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낯선 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 편집위원 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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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 2021)[1]는 침대 위에서 실루엣만 언뜻 보이는 한 여자의 음성으로 시작한다. 역광 때문인지 그의 얼굴과 나신은 스크린에 온전히 맺히지 않는다.


여자의 이름은 ‘오토’로, 각본가로 활동 중이고 연출가 겸 배우인 남편 ‘가후쿠’와 살고 있다. 오토는 섹스 직후 이야기를 쏟아내는 버릇이 있다. 오프닝 장면의 그가 침대 위에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하자, 가후쿠는 여느 때처럼 아내에게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의 뒷부분을 말하도록 유도한다. 아침이 되면 지난 밤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대부분 잊는 오토는, 전날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가후쿠의 말을 토대로 각본을 쓰곤 한다. 이렇듯 둘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우연히 가후쿠가 오토의 외도를 목격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기상 악화로 인해 출장이 지연되어 집으로 다시 돌아온 가후쿠는 오토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오토의 외도를 이미 짐작하고 있던 가후쿠지만, 그는 오토에게 이에 대해 묻지 않으며 오히려 없던 일로 하고 싶은 것처럼 행동한다. 너무나 상처받아서인지, 대면할 진실이 겁나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라는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회피한다.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직면한 이후에도 오토가 직접 체호프의 희곡 〈바냐 삼촌〉[2] 대본을 낭독한 음성이 담긴 테이프를 틀어 놓고 대사를 연습하며 운전하는 오랜 습관을 멈추지 않는다. 희곡의 흐름을 파악하고 극의 흐름을 머릿속에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습관은 그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후쿠의 대사 사이사이에 들리는 오토의 대사는 가후쿠의 톤과 대사 속도에 딱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오토는 가후쿠가 사랑해 마지않는 유일한 사람일 뿐 아니라, 그를 잘 아는 동시에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토는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오늘 저녁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다고 당부하지만 (자신의 외도와 관련된 이야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후쿠는 밖이 캄캄해져서야 귀가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러 집 주변을 빙빙 돌다가 들어간다. 자신이 그의 외도 사실을 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그가 떠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간 집에는 쓰러져 있는 오토가 있다. 그리고 결국 가후쿠는 아내의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하게 되었다.


오토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상실을 경험한 가후쿠는 오토의 죽음 이후 진행된 〈바냐 삼촌〉 연극을 차마 끝마치지 못한 채 내려온다. 연극의 주인공 바냐는 죽은 누이동생의 딸 소냐, 그리고 자신의 늙은 어머니와 함께 시골 영지에 살고 있으며, 어리석고 파렴치한 속물 매형을 지원하느라 자신의 평생을 허비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인물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의지하고 사랑해 마지않았던 오토에 대한 신뢰가 깨진 것도 모자라, 의도적이었던 늦은 귀가로 인해 ―오토가 죽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아내를 잃기까지 한 가후쿠가 바냐를 연기하는 일은 꽤나 힘들었을 테다.


이후 영화는 2년의 시간을 건너뛰고, 가후쿠가 그의 빨간 차를 몰고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이동하는 장면과 함께 비로소 오프닝 크레딧을 띄운다. 러닝타임의 약 40분이 지난 시점으로, 보기 드물게 긴 프롤로그다. 히로시마 예술문화극장의 연극제에서 〈바냐 삼촌〉의 연출을 제안받은 가후쿠는 도착 후 극장 측에서 고용한 그의 전용 드라이버 ‘미사키’와 내키지 않는 동행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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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쿠가 차를 타고 이동해 도달한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로드무비의 구성을 띤다. 그의 붉은 SAAB 900에는 드라이버 미사키뿐 아니라, 연극을 함께 만들어가는 연극제 관계자 ‘윤수’와 오토의 외도상대(로 추측되는) 배우 ‘다카츠키’ 역시 탑승한다. 가후쿠의 자동차는 운동하는 차 안에서라면 늘상 발생하는 시공간의 변화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내에서 차는 ‘동일자’로부터 ‘타자’에게로, 나아가서는 외면해왔던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여정을 다루며 이동의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그렇다면 오토의 죽음 이후, 가후쿠의 차에 탑승하는 타자들을 중심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미사키: 타자(他者)와의 동승(同乘)


연극제 관계자들과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도중, 과거 연극제에서 있었던 불의의 사고로 인해 상주 예술가는 반드시 전용 드라이버를 고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만들어졌으며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듣고 가후쿠는 당황한다. 자동차 안에서 아내의 목소리를 통해 희곡 전체를 확인하는 습관은 오토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 머무는 동안 가후쿠가 묵는 섬이 극장으로부터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것 또한, 출퇴근 시간동안 오토가 녹음한 테이프로 대사를 연습하기 위해 그가 일부러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 오랜 습관만큼이나 15년 된 빨간 자동차 역시 가후쿠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 과거 그가 녹내장 판정을 받은 후 의사에게 가장 먼저 물었던 것이 운전의 가능 여부였을 만큼, 그에게 운전이란 행위와 자동차의 존재는 무척이나 소중하다. 미사키의 안정적인 드라이브에 운전을 허락하기는 했다만, 끔찍이도 아끼는 자신의 차를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것은 그에게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허나 가후쿠는 가장 사적이고 편안한 공간을 침범당함과 동시에 이미 미사키라는 ‘타자’를 맞닥뜨렸다.


가후쿠는 출퇴근 시간마다 미사키에게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삼촌〉 테이프를 틀어 달라고 부탁한다. 조용한 차 안, 가후쿠가 뜬금없이 대사를 낭송하는데도 미사키는 표정 변화 하나 없다. 겨울밤 주차장 의자에 앉아 가후쿠를 기다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고 있는 미사키는 추운 기색도, 졸린 기색도 없다. 자신을 학대하던 엄마를 출퇴근시키기 위해 중학생 때부터 운전을 배웠다고 가후쿠에게 터놓는 영화 중반부의 장면에 이르서야, 관객은 나이답지 않은 그의 시니컬함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미사키에게 자동차란 가후쿠에게만큼이나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도.


〈바냐 삼촌〉의 대사를 복기하는 자동차 내부는 또 다른 연극 무대기도 하며, 공허하게 내뱉어지는 대사로만 존재했던 불완전한 연극은 미사키라는 관객으로 인해 완전해진다. 그리고 어느새 차는 이승과 저승을 뛰어넘는 부부의 연극 대신, 미사키와 가후쿠의 목소리가 공명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들은 녹음 테이프 속 목소리는 누구인지, 혹은 어떻게 운전을 잘 하게 되었는지와 같은 말들을 주고받기도 한다.


폐렴으로 죽은 가후쿠의 딸이 이제까지 살아있다면 미사키와 동갑이다. 이로 인해 유사 부녀관계로 보이는 그들은 지금은 세상에 없는 자신의 아내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홀로 간직해 온 상처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들은 점차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며 비로소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된다. ‘소중히 대해 온 차인 걸 알기에 (가후쿠의 차 안에 있는 것이) 편하지 않다’던 미사키의 말은 이후 바닷가 펜스 앞에서 ‘소중히 대했다는 것이 느껴져 이 차가 좋다’는 말로 바뀐다. 뒤에 앉으려면 앞 좌석을 젖히고 들락거려야 하는 불편한 차 구조에도 불구하고 뒷좌석만을 고집하던 가후쿠 역시도 어느새 조수석에 앉아 있다. 같은 장면, 아끼던 자동차에서의 흡연을 늘상 꺼리던 가후쿠가 미사키와 썬루프 밖에 손을 나란히 걸친 채 담배를 피는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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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자동차에서의 이동은 시시각각 바뀌는 창밖의 풍경, 도로를 달리는 모습을 포착한 부감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이는 가후쿠와 미사키의 과거와 현재가 바퀴에 맞물리며 둘의 상실이, 봉인되어 있던 상처가 아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작품을 구상할 때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 향기〉나 〈텐〉 등은 영화 대부분이 자동차 안에서 진행된다.[3] 안에서도 볼 수 있는 밖의 풍경과 하늘 덕분일까. 차 내부에서 내내 영화가 진행되는데도 불구하고 키아로스타미에게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부는 폐쇄적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동차의 고유한 속성은 〈드라이브 마이 카〉 속 가후쿠와 미사키의 이동에도 역시 적용된다.



윤수 그리고 유나: 얼굴로, 눈으로, 손으로 하는 대화


미사키를 제외하고 히로시마에서 처음 차에 타는 인물은 윤수다.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에 가후쿠와 함께 탄 윤수는, 수어를 언제 배우게 되었냐는 가후쿠의 질문에 뜬금없이 자기 집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대답한다. 차를 타고 이동한 윤수의 집 앞, 마중 나온 ‘유나’의 모습에 놀란 가후쿠는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윤수는 〈바냐 삼촌〉에서 소냐 역을 맡은, 한국수어를 사용하는 배우 유나와 부부 사이라는 것을 가후쿠에게 고백하기 위해 식사를 제안한 것이었다. 윤수는 차 안에서 가후쿠가 했던 질문에 대해 유나를 만난 이후 수어를 처음 접했으며, 유나의 언어가 알고 싶어 배우기 시작했다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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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그의 언어를 배운 윤수, 서로에 대한 거리감을 점차 좁혀나가는 가후쿠와 미사키처럼, 영화는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낯섦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한 첫 단추는 대화이다. 흔히 언어는 타자와의 대화에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고 여겨지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언어만을 통해 표면적인 소통은 가능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전달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가후쿠는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한국수어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해 〈바냐 삼촌〉을 새롭게 연출한다. 허나 연습 초반에는 다들 가후쿠의 연출을 버거워한다. 배우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상대방의 ‘외국어’는 지루하며,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대사 전달 자체에 집중하는 연습은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연극 준비 막바지 무렵의 야외 리허설에서 유나는 잎사귀를 주워 옐레나 역의 ‘재니스’에게 건네며 그를 자연스럽게 뒤에서 끌어안는다. 여전히 한 명은 한국수어를, 한 명은 중국어를 사용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나뭇잎을 만지는 유나의 손과 겹쳐진 둘의 뒷모습은 침묵 속에서 그 둘을 지켜보던 모두의 감정을 어루만진다. 가후쿠가 원하던 바로 그 순간이다. 언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목소리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차원의 소통이 이루어진 것만 같은 순간, 가후쿠는 말한다.


좋아. 지금 무언가 일어났어. 아직은 배우들 사이에만 일어난 일이야. 그다음 단계가 있어. 관객에게 그걸 열어 가. 하나도 빼먹지 말고 극장에서 다시 재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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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일어난’ 것만 같은 순간은 앞서 묘사한 저녁 식사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유나, 윤수, 가후쿠, 그리고 미사키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때 일본어를 한국어로, 또는 한국수어를 일본어로 옮기는 과정들은 어찌 보면 지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장면은 영화의 숱한 대화 중 가장 따뜻하다. 유나가 수어를 할 때 세 사람은 그를 가만 바라보며 집중한다. 온도 없던 미사키의 눈빛 역시 그 대화를 바라볼 때만큼은 온기를 가진다. 수어를 전달할 때 생기는 말의 공백과 장면 사이사이에는 다정한 침묵이 존재한다. 연극 연습이 힘들지 않냐는 가후쿠의 물음에 대한 유나의 대답 역시, 가후쿠와 관객들의 마음에 ‘무언가가 일어나게’ 한다.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내겐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보는 것, 듣는 것은 가능하죠. 때론 말보다 많은 걸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차에 탄 가후쿠와 미사키는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다. ‘좋은 분들이에요’, 미사키가 말문을 튼다. 좋은 대화란 어쩌면 얼굴로, 눈으로, 손으로 하는 대화다. 영화는 연극 준비 과정에서 언어의 불완전함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는 소통의 불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영화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편에 더 가깝다.



다카츠키: 자신을 직면하고 타자를 바라보기


허나 타자를 똑바로 마주하는 과정은 생각만큼 단순하지만은 않다. 가후쿠는 오토의 외도로 인한 자신의 상실감을 어찌할 줄 몰랐기에, 그 상처를 외면해버림과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오토를 직면하길 거부했다. 레비나스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오토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타자가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넘어서면서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을 우리는 얼굴이라고 부른다. (…) 타인의 얼굴은 매번 그것이 내게 남겨 놓은 가변적 이미지를 파괴하고, 그 이미지를 넘어선다. 타인의 얼굴은 그 자체로 현현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표현한다.[4]


레비나스에게 얼굴은 구체적이거나 외면적인 어떤 형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의 얼굴이란 ‘타자의 직접적인 호소’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오토는 가후쿠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봐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이내 좌절당했다. 이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오토의 얼굴이 스크린에 온전히 잡히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가 가후쿠를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히로시마의 〈바냐 삼촌〉에서 바냐는 가후쿠가 아니다. 가후쿠에게 있어 바냐를 연기한다는 것은 아내를 잃은 고통과 아내의 외도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이며, 아내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고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가후쿠는 오히려 미성년자와의 스캔들로 인기가 나락으로 떨어진 배우 다카츠키를 바냐로 낙점한다. 그는 아내 오토의 외도 상대 중 한 명으로 추측되는 인물이다.


영화는 다카츠키의 입을 빌려, 타자와의 관계 맺음은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카츠키는 연극 준비 와중 가후쿠에게 사적인 술자리를 두어 번 제안하고 가후쿠는 그때마다 요청에 응한다. 바에서부터 가후쿠와 다카츠키는 두 사람이 동시에 사랑했던 여인 오토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가후쿠는 딸의 죽음 이후 섹스를 할 때에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했던 오토에 대해 털어놓는다. 허나 놀랍게도 다카츠키 역시 오토가 지어낸 이야기 중 하나를 알고 있는 듯하다. 오토가 죽기 전 가후쿠에게 마지막으로 전했던,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소녀가 짝사랑하는 소년 집에 몰래 들어가 그의 침대에서 자위하는데 누군가 계단을 올라온다’에서 멈춘 이야기 말이다. 심지어 다카츠키는 가후쿠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의 뒷부분까지 알고 있어 그를 놀라게 한다.


가후쿠나 관객의 예상과는 달리 계단을 올라오는 그 침입자는 소년이나 소년의 가족이 아니라 강도였으며, 그에게 겁탈당할 위험에 처하자 소녀는 그 강도를 죽이고 나온다. 하지만 소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다음날 등교한 소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며, 이후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저 소년의 집 앞에 생긴 감시카메라가 전부다. 소녀가 소년의 세계에 준 변화는 감시카메라가 유일한 셈이다. 결국 소녀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려는 듯 카메라를 응시하며 “내가 죽였어”라고 거듭 외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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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과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하는 다카츠키의 모습은 묘하게 섬뜩하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 자신을 찍어 대는 휴대폰 카메라 소리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던 다카츠키가 시민 한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 앞서 묘사한 장면과 “내가 죽였다”라는 대사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어두운 차 안에서 형형한 눈빛으로 말할 때처럼, 다카츠키는 연극 리허설을 찾아온 경찰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과실치사를 인정한다.


다시 가후쿠의 차 안으로 돌아오자면, 다카츠키는 오토의 이야기 뒷부분을 전하며 이런 말을 한다. 힘을 준 듯한 그 장면과 대사는 오토를 직면하지 못한 가후쿠를 책망함과 동시에, 영화가 그에게 정확히 전하고픈 메시지로 들린다.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카츠키의 예기치 못한 구속으로 인해 바냐 역할은 공석이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후쿠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본인이 바냐 역할을 맡거나, 연극을 아예 취소하는 것. 가후쿠로서는 내내 직면하지 못했던 내면의 상처를 마주할 기회를 다카츠키로 인해 의도치 않게 부여받은 셈이다.



다시 미사키: 좋은 애도란 무엇인가


하지만 자신이 바냐 역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는 가후쿠는 이를 결정하기 위해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곳을 알고 있느냐고 미사키에게 묻는다. 그러자 미사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SAAB 900의 보네트를 두드린다. 그제야 깨달은 가후쿠는 차에 탄 다음, 미사키의 고향 홋카이도에 가고 싶다고 한다. 언젠가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이야기했던 곳, 상처 입고 망가져 사람 하나 찾기 힘든 곳, 미사키의 집이 산사태로 무너졌던 곳, 미사키의 비극의 원천인 곳,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곳. 홋카이도 가미주니타키초(上十二滝町)다.[5]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로, 차 안에서 해가 지고 다시 뜨는 시간 동안 둘은 계속 달린다. 깜빡 잠들어 있던 가후쿠가 눈을 뜨자 홋카이도의 설원이 펼쳐져 있다. 영화는 여기서 잠시 모든 사운드를 뺀 채 온통 흰 풍경에서 달리는 빨간 차 한 대에 관객이 온전히 집중하게 만든다. 이후 차에서 내린 둘은 나란히 서서 언젠가 미사키의 집이 있던 자리를 가만 바라본다. 무너진 집 앞에서 무너진 마음을 직시한 두 사람이 처음으로 포옹을 할 때, 영화 내내 엄격할 만큼이나 절제되어있던 감정은 마침내 폭발하는 듯하다. 이 순간의 가후쿠와 미사키를 이해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영화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정성스레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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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로 가는 차 안에서, 그리고 홋카이도의 설원에서 미사키는 가후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준다. 산사태가 났을 때 미사키는 무너진 집 아래 엄마가 있는 것을 알았기에 엄마를 살릴 수 있었지만 살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엄마를 죽였다고 표현했다. 미사키의 엄마는 인격장애를 앓고 있어 때때로 어린 아이인 사키가 되었다. 자신을 학대하던 엄마와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키가 동시에 사라졌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와 죄책감에는 분명한 괴리가 있었다. 엄마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기에 미사키는 두 배로 괴로웠을 테다.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에 두 사람의 상실과 죄책감의 무게가 겹쳐지는 듯하다. 그렇게 미사키는(혹은 가후쿠는) 낯선 타자와 함께 폭설의 무게를, 삶의 무게를 지탱한다.


영화란 공간적으로 확장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에 관한 예술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간예술과 인생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바로 사라짐에 있다. 허나 그 와중에도 뚜렷한 생채기를 남기고 떠나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가후쿠는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자를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고, 슬픔에 그을린 끝을 맞아도 그 그을음을 직면하고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애도’이다. 무너진 집 앞에 다가가 한 송이씩 흩뿌린 꽃과, 땅에 쌓인 눈을 판 후 향 피우듯 꽂아놓은 담배처럼, 다정하기도, 위태롭기도 한 무언가다. 그리고 그 꽂혀있는 담배 한 개비를 영화는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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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프로이트는 애도 개념에 대해 크게 상반된 주장을 펼친다. 데리다는 애도를 완결 짓는 일은 불가능하며, 애도란 타자를 부재의 자리로 밀어내지 않고 타자를 ‘살아있게’ 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허나 프로이트에게 애도는, 삶으로의 의지와 자기방어적인 본능을 바탕으로 너무 멀지 않은 기간 내에 끝내야 하는 작업일 뿐이다. 어쩌면 미사키와 가후쿠는 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가지 애도 모두에서 확실한 건, 좋은 애도란 타자를 기억하는 동시에 나를 들여다봄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나와 타자는 관계로든, 기억으로든, 책임으로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가후쿠와 미사키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사실은 애도, 즉 떠나간 이의 부재를 인정하고 그 부재로 인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 서로에게 서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상영된 연극에서 가후쿠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바냐를 연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미사키가 있었기 때문이며, 미사키가 늘상 외면해왔던 고향을 방문한 것 역시 그의 옆에 가후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후쿠의 차 안에서 윤수와 다카츠키가 타고 내리는 동안, 그리고 오토의 목소리가 끊겼다 이어지는 동안, 미사키는 언제나 운전대를 잡은 채 가후쿠와 동행했다.



영원히 낯선 당신에게


어떡하겠어요. 살아야죠! 바냐 외삼촌, 우리 살도록 해요. 길고도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해요. 휴식이란 걸 모른 채 지금도 늙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러다가 우리의 시간이 오면 공손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내세에서 말하도록 해요. 우리가 얼마나 괴로웠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슬펐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릴 가엾게 여기실 테고, 저와 외삼촌, 사랑하는 외삼촌은 밝고 아름다우며 우아한 삶을 보고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지금 우리의 불행을 감동과 미소로 뒤돌아보면서 우린 쉬게 될 거예요. 전 믿어요, 외삼촌. 뜨겁고 열렬하게 믿어요…… 우린 쉬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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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연극제 무대 위, 결국 가후쿠는 바냐가 된다. 영화는 가후쿠의 바냐와 유나의 소냐를, 그리고 객석에 앉아있는 미사키를 번갈아 비춘다. 허나 가후쿠에게 있어 진정한 소냐는 미사키일 것이다. 희곡 속 엉엉 울며 주저앉아 있는 바냐와 그를 위로하는 소냐는, 홋카이도 설원에서 마침내 포옹하는 가후쿠와 미사키의 모습과 꼭 닮았다. 그리고 소냐의 위 대사는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로 향한 그들의 여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방증하며 둘을 위로한다.


영화의 모든 인물은 과거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았다. 아이를 잃은 오토 부부와 엄마를 잃은 미사키, 아이를 유산한 후 춤을 못 추게 된 전직 댄서 유나까지. 심지어 다카츠키조차도 스캔들에 한번 휘말려 밀려난 배우라는 점에서 끝을 경험했으며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한번 더 자신을 세상 끝으로 내몬다. 이렇듯 영화는 한 차례 끝난 존재들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무대 위 유나의 손은 개개인의 삶이 지옥 속일지라도 꿋꿋이 살아나가자는 위로를 전한다.


지옥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그 위로 이후 남아있는 것은, 위로가 보여 준 희망에 잠시 속았다가 다시 돌아오고야 말 고통스런 현실뿐일 것이다. 허나 대책 없고 낭만화된 위로일지라도, 절망보단 희망에, 죽음보다 삶에 가능성을 걸어준 고마운 누군가에게, 영원히 낯선 타자일 내 곁의 당신에게 전하고 싶다. 긴긴 낮과 길고 긴 밤을 견디고 견디자. 대신 슬픈 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고, 우는 만큼 미소 짓자. 그리고 죽고 나서 말하자. 우리, 고통받았다고. 그러니 비로소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소냐가 바냐에게,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그러했듯이.


20. [리뷰] 드라이브 마이 카 그림 1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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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다연 / mandy1423@naver.com


[1]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없는 남자들』에 실린 동명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내용을 좀 더 확장시키기 위해 『여자없는 남자들』의 또 다른 단편 셰에라자드기노의 설정 역시 적절히 차용했다.

[2]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 속 화자 가후쿠가 맡은 배역이 바로 <바냐 삼촌>의 '바냐'다. 영화는 소설에서 더 나아가 <바냐 삼촌> 희곡을 연극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극중극’ 형태를 통해 보여준다.

[3] 동일본 대지진에 관한 다큐멘터리 <파도의 소리>(2011)를 만들기 위해 일본을 가로지르며 자동차 안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 공간에서 정말 다양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자동차를 담는 방식을 보고 <드라이브 마이 카>를 구체화했다고 전한다.

[4] 에마뉘엘 레비나스 (2018). 56-57.

[5] 원작 소설의 잡지 연재 시 실제 홋카이도에 있는 지명인 나카톤베쓰초(中頓別町)로 썼다가 해당 지역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해서 단행본에서 이름을 가상의 지명으로 바꾸게 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무라카미 하루키 (2014). 여자없는 남자들. 양윤옥 (번역). 문학동네.

에마뉘엘 레비나스 (2018).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번역). 그린비.


논문 및 저널

남다은 (2021). 어둠을 밝히는 손. FILO no. 23. 26-45.

왕은철 (2012).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애도이론 "나는 애도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한국영어영문학회. Vol.58 No.4, 783-807.


기사 및 온라인 자료

송경원 (2021.12.30.). '드라이브 마이 카'와 하마구치 류스케 작가론. 씨네21. Retrieved from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9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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