고 ‘부족함’, ‘열등함’이 된다. 그리고 무엇이 ‘특질’이고 무엇이 ‘장애’가 되는지는 (특집 3에서 보았듯) 기존 사회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정한다. 빠르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심각한 결함으로 인지되는 사회가 된다면 정말 DSM의 한 페이지에는 ‘결정장애’ 항목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은 그 정도까지는 이르지는 않았으나 현대사회가 결정을 빠르고 자신 있게 내릴 수 있는, 주체적인 개인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결정장애’라는 표현은 그런 사회를 비판하고, 그런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일종의 ‘위트 있는’ 보호막의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정장애’라는 말에는 잘못이 없다. 그 말에 입마개를 씌울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장애‘들’이 말해져야 한다. ‘정상성’을 가로막아 거치적거리게 하거나 충분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함 (또는 그런 일)을 모두 ‘장애’로 호명하자. ‘장애’란 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발끈하지도 말고, ‘장애’라는 말을 그렇게 쓰는 것은 장애인의 고통을 너무 가벼운 것으로 만든다고 하지도 말고, ‘장애’를 마음껏 오남용하자. 누군가가 당신에게 ‘너 장애냐?’고 힐난했을 때 ‘그게 뭐가 문제인데?’라고 답하자. 그리고 (특집 2에서 만났던) 사회에 의해 규정‘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규정‘할’ 것을 결정한 이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연대하자. 그때 ‘장애’는 더이상 징벌도, 낙인도 아니다. ‘정상’에 부합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게 되고, 저마다 일정 정도 ‘충분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이보그들만이 남는다. 그리고 아픈 몸의 사이보그들은 서로를 돌보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특집 1에서 본 것처럼) 장애인들의 기초적인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장애인들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지금처럼 불평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장애’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보호하는 것은 운동을 위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장애문제는 장애인만의 문제로 남고, 낙인은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든 다시 찾아온다.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장애억압이 남아있는 세상보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더라도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가 허물어진 세상을 원한다. 모든 불온한 존재들의 연대를 소망하며.



참고문헌

단행본

김지혜 (2019).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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