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편집위원 열음
2021년 2월 3일
점차 계절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매년, 절기는 꿋꿋하게도 새로운 시절의 도래를 알린다. 맥락도 없이 절기를 글의 초입에 끌어들인 까닭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오늘이 바로 그 ‘입춘’이기 때문이다. 입춘{立春}. 이날이 지나면 때는 곧 봄에 들어선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이 간지러운 절기는 한 해의 초입에서 곧 돋아날 초록들을 반긴다.
그리고, 입춘보다도 더 먼저 봄의 이름을 달고서는 또 다른 푸르름, 문청{文靑}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매해 연말, 28개의 주요 신문사에서 미등단 작가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신인 발굴 공모전인 신춘문예{新春文藝}가 바로 그것이다. 등단의 단꿈을 꾸는 이들에게 신춘문예는 그 음절만으로도 이미 아찔할테지만, 단어의 황홀함에 취해 이를 문청들의 꾸준한 등용문으로만 여기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2021년 9월 2일
…를 쓰고 이후로도 몇 문단을 더 끄적이다가 결국에는 ‘21 봄’ 폴더에 영원히 묻어버린 글이 있다. 무언가를 더 써볼 수가 없겠다고 느낀 까닭은 아무래도 신춘문예의 석연치 않은 구석을 늘여놓기에 그는 여전히 내게 아찔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살다가 한 번쯤은 나도 응모작을 넣은 빳빳한 황색 봉투 위에 주소를 맞게 기입했나 몇 번을 확인한 후 몇 주간 새해 첫 날만을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나에게 신춘문예란 도무지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까다로운 글감임이 틀림없었다. 애꿎은 노트북과 씨름을 해가며 꾸역꾸역 두 페이지를 채웠을 무렵, 《고대문화》 2021 봄호의 막바지 회의에서 도저히 더는 못 쓰겠고 이 글감은 나의 숙원 사업으로서 고대문화를 졸업하기 전에는 꼭 어떤 방식으로든 건드리겠노라 성원들 앞에서, 무엇보다 스스로와 약속한 후에야 ‘21 봄_칼럼’ 파일의 명복을 빌어줄 수 있었다. 비록 지난 반 년간은 《고대문화》에 실을 글을 써내는 데에 바빠 실제 신춘문예에 투고할 무언가를 써낼 여력은 없었지만, 글감으로서의 신춘문예는 늘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자주 들여다보던 참이었는데….
일 년만에 돌아온 캠퍼스, 호기롭게 신청한 창작 강의의 첫 수업이 있었던 오늘 교수님께서 마음을 잔뜩 심란하게 만드는 말씀을 던지신 거다. 우리 강의의 목표는 신춘문예 투고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출해 어디 가서 신춘문예에 투고해봤다는 말이라도 하고 다녀보자는 말씀에, 일찍이 명복을 빌어주긴 했다만 필자의 구질한 미련 탓에 아직도 구천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21 봄_칼럼’이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다 이내 결심했다. 객관적으로 써 볼 자신이 없어 포기했으니 아예 몹시도 주관적이고 사사로우며 치우친 글을 써보자고. 그리하여 ‘21 겨울_칼럼’ 파일은 새로이 생성되었다.
2021년 9월 16일
마땅한 개요도 형식도 없이 냅다 만들어놓은 파일을 그냥 묵히고만 있었으나 오늘 있었던 겨울호 2차 회의를 통해 이 글은 ‘난중일기’라는 기발한 형식을 얻게 되었다. 전시 한복판에서 그날그날의 소회를 소상히 써내려갔을 충무공의 심정으로 써보는 나의 신춘문예 투고기… 좋은데? 형식까지 갖추고 나니 당장 뭐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읾과 동시에 정말로 내가 신춘문예에 투고하는 날이 오게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괜히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사실 신춘문예는 그 이름에서부터 짙게 묻어나는 봄 그리고 청춘의 내음새가 무색하게도 공모에 글을 투고하는 연령층과 응모자들의 직업이 천차만별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일찍이 신춘문예의 단꿈을 꿀 수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고. 2019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당선자들의 연령대를 조사해본 결과 전체 평균 연령은 41.4세로, 문청이 뿜어내는 푸르름은 젊음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춘문예를 개최하는 각 신문사들 역시 애초에 참가자들의 연령 제한을 두지 않고 있을뿐더러, 심사 과정에서도 성별과 연령대를 비공개로 진행하고 있다는 점은[1] 신춘문예가 지향하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에 더해 최근 들어 증가한 ‘실버 문청’들을 일컫는 ‘후문학파{後文學派}’[2]라는 용어는 창작을 향한 열망에는 이르고 늦음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미 글 쓰는 일이 보편적이며 접근이 용이한 ‘취미’[3]가 된 것에 반해 그럼에도 신춘문예는 무언가 전문성을 갖춘, 글에 진지하게 임하는 이들만의 전유물일 것이라 속단하는 통념은 여전하지만… 실제 응모자 그리고 당선자들의 전공 및 생업을 조사해보면 ‘글’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이들 역시 허다하다. 등단한 이들의 전공을 조사해보았을 때 문예창작과 혹은 국어국문학과의 재학생 및 졸업생의 비율은 17년에 39%, 18년에 45.7%, 19년에 38.9%로 전체의 퍼센테이지에서 그리 적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나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높은 비율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문창과나 국문과에 글 잘 쓰는 사람이 많을 수야 있겠다만 다 그런 것도 아니고, 사실 글쟁이들은 어디든 널려있으니 말이다.
신춘문예의 이러한 개방성 덕에 흔히 ‘허수’라고 불리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는 듯한 응모작도 매년 심심치 않게 접수되지만, 이는 자격미달의 작품이라도 흔쾌히 접수해볼만큼 그 문턱이 낮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흔히들 신춘문예를 과거시험과 비교하곤 하는데, 과거를 응시하기 위해서는 성별과 신분에서 일차적으로 선택되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마저도 신춘문예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미발표 원고여야 한다는 요건 외엔 어떠한 부가 조건도 없이 오직 ‘글’ 하나로만 당락이 결정되는 신춘문예야말로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이라는 현대의 니즈{needs}에 부합하는 완벽한 등용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원고와 인적 사항을 분리하여 응모자들을 철저한 익명으로 둔갑시킨다는 점 외에 신춘문예를 ‘누구에게나 열린 문’이라고 칭할 만한 요소가 충분한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신춘문예가 정말로 ‘열린 문’이 맞는지에 대한 불평불만은… 일단 투고작을 웬만큼 쓰고 나서 마저 생각을 해보는 걸로. 이대로 가다가는 설령 그가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문이라고 할지라도 바로 입구컷 당하게 생겼으니까요, 하하.
2021년 9월 23일
신춘문예고 뭐고 추석 연휴 마지막 새벽인데도 아직 가을호 마감 중이다. 살려주세요….
2021년 11월 4일
중간고사와 과제들에 치이느라 신춘문예 투고작을 써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있던 어느 날, 교수님께서 신문사들의 신춘문예 응모 마감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집필은 잘 되어들 가고 있는 거냐며 넌지시 부지런히 글을 쓰라는 압박을 가하셨다. 그럼요 교수님… 글… 쓰긴 써야죠.
본격적으로 뭘 써보기에 앞서 최근의 당선작들을 훑고 텍스트로 삼을 시집을 선정하다 보니 요즘 문학은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친구의 투정이 절로 떠올랐다. 나 역시도 최근 출간된 시집이나 소설을 읽다 보면 그래서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실패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했다는 의의를 찾는 것에서 독서를 완결짓기도 하니, 그 말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문학, 특히나 시{詩}의 경우 일상에서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쓰여야 마땅한 것이기에 쉽게 읽히지 않음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 군데도 걸리는 부분 없이 물 흐르듯 읽을 수 있는 작품은 그것대로의 문제작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포장도로마냥 내내 덜커덩거리며 독해해야 하는 글 역시도 문학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는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쓰는 일은 별개이고, 특히나 ‘뽑히기 위해’ 쓰는 일에서는 아는 대로만 행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김소월처럼 쓰고픈 마음을 억누르고 이상처럼 혼란해야 하는 것이 최근의 시라면,[4] 나룰 둘러싼 세계를 나의 자아로 환원시키는 과정이 소설이라면,[5]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을 자의적으로 읽어내 쓰는 것이 평론이라면 신춘문예의 당선작들은 문단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흔히들 신춘문예의 당선작들을 통해 시대가 지향하는 바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하던데, 당선작이 경향성을 만들어 가는 것인지 혹은 어떠한 경향성을 가지고 당선작을 뽑은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딜레마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신춘문예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예술 공모전들이 안고 있는 난점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술에는 객관적 지표가 없으며, 감상한다는 것은 다분히 취향을 타는 일일 건데 무슨 기준으로 뭘 어떻게 심사한다는 거지? 독자로서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책만을 골라 읽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심사위원―공모전마다 심사위원이 겹치는 경우 역시 허다하며 이 역시 문제 상황 중 하나이다― 개인의 선호가 공모의 당락에 영향을 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선호에 더해 심사위원이 작품을 읽는 순서나 그 작품 앞뒤로 읽은 작품이 무엇인지 등 당선을 위해서는 응모작 각각의 작품성을 떠나서도 너무나 많은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고도 보이는 현실은 현행하는 모든 예술 공모전과 그 시상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당장 나만 하더라도 올해 A 문학상… 대상작보다는 다른 작품을 더 좋게 읽었단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당선작들을 뽑은 심사위원만을 탓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일개 독자인 내가 하는 고민을 그들이라고 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학을 평가한다는 일이 얼마나 오만하며 부질없는 일인지에 대한 고민은 했어도 나보다 그들이 골백번을 더 했을 거고 내가 지금 제기하고 있는 불평불만이나 혹자들의 비판 등을 피하기 위해 심사 과정에서만[6] 몇 번의 회의를 거치며 의견을 조율했을 텐데…. 그럼에도 그 ‘조율’을 통하여 문인들의 기량을 평가하는 것이 실효성이 있는 일인지를 묻는다면 이는 쉬이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에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등단에 대한 열망으로 매해 연말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장수생들은 낙선 이유도 모른 채 등단작들을 부러워하는 실정이니 심사위원을 위해서도 문청들을 위해서도 심사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겠지만, 예술에 있어 객관을 논함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 위에서 실컷 떠든 만큼 그 실현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줄도 알기에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작 공표와 함께 해당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까닭을 발표한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등단했기에 신춘문예의 명{明}과 암{暗}을 절실히 알고 있을 기성 작가들, 그리고 작품이 가진 이모저모를 종합해 작품성을 평할 줄 아는 문학평론가들이 머리를 맞대어 내놓은 결과이니 그 심사평은 대개 합당하며 논리적이다. 그러나 심사평을 받게 되는 것은 분야별 딱 한 작품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테면 내가 써낸 작품이 평생 한 번 쓸까 말까 한, 내 기준에서의 걸작일지라도 하필이면 그해 나와 맞붙은 작품이 세계 문학 전집에 실릴 만한 불후의 명작이라면 나는 꼼짝없이 한 해를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말이다. 공모전이 다 그런 거라지만 그래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매년 실낱 같은 희망으로 투고작을 내야하는 심정의 인지부조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2021년 11월 18일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드는 근본적인 의문 하나. 등단… 그거 꼭 해야 할까? 절대 글쓰기 싫어서 말도 안 되는 생떼나 부리며 농땡이 피우려는 건 아니고, 이번에는 과제 때문에라도 신춘문예에 반드시 투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사실 요즘엔 글쓰기를 업으로 삼기 위해 등단이 꼭 선행되어야 할 필요는 없음을 알기에 드는 의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춘문예, 혹은 문예지나 문학 공모전을 통한 등단만이 작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확실한 방도였다면 요즘에는 ‘작가’가 될 수 있는 방법 자체는 차고도 넘친다. 신춘문예는 여전히 신인 데뷔의 바이블이며 거기에 더해 새해 벽두부터 신문지면을 빌려 화려하게 이름을 날릴 수 있다는 짜릿함까지 갖춘 제도이지만, 최근의 경향을 보자면 다소 구시대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신춘문예를 거치지 않고 문학상 수상 이후 바로 책을 내는 작가들의 수는 이전에도 꽤 되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아예 모든 단계를 건너 뛰고 저마다의 방법을 통해 작가로 데뷔해 독자들을 만나는 이들 역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베스트셀러 칸을 꽉 쥐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는 특히 이례적인 이력의 소유자들을 확인해볼 수 있는데, 일례로 2020년 연말부터 최근까지도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는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저자 이미예를 들 수 있다. 그는 작문과 관련된 과를 나오지도,[7] 소설을 쓰는 법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았지만 퇴사 후 텀블벅 펀딩을 통해 출간한 소설로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요새 같은 종이책 불황 속에서도 1·2부를 도합해 100만 부 이상이 팔리며 2020년대 들어 최초의 밀리언셀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사실 저자는 텀블벅 펀딩을 받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전례 없는 ‘돌풍’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림 1] ©동아일보
대체텍스트: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각 플랫폼 반응을 나타낸 표이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펀딩 과정은 이러하다. 클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스스로 펀딩을 시작, 목표액 100만 원의 18배 이상인 1,812만 원을 모으며 지난해 9월 펀딩을 종료했다. 이후 후원자 987명에게 직접 책을 배송했다. 전자책의 경우 올 4월 쌤앤파커스에서 출간된 이후 전자책 플랫폼 리디북스 4주 연속 종합 베스트 1위를 차지했다. 블로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서평과 종이책 출간 요청이 잇달았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종이책은 올 7월 출간되어, 주요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베스트 셀러 1,2위에 오르며 11만 부가 판매되었다. 이는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주최한 ‘서점인이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으며, 일본, 태국, 베트남 등과 판권을 계약하였다. 그림 설명 끝.
그도 그럴 것이, 웹소설 연재 플랫폼 ‘문피아’를 통한 첫 연재 당시의 조회수는 겨우 두 자릿수를 웃돌 뿐이었으며, 저자는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은커녕 문학 공모전에서 상을 받아본 적도 없는 ‘아마추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우연한 결심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출간한 소설이 독자들에게 호평을 얻긴 했지만 이후 정식 출간된 책의 형태는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 역시 여기에 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전자책 출간을 담당한 편집자는 “소설은 문단에 데뷔하지 않으면 판매가 쉽지 않다. 종이책으로 출간하기는 조심스러워서 전자책을 낸 다음 독자 반응을 보고자 했다”고 말하며,[8] 아무리 입소문을 탄 작품이더라도 작가의 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출판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현실을 짚었다.
그렇기에 웹소설 연재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출간, 펀딩의 대성공 후 전자책에 이어 종이책까지 출간하여 밀리언셀러에 등극한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가히 출판업계의 ‘역주행 신화’라고 불릴만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예 작가의 경우를 아주 특수한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 판매 부수와 단계적 성장세는 확실히 이례적이며 놀라우나, 등단하지 않고서도 플랫폼 연재를 통해 독자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획득한 후 출판사에 직접 투고하는 방식으로 책을 출간하는 작가들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웹소설 플랫폼 이용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미 2018년부터 웹소설 시장 규모는 약 4천억 원에 도달했다. 이는 2013년 약 200억 원 규모에서 5년 만에 40배 이상 급성장한 수치인데, 이렇듯 웹소설 시장의 빠른 확장이 눈에 띄는 요즘 굳이 고리타분하게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에만 목맬 필요는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마구 드는 것이다. 신춘문예가 갖는 권위는 여전하고도 달콤하지만… 정말로 글이 쓰고 싶은 거면 이외의 방법은 이미 많이 마련되어 있다는 거지, 라는 문장을 쓰고는 있지만 당장 나부터도 매년 꿋꿋하게 투고하는 신춘문예 장수생들의 심정을 통감하고 있으니 그 권위는 여전하고도 달콤하긴 하네. 쓰면 뱉기라도 할 텐데. 달다 달아.
2021년 12월 1일
기어코 신춘문예 마감이 일주일도 안 남은 이 시점까지 원고를 붙들고 있구나. 누가 나 대신 글 좀 써준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어… 따위의 생각을 한 번 시작하니 범람하는 ‘#빙의물’에서와 같이 대문호의 영혼이 내게 빙의되어 심사위원들의 기를 다 못 펴게 만들어줄 작품 하나만 점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마저 드는 거다. 얘는 글이나 쓰지 쓸데없이 뭐 이런 생각을 하냐며 비웃을 만한 일이긴 해도, ‘#’ 하나만 달면 빙의니 회귀니 부활이니 하는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에서 펼쳐지는 게 요즘의 웹소설에서 통용되는 문법이니, 나름 대세에 편승한 잡생각이다.
며칠 전의 일기에서도 넋두리를 늘어놓았지만, 요즘엔 웹소설 시장이 워낙에 활성화돼 있을뿐더러 플랫폼에 정기 결제를 하는 고정 독자층도 탄탄하니 굳이 신춘문예나 공모전을 통해 문단에 진입하지 않더라도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이야 널려 있다. 그러나 웹소설의 등장은 글쓰기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순문학과 장르문학에 대한 확고한 위계질서를 세운 듯 보인다는 데에서부터 여러 문제들이 파생된다.
순문학의 사전적 정의는 ‘순수성을 추구하는 문학’인데, ‘순수성’이라 일컫는 것은 시대에 따라 상이하겠으나 2020년대의 순수문학은 웹이 아닌 종이를 매개로 독자들과 만나는 문단문학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볼 수 있다. 이때 순문학과 대척점에 놓이는 것이 바로 웹소설, 더 나아가서는 장르문학이다. 장르문학에서의 ‘장르’란 시나 소설, 희곡 등 글의 갈래로서의 장르가 아닌 SF나 호러, 로맨스, 탐정 등 소재 혹은 문법으로서의 장르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르문학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 장르가 가진 문법을 얼마나 잘 구현해냈는지에 놓인다. 다시 말해, 어떠한 SF 작품이 아무리 수려한 문체로 쓰였다고 할지라도 SF의 문법—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스페이스 오페라, 사이버펑크 등—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장르문학으로서 완전히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장르문학이 가진 ‘장르’로서의 특징에만 초점 맞추게 될 때 장르문학은 너무도 쉽게 ‘문학’으로부터 배제되며, 장르문학이 가진 문학성은 논의될 기회조차 잃는다. 더 큰 문제는, 장르문학을 장르로만 치부하면서 생기고야 만 순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의 위계이다. 애초에 ‘문학성’이라는 함은 굉장히 모호하고도 피상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순문학은 문단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쉬우며, 따라서 독자들은 순문학이 장르문학보다 ‘우월하다’고 믿어버리고 만다.
순문학, 그리고 장르문학과 관련한 문학성 담론 속에서 문단은 다시금 신격화되고 장르문학의 창작자들은 평가절하되기 십상이다. 플랫폼을 통해 연재되는 웹소설은 거의 대부분이 장르문학이기에, 그들이 문단의 작가들과 같은 시간을 들여 같은 강도로 창작 노동에 임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 두 필드의 작가—문단 작가와 웹소설 작가—를 취급하는 방식은 아주 다른 것이 현실이다. 예컨대 원고 청탁을 할 때에도 웹소설 작가들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기에 책이나 영화의 추천사를 쓴다든지 평론을 쓰는 일은 전부 문단 작가들의 전유물이 된다. 그리고 이는 장르 문학을 쓰는 작가들의 필력이 부진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관례’에 의거한 관성적인 청탁인 듯 보인다. 예전부터 문단 작가들에게 맡겨오던 일이고, 문단 작가들은 ‘검증된’ 작가들이니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여러모로 속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고 청탁과 같은 소일거리는 작가의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기에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웹 시장은 점차 그 몸집을 불리며 수많은 ‘덕후’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일례로 지하철 광고는 이제 인기 연예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기 소설 주인공의 생일이라든지 연재 기념일이 되면 소설의 팬덤은 모금을 진행하여 광고를 걸고 작품을 홍보한다. 아이돌 팬덤 판의 놀이 문화였던 ‘생일 카페’라든지 ‘온리전’ 역시도 마찬가지로 웹소설 팬덤으로까지 전이되어 소설을 즐기는 또 하나의 재미 요소가 된다.
[그림 2] ©뉴스1
대체텍스트: 카카오페이지 연재 소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의 주인공 박문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건대입구역 내에 걸린 광고이다. 그림 설명 끝.
또한, 문단 안에서도 ‘순수’와 ‘장르’의 구분이 점차 어려워지는 실정 역시 충분히 고려해보아야 한다. 예컨대 장편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되며 일반 대중에게까지 익숙한 이름이 된 정세랑 작가의 경우도 웹진을 통해 연재를 시작했지만, 꾸준한 작품 활동 끝에 결국 2014년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문단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오가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하고 있을뿐더러, 스스로 “오타쿠들의 여왕이 되고 싶다”고[9] 인터뷰 한 사실이 있을 만큼 여전히 장르를 사랑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지구 끝의 온실』[10] 등의 베스트 셀러를 써낸 김초엽 작가나 『옆집의 영희 씨』를 쓴 정소연 작가 역시 SF 장르를 바탕으로 타자성의 문제를 다루며 문단 내 장르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이렇듯 '한국 소설'로 분류된 종이책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지만 장르와는 떼놓을 수 없는 작가들은 넘쳐나며, 이때 장르는 단순 재미만을 추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순수문학으로만 다룰 수 있다고 여겨지는 담론으로까지 확대된다. ‘순수’니 ‘장르’, ‘문단’이니 ‘웹’과 같은 단어들을 기준으로 작가들을 무 자르듯 나누기에는 여러 영역에 걸쳐 있는 작가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소리이다.[11]
웹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과 애정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장르는 이미 웹을 넘어 문단으로까지침투하였다. 따라서 요지는 문단 작가들의 일거리를 뺏어서 웹 소설 작가들에게 가져다 주자는 것이 아닌, 그들의 활동 범위를 ‘문단’이나 ‘웹’으로 나누지 말고 그저 동등한 작가로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냐는 것이 된다. 문단은 작가의 권익을 보장하며 더 나은 글쓰기를 고민하기 위한 공동체여야 하기에 이들이 기득권으로 위치하는 최근의 현상은 단단히 잘못되었다. 진정한 문단이라면 필드를 가리지 않고 글에 대한 열의를 가진 작가들이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작가가 되기 위한 창구가 앞으로 얼마나 더 확장할는지는 모르겠다만, ‘순수’와 ‘장르’, ‘문단’과 ‘웹’이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다는 일부 꼰대들의 발언이 공고히 작용하는 이상 신춘문예에 목매는 작가 지망생들은 더욱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하루에 2리터씩 아메리카노로 HP를 채워가며 밤새 창작의 고통의 몸부림치는 그들의, 그리고 나의 현실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며, ‘#피폐’라든지 ‘#굴림’으로 퉁치기에는 주인공 버프를 기대하기 전에 모두가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일단 나부터가 조만간 나가떨어지게 생김.
2021년 12월 9일
‘내 글 구려’ 상태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 채 글을 투고하지도, 그렇다고 과감히 뜯어고치지도 못한 채 품고 있다 보니 어느덧 접수 마감일의 아침이 당도하였다. 아무리 빠른 등기로 보낸다고 할지라도 마감 시간까지 언론사 건물에 도착하리라는 보장이 없어 결국 황색 봉투를 품에 안고 직접 ○○일보 문화체육부까지 찾아가게 된 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살다 살다 언론사 본사를 다 와 보네 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건물에 들어섰는데, 도대체 무슨 건물이 그렇게 높아서 층마다 회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건지 이중 ○○일보가 위치한 층은 어딜까 싶어 한참 안내판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저 멀리서 누가 봐도 나와 같은 처지인, 황색 봉투를 품은 이가 걸어와 엘리베이터 줄을 서길래 눈치껏 저 사람을 따라가면 되겠다 싶어 슬쩍 동행했다. 통성명은커녕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이미 내적 친밀감은 가득인 그는 ‘33’이라고 써진 버튼을 눌렀고, 그렇게 엘리베이터는 단숨에 수십 미터를 올라갔다. 접수처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발을 내디딘 33층은 적막하고도 황량했다. 호기롭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던 나의 동지도 당황한 모습으로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출입문 옆에 마련된 인터폰으로 통화를 하더니 내게 말을 붙였다. 33층이 아니라 32층이래요. 내려오라네요. 아, 감사합니다…. 내가 한눈에 그를 동지라고 알아본 것처럼 그도 내게 동지애를 느꼈던 걸까? 애{愛}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나 다만 누군가의 눈에 나 역시도 등단의 꿈을 꾸며 이곳을 찾은 파릇한 문청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을 하자 그제서야 심장이 뛰며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품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가 실감이 되는 것이었다.
겨우 한 층을 내려가는 데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전력 낭비가 아닐까… 하는 또 하나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도착한 32층에도 접수처는 없었다. 단지 언론인들이 칼퇴를 바라며 수없이 드나들었을 유리문 옆에 ‘신춘문예 방문접수’라는 문구가 인쇄된 백색 종이가 한 장, 그 밑에 이미 몇 십장의 황색 봉투가 쌓인 듯 보이는 의자가 하나 마련되어 있을 뿐이었다. 과제를 위해서는 투고했다는 인증샷이 필요하니까 찍는 거야. 과제를 핑계 삼아 제출 전의 설렘을 사진으로 몇 장 남긴 후 소중히 품고 있던 봉투를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나의 인생 첫 신춘문예 투고는 조촐하게 끝이 났다.
[그림 3]
대체 텍스트: 신춘문예 제출용 원고가 든 황색 봉투를 들고 찍은 사진이다. 그림 설명 끝.
202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오늘, 세상 신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리에서 들려오는 캐롤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두 손에 휴대폰을 꼭 쥐고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으니, 혹여나 신춘문예 당선 전화가 올까 싶어 괜히 긴장 중인 문청들이다. 대외적으로는 새해 벽두 신문을 통해 등단자들을 발표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일주일 정도 먼저 연락을 해 당선 사실을 알리기 때문이다. 등단을 꿈꾸기에는 양심에 찔릴 정도로 급박하게 써낸 작품인데다가, 올해는 투고에 의의를 두기로 했으니 정말 아무런 기대도 없지만서도… 일단 당분간은 혹시 모를 산타를 기다리며 무음모드 해제.
2021년 12월 26일
산타는 없었다. 역시나는 역시나였던 것이다. 반면 주위에서는 하나둘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등단에 성공한 이들의 원고를 읽어보니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느끼면서도, 그 ‘다름’의 근거로 스스로가 꼽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함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스스로가 몹시도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근거는 몇 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되었다는 후광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신춘문예 투고 시즌만 되면 ‘등단용 원고’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신춘문예나 기타 공모전을 통해 등단한 신예 작가들이 ‘등단 과외’의 수강생을 구하는 경우 역시 비일비재한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후광 이외의 무언가는 정녕 실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신춘문예를 비롯한 각종 문학 공모전의 실상을 취재한 장강명[12] 작가의 르포 『당선, 합격, 계급』에서는 ‘등단용 원고’에 대해 언급하며, 작가 지망생들이 애용하는 커뮤니티에서는 원고를 작성하기에 알맞은 폰트 등을 논의하기도 한다며 안타까워한다. 바탕체가 아닌 궁서체를 썼다고 내 원고가 단박에 폐휴지함으로 처박힐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시류에서 완전히 벗어난 주제를 고집한 채 필력을 펼친다면? 예컨대 요즘 문단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깔고 가는 의제는 철저히 개무시한 채 불순한 사상을 곳곳에 드러내는, 그러나 글빨 하나는 끝내주는 작품을 투고한다면 나는 등단의 영예를 누릴 수 있을까? 공통 윤리에서 어긋나는 담론에 기대어 쓴 문학은 세간의 뭇매를 맞아야 함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신춘문예는 그러한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읽힐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폐쇄적이다. 아주 낯설거나 전복적인 시도는 신춘문예를 투과하며 완전히 배제되고, 그 결과 신춘문예 당선집을 읽은 혹자는 “한국문학은 거기서 거기”라고 혀를 차며 도중에 책장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한 권의 책을 집어 들기 위해서는 적잖은 각오가 필요하며, 가뜩이나 없는 시간을 쪼개 독서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은 되도록이면 ‘실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독자들의 속사정을 고려한다면 신춘문예를 비롯한 각종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경력은 일종의 ‘믿고 볼’ 수 있다는 인증 마크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인증 마크는 독자들이 아닌 문단 권력이 부여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춘문예는 재야의 신예를 발굴해내기에 적합한 제도지만, 당선작들이 인쇄되기까지 권위있는 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의 검열과 평가가 치러짐을 꼭 기억해야 한다.
더 이상의 ‘등단용 원고’를 막기 위해서는 작품에 쾅쾅 인증 마크를 찍을 수 있는 주체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 심사위원의 손에 들린 ‘참 잘했어요’ 도장을 한가득 복사해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손에 하나씩 쥐어 주고는 각자의 눈높이에서 작품의 당락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마땅하다. 읽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며 심지어는 읽지도 않고 쓰려고만 드는 이들 탓에 ‘쓰는 빌런’이라는 신조어가 출판계를 강타 중인 요즘, 독자들로부터 상황을 타개할 열쇠를 찾아보자는 말은 공허하다 못해 허무맹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에 의해 새로운 기준이 마련될 때 보다 많은 원고가 읽힐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혹자들의 ‘뻔함’을 넘어선 전위적이며 파격적인 작품의 등장은 더 활발한 담론을 이끌어낼 것이고, 이는 곧 독자들이 폭넓은 선택지가 존재하는 문학장으로 도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평생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 권씩을 읽어도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몇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한없이 억울해진다. 내가 모르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모를 재밌는 이야기는 도대체 몇 개가 될까. 그리고 신춘문예가 지금과 같은 권위를 유지하는 한, 누구에게도 읽히지 못한 채 작가의 노트북 속에서 영면할 글들은 매년 쌓일 테다. 공모전의 탈을 쓴 기득권이 내 책장에 꽂힐 수 있었던 이야기들을 약탈해가는 작태를 계속 두고 볼 수는 없다. 산타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누군가의 산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부하지만 —게다가 벌써 이십 년 전의 유행어지만— 책, 책, 책을 읽읍시다!
2022년 1월 5일
2022년의 새해가 밝았으며, 당선자들은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고배를 들이킨 후의 숙취를 느낄 틈도 없이 봄호 1차 편집 회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21 봄_칼럼’에서 ‘21 겨울_칼럼’으로 이미 한 차례 닉변을 꾀했던 이 파일은… 신춘문예에 투고할 원고를 쓰는 데 우선순위가 밀리는 바람에 결국 ‘22 봄_칼럼’으로 또 한 번의 저장명 변경을 겪으며 꼬박 일 년의 장기 프로젝트가 되었다.
일 년 동안 ‘신춘문예’라는 글감을 붙들며 깨달은 바가 있다. 스스로 써 낸 문장이 질릴 정도로 글을 읽고 퇴고하다 보면 그냥 확 전부 휴지통에 버려버리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이는 비단 나의 지구력 부족의 탓만이 아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되는 무기력과 자기비하의 대환장 콜라보라는 사실이다. 비록 내가 작년 신춘문예에 제출한 원고는 등단보다는 과제 완수를 목표로 했으며 이 글 또한 그리 큰 부담감을 가지고 쓰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 거짓말이다. 이미 일 년을 미뤘으니 이번 호에는 반드시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내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거대한 소명의식을 등에 업은 채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간절함을 생각한다면 신춘문예는 한없이 좁다래진다. 내내 신춘문예에 대한 회의를 가감없이 드러냈으면서도 어쩐지 계속 모자란 듯한 기분이 드는 까닭은, 어쩌면 신춘문예는 단순 제도가 아니라 겨우 몇 주 반짝 글 쓰는 시늉을 했을 뿐인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종류의 감정이 응집된 총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일 테다. 여전히 내겐 너무 아찔한 네 음절을 발음하기 위해 긴 심호흡이 필요한 이들이 남아있는 이상 이 글에 대한 나의 아쉬움은 계속 팽창할지도 모른다. 더 잘 써내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과 미련, 형용할 길을 찾지 못한 나머지의 감정들. 그렇게 이곳의 뒤안에 쌓일 마음들이 신춘문예의 틈을 조금이라도 넓혀 그들의 날숨에 스페이스 한 칸을 마련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22년 2월 4일
점차 계절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매년, 절기는 꿋꿋하게도 새로운 시절의 도래를 알린다. 다시 한 번 절기를 이 글에 끌어들인 까닭은 오늘이 이 글을 시작한 뒤로 두 번째 맞는 입춘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를 오래도 괴롭혔던 이 일기의 마지막 두 문단을 쓸 차례이다.
계절이 돌아오는 것이 새삼스럽다. 언제부터가 봄이고 여름인지, 또 가을이고 겨울인지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시절은 자꾸만 도래하고 아무도 귀띔해주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문득 이제 곧 봄이 오겠거니 알아차린다. 끝끝내 움틀 새순을 아는 마음은 살을 에도록 지독한 추위를 버틴다. 지난하고도 어리석은 마음이다. 무용하다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르는 시간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개화할 순정이며, 그 자체로 이미 반짝이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새 봄을 바라는 마음은 어려운 어제를 통과해 내일에 이르기까지의 새벽에 보내는 입맞춤이며, 기꺼이 부서짐을 감내하는 오늘임에 틀림없다.
이제야 입춘이지만 마침내 난춘이다. 쓴다는 것은 아름답고 쓸모없는 일이니, 그러나 결국은 아름다운 일이니 새 봄을 바라는 마음들은 계속해서 쓸모없는 일에 몰두하며 오늘의 새벽을 보내겠지. 그렇게 오늘을 살아내고 도착한 내일에는 어지럽지만은 않은, 푸르게 따뜻한 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믿는다. 그때까지 모든 문청들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며. 난춘일기 끝.
편집위원 열음 / yeoleumse@gmail.com
[1] 일례로, 《경향신문》은 “원고 앞에 별지를 붙여 이름(본명 명기)”, 《국제신문》은 “이름(필명인 경우 본명을 따로 써주십시오), 주소, 전화번호 등은 작품 외 별도 표지에 명기해야 한다.”라고 응모 요령을 두어 응모작과 응모자들의 신상 정보를 분리한다.
[2] 후문학파는 ‘선인생 후문학(先人生 後文學)’에서 비롯된 말로, 생업을 은퇴한 후 문학에 뜻을 두는 이들을 가리킨다.
[3] 굳이 작은따옴표를 친 까닭에서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글 쓰는 일을 온전한 취미로만 보기에는 걸리는 구석이 많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문화》 2021 가을호 특집에 실린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보다 자세히 언급하였다.
[4] “이상을 넘어서면 시가 아니고 김소월을 넘어서면 현대시가 아니다 (김인환, 2011).”
[5] 조동일 (1994).
[6] 주최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예심과 본심을 나누어 심사를 진행하며, 각 단계별 심사위원도 상이하다.
[7] 저자는 부산대학교 재료공학과를 졸업한 후 삼성전자에서 생산설비를 관리하는 엔지니어로 4년 9개월을 근무하였다.
[8] 한국판 조앤 롤링? 삼성 전자 관두고 쓴 첫 소설로 베스트 셀러 1위. (2021.01.23.). 조선일보
[9] [소설가⑤] <피프티 피플> 정세랑 작가, “젊은 사람들 편을 들어주는 할머니 작가가 되고 싶다”. (2018.02.26.). 씨네21.
[10] 김초엽 작가의 첫 장편 소설로, 디스토피아 SF 장르이다. 최근 국내 최대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 드래곤’과 영상화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
[11] 더 중요한 것은 장르문학을 향한 독자들의 관심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메이저 출판사인 ‘민음사’는 올해 봄 6인의 SF 작가(김보영, 김초엽, 듀나, 배명훈, 정세랑, 정소연)를 인터뷰 한 『우리는 SF를 좋아해』 출간을 앞두고 뉴스레터를 발송하는 등 SF 독자들을 의식한 기획을 선보이고 있다.
[12] 장강명은 공채를 통해 삼성 그룹과 동아일보에 입사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한겨레문학상,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 오늘의작가상, 문학동네작가상 등 최단 기간 최다 문학상을 휩쓴 장본인이다. ‘한국식 선발 시험’의 수혜자라고도 볼 수 있는 그는 자신이 경험한 ‘공채’와 ‘공모’의 난점을 바탕으로 『당선, 합격, 계급』을 저술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장강명 (2018). 당선, 합격, 계급. 민음사
조성면 (2019). 장르문학 산책. 소명출판
기사 및 온라인 자료
김근욱 (2022.02.24.). 카카오엔터 웹소설 ‘데못죽’ 굿즈 펀딩, 4억 7000만원 모였다. 뉴스1. Retrieved from https://www.news1.kr/articles/?4595305
남정미 (2021.01.23.). 한국판 조앤 롤링? 삼성전자 관두고 쓴 첫 소설로 베스트셀러 1위. 조선일보. Retrieved from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01/23/65CP6VXG2NE6XC6Y3AR76PO2E4
박태해 (2021.11.23.). [데스크의눈] 신춘문예 문 두드리는 ‘실버문청’들. 세계일보. Retrived from http://www.segye.com/newsView/20211123515705
신인섭 (2019.02.17.). 본격문학·SF·판타지 종횡무진 오가는, 소설가 정세랑 . 월간중앙, Retrived from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4971
이호재 (2020.11.12). 전자책 먼저 낸뒤 베스트셀러… 꿈을 판 작가, 꿈을 이루다. 동아일보. Retrieved from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01112/103918420/1
임수연 (2018.02.26.). [소설가⑤] <피프티 피플> 정세랑 작가, “젊은 사람들 편을 들어주는 할머니 작가가 되고 싶다”. 씨네21. Retrieved from cine21.com/news/view/?mag.id=89528
정진영 (2019.10.25.). 화려한 신춘문예·안정적 문예지…다른 매력 ‘작가의 길’. 문화일보. Retrieved from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102501032121320001
한소범 (2019.11.27.). SNS가 쏘아올린 등단작… 순수문학 데뷔 ‘변화의 바람’. 한국일보. Retrieved from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1261661735563
한송희 (2019.10.01.). [카드뉴스] 숫자로 알아보는 2019년 신춘문예. 뉴스페이퍼. Retrived from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