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의 ‘교정 당함’에 대하여, 그리고 화학적사이보그

[특집 '장애'] 편집위원 숙영

1. 아빌리파이: “사회적 적응을 도움.” 사회적 적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몇 주 전부터 ‘아빌리파이(Abilify)’라는 이름의 약을 추가로 복용하게 되었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고 무기력한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정신과 의사가 새롭게 처방한 것이었다. 약국에서 2만 원가량을 내고 들고나온 약 봉투에는 “아빌리파이정 – 정신활동의 흥분상태를 제거함으로써 사회 적응을 도움”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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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숙영이 받아왔다는 약 봉투의 사진이다. 약 봉투에는 여러 약의 이름과 약에 대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이 사진에는 그 중 아빌리파이에 해당하는 설명 부분만 크롭되어 있다. 아빌리파이정2mg(정신신경용제)이라는 이름 하단에 아빌리파이 2mg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고, 사진의 우측에는 ‘초록색 정제(실온보관)’, ‘정신활동의 흥분상태를 제거함으로써 사회 적응을 도움’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아빌리파이 사진 하단에는 복용시 생길 수 있는 부작용도 조그맣게 적혀 있는데, 졸린 사람의 표정을 묘사한 그림과 함께 ‘졸릴 수 있어요’라는 문구, 자동차 그림과 함께 ‘운전 주의하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림 설명 끝.



능력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ability’에 ‘-fy’를 붙여 ‘기능하게 하다(가능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 약은 내가 왜 정신질환을 치료받고자 했는지를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원활하게 기능하지 못하고, 온갖 웃기고 슬픈 종류의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 경험이 쌓여가면서 자괴감과 우울감도 축적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왜 주어진 일을 제때에, 잘 해내지 못할까’, ‘나는 왜 항상 늦을까’,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른가’… 나를 주어로 두는 많은 질문이 자책으로만 수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정신과에 가야만 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나를 잘 기능하게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한 대학병원의 정신과였다. 증상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거치는 질의응답에 더듬거린 이후에 나는 의사에게 내가 ADHD인 것 같다고 했고 의사도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의사는 나에게 휴학생이냐고 물었다. 진단을 위한 본격적인 뇌파 검사 이전에 의사가 내게 한 이 질문은 아마, 지금 학기 중인지- 그러니까 지금 기능을 잘해야 하는 상황인지를 물어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학기 중이라는 대답 끝에는 ‘그러면 약을 처방해볼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뇌파검사 이후에야 ‘진짜’ ADHD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어느 정도 해결 방법을 찾은 것 같은 후련함도 있었다. 동시에 ‘원활한 기능’이 내가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불능이 야기한 우울감 같은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환자에게 해결책을 제시할 때에는 기능성, 생산성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의사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작고 답답하며 낡은 진료실 안에서 나의 고통은 모두 기능이나 생산성과 관련될 때에만 언어가 되어 공유될 가치를 가졌다. 그렇게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내가 얼마나 잘 기능하는지’를 기준으로 약효를 평가했다. 투약 이전과 비교했을 때 내게 주어진 과제를 시간 안에 원활하게 잘 수행하고 있는지, 특정 과제에 투입하는 시간 내에 어느 정도의 생산성을 가지는지, 집중력을 유지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속되는지. 나의 생산성을 스스로 평가하는 자발적 주체가 되어, 투약 시작을 분기점으로 두고 연속적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나를 계속해서 분절적으로 평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ADHD 환자들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ADHD 치료제인 ‘콘서타’에 대한 ‘간증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콘서타를 먹고 난 이후부터는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으며, 집중력이 놀랍게 향상되었다는 내용의 글들이 대부분이다. 화학적 치료 이전의 그들이 경험했던 수많은 실패가 사실은 자신의 정신질환에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안심을 느끼면서 진작 콘서타를 복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글들도 아주 많다. 질환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의 순수한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허상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들을 보면 나도 콘서타를 먹으면 이전과는 다르게 오류 같은 것이 제거된 상태로 재설정되어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스민다.


하지만 약효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생산성과 기능성을 두는 것은 투약 이전에 원활하게 기능하지 못하던 나를 옥죄던 함정에 다시 제 발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애초에 콘서타는 내 앞에 놓인 문제들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음에도, 내 몸의 기능성을 시시각각으로 평가하고 좌절하면서 나는 함정을 더 깊게 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적절한 양의 콘서타를 복용하게 되어서 ‘정상’이 되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함정을 파는 행위는 그대로 둔 채, 나만 ‘정상’이 되는 것을 두고 정말 문제의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아빌리파이가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사회 적응’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ADHD답게, 그리고 ADHD인지 모르고 살아왔던 꽤 긴 시간 동안의 ‘나답게’, 끊임없이 연결되는 질문의 팝업을 멈추지 않고 해결의 대상으로 두고자 한다. 오전에 콘서타와 아빌리파이를 잘 챙겨 먹은 나는 질문의 연쇄를 저지하려고 하지 않고 이 글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찬찬히 찾아볼 것이다.



2. 정상성에서 어긋난 존재들은 쉽게 ‘정신병자’가 ‘된다’


무엇이 문제라고 여겨지는지가 중요하다

여기 A가 있다. A는 매일 같이 성관계를 갖는다. 상대는 모르는 사람일 때도 있고, 아는 사람일 때도 있고, 사람‘’들’일 때도 있다. A의 성생활은 충동적이다. A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은 정신과에 방문해서 충동성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것을 제안한다. A가 충동성을 잘 조절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로 인식되고, 그 해결책으로서 정신과 방문이 제시된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A의 충동성이 문제로 여겨진 것은 그것이 '난잡한' 성생활로 나타났기 때문이 아닐까? A의 충동성이 다른 사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나 좋은 학점을 얻기 위한 행위 같은 것을 통해 발휘되었다면 이때도 충동성이 문제가 될 수 있었을까?


난잡한 성생활이 문제라면, 그것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점이 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ADHD 진단을 받고 조절을 위한 치료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충동적인 성생활을 하는 A처럼, 나 또한 ADHD를 진단받은 사람으로서 A가 가지는 충동성을 일상적으로 휘두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며 변호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충동성과 난잡한 성생활로 인해서 A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신체적·사회적인 재해를 겪게 되는 상황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기에 정신과 상담과 약물치료를 통해 충동성을 교정하는 것이 A에게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난잡한 성생활이 왜 문제인지를 모르겠기에 찜찜한 마음이 남는다. 무엇이 A의 성생활을 두고 난잡하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가? 또는 입 밖으로 대놓고 난잡하다고는 말하지 않으면서도 A의 성생활이 옳지 않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자의 난잡한 성생활을 문제로 이미 규정해두고 그것을 교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 사회가 오랫동안 채택해왔던 성녀/창녀의 분할 통치와 무관하지 않다. 교정을 통해 모두가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게 된다면, 다시 말해 한 명의 여성과 그의 배우자인 한 명의 남성이 임신과 출산만을 위해 주기에 맞춰 규칙적인 성관계를 갖게 된다면 지금의 체제는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존속될 것이다. 이성애자 부부와 정상가족과 ‘순결’한 여성과 청소년들로 이뤄진 세상 속에서 그렇지 못한 존재들,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들은 ‘비정상’, ‘별종’, ‘변태’, ‘걸레’라는 이름만 그 위에 덧씌워지거나, 존재 자체가 비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여기까지 읽고 누군가는 왜 갑자기 난잡한 성생활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지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난잡함은 하나의 사례일 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아니다. 무엇이 문제로 여겨지고 있는지, 그것이 왜 문제로 여겨지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여성의 난잡한 성생활이 교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적될 때, 이는 지나친 충동성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난잡한 성생활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지점은 명확하게 구분되기 어렵지만 충동성이 다른 방식으로 발휘되는 상황, 즉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현대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발휘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A의 충동성이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인지를 쉽게 추측해볼 수 있다. 우리가 자라오면서 들어왔던 대기업 창업주들의 수많은 일화를 떠올려보자. 그들의 ‘도전정신’은 다르게 말하면 충동성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즉각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모습을 ‘충동성’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의 충동성은 교정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충동성은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에 일부분 역할을 했고 그 결과 오히려 ‘기업가 정신’이라고 불리면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충동성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충동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발휘되지 않을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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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혹은 나의 충동성과 달리 대기업 창업주들의 충동성은 ‘과감함’, ‘도전정신’, ‘기업가 정신’으로 평가된다.


‘기업가 정신’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기업가들의 충동성을 확인할 수 있는 두 장의 사진이 왼쪽, 오른쪽으로 각각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왼편의 사진에는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얼굴 사진 옆에 ‘“자동차 1톤은 500만원 반도체 1톤은 13억원(이병철의 발언)” 주변 비웃어도 투자. 반도체 신화 일군 이병철’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그 밑에는 현대 창업주 정주영의 얼굴 사진과 함께 ‘“사막은 비 안 오니 1년 내내 공사(정주영의 발언)” 역발상, 사우디 항만공사 수주. 중동바람 일으킨 정주영’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오른편의 사진은 ‘이병철의 기업가 정신’이라는 책의 표지다. 이병철이 검지손가락을 들고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일러스트 오른편에 ‘기업가 정신은 이념이 아니라 실천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그 밑에는 ‘이병철의 기업가 정신’이라는 책 제목과 ‘변화를 탐구하고, 변화에 대응하며, 변화를 기회로 이용한다!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창조적 파괴자들을 위한 자기경영노트!’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문구 오른편에는 해당 책의 출판사 이름인 ‘W미디어’가 적혀 있다. 그림 설명 끝.



정신병 진단의 편향성


건강한 여성은 더 복종적이고, 덜 독립적이고, 덜 모험적이며, 더 쉽게 영향을 받고, 덜 공격적이고, 덜 경쟁적이며, 사소한 위기에도 흥분을 잘 하고, 쉽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더 감정적이며, 자신의 외모에 더 우쭐하고, 객관성이 부족하고, 수학과 과학을 싫어한다는 측면에서 건강한 남성(따라서 건강한 성인)과 다르다(Broverman, et al., 1970: 4; 최윤경(2010)에서 재인용).


정신질환의 진단에는 미국 정신의학회가 펴낸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이하 DSM)’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2013년에 개정된 DSM 제5판(이하 DSM-5[1])이 주로 사용된다.


5번째 개정판이 나오기 전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1994년도 개정판 DSM-Ⅳ에 따르면 정신질환의 유병률에는 성차가 존재한다. DSM-Ⅳ에 포함된 125가지의 정신질환 중 101가지 질환의 유병률에 성차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우울장애, 불안장애, 신체형 장애, 섭식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히스테리성 인격장애, 의존성 성격장애 등의 경우 남성의 유병률과 비교했을 때 여성의 유병률이 더 높았으며,[2] 이는 DSM-5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3] 더 최근의 자료를 살펴보자. DSM-Ⅳ과는 20년의 시차가 있는 2017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우울증 및 다른 흔한 정신질환(Depression and Other Common Mental Disorders: Global Health Estimates)」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역시나 남성보다 여성의 우울증이 더 흔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공간의 범위를 더 좁히고 더 최근의 자료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2021년 12월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 보고서」도 있다. 이 조사에서도 역시나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장애와 불안장애의 평생 유병률에 있어 약 2배가량 더 높은 수치를 보여줬다. 우리는 이러한 성차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생물학적 차이와 같은 이야기, 그러니까 에스트로겐이 어쩔 수 없이 여성들을 남성에 비해 더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캐플란(1983)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은 젠더 편향으로 인해 유병률의 성차에 잠재적 오류가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대체로 서구 백인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DSM 진단기준은 “어떤 행동이 건강하고 어떤 행동이 비정상적인지에 관한 남성 중심의 가정”을 반영하고 있다.[4] 전문가 집단이 마련한 기준에 따라 진단을 내리는 의사는 그 (지적) 권력에 따라 진료실 안에서 절대적이고 불가역적인 존재처럼 보이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유리된 진공 상태의 어딘가에 사는 존재들 혹은 절대자처럼 누군가에게 선고를 내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성차별주의나 인종주의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신장애를 진단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진단의 기준을 마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질문을 통해 진단 기준의 편향성이 드러날 수 있었고, 진단 뒤에 서 있는 절대자의 얼굴이 드러날 수 있었다.


의존성 성격장애의 진단기준(APA, 2013)

보호받고 싶은 과도하고 지배적인 욕구로 인하여 복종적이고 매달리는 행동과 이별에의 두려움이 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이러한 성격 특성은 초기 성인기에 시작하여 다양한 상황에서 다음 중 5개 이상 나타난다.

(1) 타인에게서 과도한 충고와 확신을 얻지 못하면 일상적인 일도 결정 내리지 못한다.
(2) 인생의 매우 중요한 영역까지도 떠맡길 수 있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3) 지지와 인정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타인에게 반대 의견을 말하기 어렵다(주의: 응징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을 포함하는 것이 아님).
(4) 혼자 힘으로 과제를 시작하거나 수행하기 어렵다(동기나 활력이 부족하기보다는 판단이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임).
(5) 타인의 보살핌과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다 한다. 심지어 불쾌한 일도 자원해서 한다.(6) 자신을 돌볼 수 없을 거라는 과장된 두려움 때문에 혼자 있으면 불안하거나 무기력해진다.
(7) 친밀한 관계가 끝났을 때 필요한 보살핌과 지지를 얻기 위하여 또 다른 관계를 급히 찾는다.
(8) 자신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비현실적으로 집착한다.


위는 의존성 성격장애의 진단기준에 대한 설명이다. 의존성 성격장애는 여성에게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 장애로서 그 진단에 있어 젠더 편향이 반영되는 대표적인 정신장애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진단 기준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자. 의존성 성격장애는 독립적인 생활을 두려워하며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를 과도하게 가지는 것이 핵심적인 증상이다. 생활 전반에서 대인관계 상실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에 타인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를 잘 표현하지 못하고 상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불쾌한 일도 감수한다. 최윤경(2010)에 따르면 이러한 증상들을 나열한 진단기준은 “주로 사회적 상황과 대인관계에서 약자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캐플란(1983) 역시 이것을 두고 "불평등한 상황(사회)에서 종속적인 집단 구성원(여성)을 묘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5] 성차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의존성은 여성에게 특히 요구되는 성별 규범이다. 무엇이 여성들을 타인에게 의존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은 채, 성별 규범을 요구하면서도 이에 지나치게 순응하는 여성들에게는 의존성 성격장애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지만 의존성은 여성만의 특성으로 연결되고 여성성에 대한 평가절하로 인해 부정적인 특성이 되어버린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라는 책의 제목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 비장애인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도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의존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의존성에는 애초에 아무런 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비가시화되고 여성의 의존성만이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병리화된다. DSM의 이러한 젠더 편향성은 사회문화적 조건에 내재된 성차별에 주목하여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기보다 개인의 증상을 탈맥락화, 병리화하여 문제를 개인화한다.


한편 의존성 성격장애와 마찬가지로 연극성 성격장애 역시 여성의 유병률이 더 높은 정신질환이다. 연극성 성격장애는 ‘히스테리아(히스테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러 질환 중 하나다.[6] 이를 고려한다면 여성의 유병률이 더 높은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히스테리는 자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라’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여성의 몸 안에서 자궁이 돌아다닌 결과로서 여성에게 히스테리가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3-15세기에는 히스테리아가 마녀 혹은 사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많은 히스테리 환자들이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어 고문받고 처형당했다. 이러한 히스테리가 과학의 본격적인 연구 대상이 된 것은 19세기였다. 그러나 증상만이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을 뿐,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여전히 난소나 자궁 등의 생식기관이 히스테리의 원인으로 지적될 뿐이었다. 신경계 질환이 자궁과 연결되면서 ‘자궁-신경 이론’이 만들어졌고, 이는 여성을 적합한 위치에 묶어두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여성이 허약하다는 가설은 여성을 환자[7]로 만들었다.[8]


도대체 히스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분분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여성적인 스타일을 함축하고 있는 동시에 이에 대한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진단명이었다는 점이다.[9] 20세기에 이르러 의학 지식이 늘어나면서 히스테리로 뭉뚱그려졌던 질병들이 새롭게 등장한 수많은 진단명으로 분류되었다.[10] 연극성 인격장애 역시 그중 하나였다. 연극성 인격장애의 진단 기준 몇 개를 한 번 살펴보자. “급격한 감정변화”를 보인다거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 지속적으로 신체 외모를 사용”한다거나,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흔히 부적절하게 성적으로 유혹적이거나 도발적인 행동을 특징적으로 나타낸다”라는 내용은 연극성 인격장애에 남겨진 히스테리의 흔적을 가늠하게 한다. 케플란은 이 기준대로라면 “건강한 여성도 자동으로 연극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누구의 어떤 증상을 병이라고 규정할 것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어긋난 몸을 가지고 어긋난 행동 양식을 보이는 존재들은 쉽게 ‘정신병자’가 된다. 여성성이 멸시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이는 교정하고 치료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는 게이들과 트랜스 여성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동시에 아픈 ‘정신병자’들이 자신의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도움을 받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3. ‘교정 당함’에 대한 거부감 – 정신질환은 과연 개인의 문제인가?


신자유주의와 정신질환 치료의 탈정치성


B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우울했다. 정신과에 방문하는 것이 우울감을 느끼는 개인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실제로 약물치료를 통해 일상을 원활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사실을 B도 알고 있지만 그는 정신과에 가고 싶지 않다. 고통이 온전히 개인의 몫이자 책임인 것처럼 만들어지는 진료실에 들어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진료실은 진공의 공간처럼 작동한다. 그곳에서는 내가 느끼는 고통의 맥락이 삭제된다. 하얀 가운을 입어서 환자와 자신을 분리한 의사는 고통의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단일한 진단 기준으로 증상의 유무를 판단하여 이름을 붙인다. 이 과정에서 고통의 원인과 맥락은 거론되지 못한다. 증상에 초점을 맞춰 약물을 통해 그것을 조절하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 중 가장 간단하고 쉬운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간단한 선택지를 고르려고 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찜찜함을 느낀다. B 또한 이것이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고 느낀다.


최근 들어 2-30대 여성 ADHD 환자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2016년 1,777명이었던 2-30대 여성 ADHD 환자는 2020년 12,524명으로 4년 새 약 7배가량 늘었다.[11] 전체 연령대 중에서 가장 큰 증가폭이다.[12] ADHD 진단을 받은 2-30대 여성들이 증가했다는 것은 곧 자신이 ADHD가 아닐까 의심하는 여성들이 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정신과 방문은 먼저 자신의 행동 양식을 문제라고 인식하고 어떠한 정신질환을 가진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나 역시 그랬다. 이러한 의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진짜 ADHD 환자도, 다른 정신질환을 ADHD로 착각한 사람도, 이것도 아니면 아무런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적절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적절한 치료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증상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물론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ADHD가 아닐까 의심하는 상황을 보고 있자면 개개인이 확실한 진단명을 찾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가 보인다. 애초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ADHD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을까? 다들 어떤 상황에 놓여 있기에 자신의 행동 양식을 문제라고 인식하면서 자신의 ADHD 가능성을 의심하고 치료를 바라는 것일까?


이들이 진료실 안에서 ADHD라는 이름을 받을 수 있든 없든 간에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문제라고 인식하고 이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서 ADHD가 아닐까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2-30대 여성들은 ‘조용한 ADHD’로서 대부분 부주의 우세형에 해당하는 증상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고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주의 우세형의 진단기준을 한번 살펴보자.


ADHD 진단기준 – 부주의 우세형(APA, 2013)

다음 중 최소 6개 이상의 증상이 적어도 6개월 이상 지속되어야 하며, 이러한 증상이 발달 수준에 맞지 않고 사회적, 학업적/직업적 활동에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함.

a. 학업이나 일, 혹은 다른 활동을 하는 동안 세밀하게 집중하지 못하거나 부주의한 실수를 자주 한다(예: 자세한 사항들을 간과하거나 놓치고, 결과물이 부정확함).

b. 과제 또는 놀이를 할 때 지속적인 주의 집중에 자주 어려움이 있다 (예: 강의나 대화, 긴 분량의 독서 동안 지속적인 주의 집중에 어려움을 겪는다).
(…)
d. 지시를 자주 따르지 않거나 학업, 집안일, 직장에서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에 자주 실패한다 (예: 일을 시작하지만 집중력이 빠르게 흐트러지고 쉽게 옆길로 샌다).
e. 과제나 활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데에 있어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예: 연속적인 업무를 조직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물건들과 소지품들을 제 자리에 유지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산만한 업무; 시간 관리를 못한다; 마감을 지키지 못한다).
f. 지속적인 정신적 노력이 필요한 일을 시작하는 것을 자주 피하고, 싫어하고,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예; 학업이나 숙제; 레포트를 준비하는 것, 서류를 완성하는 것, 긴 논문을 논평하는 것).

다음 중 최소 6개 이상의 증상이 적어도 6개월 이상 지속되어야 하며, 이러한 증상이 발달 수준에 맞지 않고 사회적, 학업적/직업적 활동에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함.
a. 학업이나 일, 혹은 다른 활동을 하는 동안 세밀하게 집중하지 못하거나 부주의한 실수를 자주 한다(예: 자세한 사항들을 간과하거나 놓치고, 결과물이 부정확함).
b. 과제 또는 놀이를 할 때 지속적인 주의 집중에 자주 어려움이 있다 (예: 강의나 대화, 긴 분량의 독서 동안 지속적인 주의 집중에 어려움을 겪는다).
(…)
d. 지시를 자주 따르지 않거나 학업, 집안일, 직장에서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에 자주 실패한다 (예: 일을 시작하지만 집중력이 빠르게 흐트러지고 쉽게 옆길로 샌다).
e. 과제나 활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데에 있어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예: 연속적인 업무를 조직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물건들과 소지품들을 제 자리에 유지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산만한 업무; 시간 관리를 못한다; 마감을 지키지 못한다).
f. 지속적인 정신적 노력이 필요한 일을 시작하는 것을 자주 피하고, 싫어하고,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예; 학업이나 숙제; 레포트를 준비하는 것, 서류를 완성하는 것, 긴 논문을 논평하는 것).


“자세한 사항들을 간과하거나 놓치고, 결과물이 부정확하다”는 예시나 “시간 관리를 못한다”, “마감을 지키지 못한다”는 예시, “일을 시작하지만 집중력이 빠르게 흐트러지고 쉽게 옆길로 샌다”는 예시가 보인다. 진단 기준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핵심은 ‘현대인으로서 기능을 꾸준히 원활하게 잘하고 있는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ADHD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것은 현대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원활한 기능을 수행해내려는 와중에 그 사람 안에서 계속해서 실패의 경험이 누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들어 크게 증가한 ADHD 환자 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불능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감을 확보하려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조금의 불능도 허용되지 않는 신자유주의,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고기능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통해 계속해서 증명해야 한다. 아니면 경쟁에서 바로 도태될 뿐 아니라 이는 곧 ‘무능’해서 수치스러운 개인이 홀로 책임져야 할 몫으로 떨어진다. 영원히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평가함으로써 자신의 ‘SWOT’[13]을 파악해 스스로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신뢰)해야만 한다. 최근 들어 몸을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 강화하는 헬스장이 특히나 더 성황을 이룬다거나 ‘바디 프로필’이 유행하는 상황 역시 몸에 대한 통제감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유림(2016)은 항우울제를 두고 “현시대의 구조적 힘과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이라고 말한다.[14] 내가 나의 행동 양식을 문제라고 인식한 후 그것을 해결하고자 정신과에 방문하여 ADHD 진단을 받고 콘서타를 처방받았던 일련의 과정을 복기해보면 콘서타야말로 그렇다. ADHD 치료 초기 당시 나에게 콘서타가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증상을 조절하기 위한 치료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은연중에 콘서타를 복용하기 시작하면 내 앞에 놓인 수많은 불확실성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다. 내가 콘서타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그동안은 전혀 느끼지 못했던) 내 삶에 대한 통제감이었다.


그러나 나의 몸을,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번번이 미끄러진다. 콘서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는 새로운 불안을 발굴하게 되었다. 만약 나의 몸에 맞는 용량을 영영 찾지 못한다면 증상과 함께 남겨진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지. 그 이후의 나는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할지. 또 ADHD 탓인지 나는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해본 경험이 없는데, 과연 약을 꾸준히 챙겨 먹을 수 있을지. 새롭게 태어난 불안들을 끌어안은 나의 앞에는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 당장 쏟아지는 수많은 과제들,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겨진 돌봄의 부담이 놓여 있었다. 도파민을 잘 조절한다고 해서 나의 문제를 모두 통제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면 하나 같이 ‘나도 ADHD인 것 같아’라고 했다. 긴 글을 잘 읽지 못하고 해야 할 일에 착수하는 것을 최대한 미루며 매일 딴짓을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ADHD 자격증 보유자로서 친구들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자면 ADHD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의 지루함이나 비효율, 비어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어쩌면 내 친구들도 모두 ADHD일지도 모른다. 효율적으로 잘 기능하는 데 있어서 실제로 다들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모두 겪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의심하는 친구들에게 '너 ADHD 아니야'라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실제로 내가 직접 그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의심에 도달하게 된 맥락- 그러니까 모두 다르지만 크게 보면 공통된 맥락을 각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후기 자본주의 등 갖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지금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일상적인 모순에 부딪히면서도 일정 부분 순응하며 살아가기에 이러한 의심에 도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모두가 ADHD여서, 다 같이 콘서타를 챙겨 먹고 매일 아침 약을 챙겨 먹었는지 서로 물어보는 일종의 자조 모임이 되면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했던 많은 문제들과 고민들은 괜찮아질 수 있는 것일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약물치료에 익숙한 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로 간에 쌓아왔던 수많은 합의들과 맥락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약물이라는 저마다의 해결책을 가지고 각자도생의 세계로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복용하고 한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입 안의 침을 모조리 말려버리는[15] 콘서타는 일상을 지탱했던 우리의 관계까지도 건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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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은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지 출처: pixabay.com) 사람 얼굴의 옆모습을 검은색의 나무가 채우고 있다. 나무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많은 나뭇가지를 가지고 있다. 그림 설명 끝.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몸과 고통에 얽힌 역사, 젠더, 계급, 인종차별, 빈곤, 의료, 돌봄, 자본주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음[16]에도 불구하고, B가 말했듯 진료실에 들어서면 고통은 개인의 문제이자 책임인 것처럼 탈정치화된다.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것이 최소한의 믿음이라고 하더라도)을 가지고 각각의 개인은 병을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할 주체로 호명되고 관리에 실패할 경우 이는 그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문제라고 해서 의사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진공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곳에 사는 나의 몸 역시 온갖 것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정치적 장소다. 정신장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에는, 세상과 불화한 결과로 만들어진 우리의 고통이나 불편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개인화하거나 탈정치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나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사실은 진료실의 문을 바깥으로 열어두어야 한다. 의사도 하얀 가운을 벗은 채 진료실 바깥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 말하고 이 사회가 어떻게 나의 몸을 아프게 하는지 말해야 한다.



4. 정치적 행동 매드프라이드, 그러나 여전히 남은 질문


나는 충동적일 때 많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이 지점은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특성 중 하나다. 나의 충동성은 내가 가진 병으로 인한 증상일 수도, 아니면 내가 상상해내고자 하는, 병과는 무관한 나의 고유한 ‘특질’일지도 모른다. 사실 병 때문이 아니라 고유한 특질이라고 믿고 싶어 할 때가 많다.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특별한 자질, 한국 사회에서 높게 평가받는 자질인 독창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나의 특질과 병으로 유발된 증상은 구분되기 어렵다. 병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나의 특질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병을 가지기 이전의 ‘고유한 나’에 대한 상상은 나의 본질적인 상태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대신 존재하지도 않는 본질적인 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집착하게 한다. 나는 이미 그러한 특성을 몸에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본질적 특질과 사후적 특성을 구분하는 것은 이미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나의 본질적 특질이라는 것을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정신질환 치료가 현재 나의 상태를 병리화하고 ‘건강한 정신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두기 때문이기도 하다. 건강한 정신 상태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현대 의학은 ‘표준적·평균적 정신 상태’를 그 판단기준으로 삼는다.[17] 장애운동에서는 이러한 정상성 개념을 오랫동안 비판해왔고, 그 움직임 중 하나가 바로 ‘매드프라이드’다. 매드프라이드 운동은 “손상된 몸과 다른 정신상태를 가진 나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움직임(유기훈, 2021)”이다.


매드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하기 위해 광장 근처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는 정신장애인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이길 원한다’고 외쳤다. 이들은 광장을 향해 침대를 밀고 나가며 행진을 이어갔다. 이 침대는 이들의 몸을 지역사회로부터 격리하고 교정하려 했던 정신병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침대와 함께 매드프라이드의 상징인 ‘마르꼬 까발로’도 행진에 나섰다. ‘마르꼬 까발로’는 이탈리아어로 ‘파란 목마’를 의미하는데, 본래 정신병동에서 빨래를 싣고 다니는 데 쓰이던 것이 1980년대 정신장애인들의 해방운동을 통해 이탈리아의 모든 국립 정신병원이 폐쇄되면서 그 역시도 자유를 맞이했고 이후 정신장애인 자유의 상징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18]


[그림5] 마르꼬 까발로.jpg

2019년 10월 열린 ‘매드프라이드 서울’에 등장한 마르꼬 까발로 ⓒ박승원 대낮 거리에서 두 명의 매드프라이드 진행자가 거대한 파란색 목마 마르꼬 까발로를 옮기고 있다.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정상적인 상태를 상정해두고 지금의 나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것, 나의 특성 중 일부를 증상으로 병리화하는 것, 나를 정상적인 상태 – 다시 말해 지금의 체제에 부합하는 ‘반듯한’ 몸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것. 정신장애인들이 거리에 나와 ‘내가 정신장애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기까지에는 이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거부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면서 자신을 규정했던 언어를 바꾸고자 하는 데에 이른다. 정신병을 낙인으로 만들어 정신장애인들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사회에 ‘왜 정신병자라는 말이 모욕이 되었는지’ 되묻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과연 정신병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 더 나아가서 정신병으로 규정되는 나의 일부가 왜 문제가 되는 지에 대해 질문한다. 그렇게 정신병은 더 이상 낙인이 아니라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정체성 중 하나가 된다.


매드프라이드에 따르면 ADHD의 증상으로 묶이는 나의 여러 행동 양식 역시 어떠한 증상이나 결함이 아니라 나를 나답게 만드는 고유함이다. 사회의 정상성은 나의 고유함을 결함으로 만들고, 그것이 제거된 상태에 도달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환상에 가까울 뿐 아니라, 무엇보다 현재 나의 상태를 결함 없는 몸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보는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나를 규정하고 구성하고자 하는 정상성이 틀렸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나는 그저 나일 뿐이라고 외침으로써 도달해야 할 정상성이라는 목표는 사라진다.


그러나 광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자취방 현관문을 연 내 앞에는 정리가 되지 않아 쓰레기장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펼쳐져 있고 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무언가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것 같은데 알 방법이 없어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아서 허망하게 서 있다. 언젠가 나의 지각과 푸틴이나 윤석열의 지각이 동일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 나의 지각은 결격 사유가 되는 한편 푸틴이나 윤석열의 지각은 일부러 그런 것이든 아니면 정말 병 때문에 그런 것이든, 남성적 권력을 표현하는 방법이 된다는 점에 화가 났던 적이 있다. 그런데 어쩌면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을 경유하지 않을 때에도 내 문제는 진짜 문제일지도 모른다. 물론 정상성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겠고, 진단 기준이나 진단을 내리는 의사들 대부분이 편향된 것이 맞고,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앞에서 시간을 들여 서술했던 내용과는 배치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정상성이라는 목표가 사라진 상황에서 내가 겪는 문제와 고통은 어떻게 이야기되고 해결될 수 있을까? 정상성이 문제라는 말은 슬프게도 내가 당장 직면한 수많은 우스꽝스럽고 심각한 실수들과 고통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반면 콘서타와 아빌리파이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적절히 수행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5. 화학적 사이보그의 대답


투약을 새롭게 해석하기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엇을 ‘정신병’이라고 규정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사회의 정상성이 그것의 기준이 된다. 또한 동시에 실제로 정신장애의 증상들을 만들어내는 현실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신병을 둘러싼 사회 구조적 맥락이므로 고통을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 고통을 개인화하려는 정신의학에 대항하여 정치화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매드프라이드다. …모두 필요한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당장 내가 나의 몸으로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나에게 정신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내가 교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불쾌해했다. 적절한 양의 콘서타를 찾아서 잘 복용하면 잘 기능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 텐데, 기업가적 주체에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도 되는 것인지 불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는 데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때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 나의 어려움에 도움을 준 것은 콘서타와 아빌리파이였다. 실제로 많은 ADHD 당사자들은 콘서타 복용을 ‘시력 낮은 사람이 안경을 쓰는 행위’에 비유하기도 한다. 진공의 공간이라고 착각되는 곳에서 주로 백인 남성들이 만들어낸 정신의학은 실제로 일상적 제한과 고통을 경감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정신장애와는 또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지만, 신체장애 당사자들의 사례도 잠깐 살펴보자. 신체장애 당사자들은 휠체어나 인공보철 등과 함께 살아간다. 그것들은 법적으로는 ‘장애인 보장구[19]’라고 불리지만, 신체장애 당사자들의 삶에 있어 이러한 기계 장치들이 단순히 자신의 활동을 보조하는 도구로만 감각되는 것은 아니다.[20] 휠체어를 타거나 의족을 착용하는 것은 나의 몸을 기계와 결합하여 확장된 몸, ‘사이보그로서의 몸’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21] 그렇다면 정신장애 당사자가 약물을 복용하는 것도 이것의 연장 선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유기훈(2021)은 신체장애 당사자가 휠체어를 상황에 따라 바꾸어 사용하듯, 약물 역시 나의 몸에 대한 “새로운 화학적 결합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약물은 어쩌면 정신장애 당사자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화학적 사이보그’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 1985)」에서 사이보그를 페미니즘의 새로운 주체로 제시했다. 주로 백인 남성들에 의한 생산물이자 가치 중립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과학기술을 거부하지 말고, 오히려 이것과 결합하여 사이보그가 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허무는 사이보그는 그가 가진 잡종성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이 기반을 두고 있는 이분법의 세계에 균열을 낼 수 있다. 이분법의 세계는 잡종성을 두려워한다. 정신의학 역시 백인 남성 중심의 관점에서 정신장애를 규정하고 교정하려 들지만, 투약을 “몸/뇌와 약물의 결합”으로 바라보게 될 때 나는 더 많은 정신 상태와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포기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선택하여 전통적 정신의학이 전제하는 것들을 전복해보는 일이다.[22]



행위성을 가진 주체로서의 화학적 사이보그


정신병을 가지고 사는 삶은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매일 매일 다른 방식의 어려움에 마주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을 가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능력주의 사회의 어떤 부분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있다. 모두가 나태와 무능, 의존성을 ‘적폐’로 지적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사회에서, 정신병자’들의 나태·무능·의존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 어쩌면 발굴하고 지향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병자’들은 구조 속에 놓인 동시에 모두 행위성을 가진 주체들이기도 하다. 이 지점으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 나의 문제를 진료실과 정신병동 안으로 축소해 개인화하려 드는 정신병 교정의 권력을 전적으로 거부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의 도움을 받아 바깥으로 향하는 새로운 상상을 만들어보자. 내가 하는 상상은 불명확하고 유보적인 태도와 긴 호흡을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대안적 관계들을 만들고, 이것을 기반으로 꾸준한 움직임과 균열을 만들어내는 일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아빌리파이가 말하는 ‘사회적 적응’은 비로소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돌고 돌아 글의 마지막에 도착했다. 이 글을 쓰고자 마음먹은 것은 결국 이 마지막 부분, 화학적 사이보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였다. 지난하고 막막하고 긴 과정이었다. 글을 완성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아득하고 어지럽기만 했다. 그럼에도 여러 도움을 받아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는 콘서타와 아빌리파이의 도움도 있었고, 나의 회피적인 성향과 나태까지도 견뎌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무능과 의존성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위원 숙영 / sonsy213@gmail.com



[1] 4차 개정판까지는 로마자로 표기되었으나 5차 개정판부터는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된다. 이후의 개정을 활발하게 하겠다는 미국정신의학회의 의지의 표현이다.

[2] 최윤경 (2010). 205.

[3] Hartung·Widiger (2019). 390-409.

[4] Kaplan (1983), 최윤경 (2010). 208에서 재인용.

[5] Kaplan, 1983, 최윤경 (2010) 214.에서 재인용.

[6] 하미나 (2021).

[7]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지점이 있다. 남성중심적 관점에 의해 여성의 히스테리 증상들이 과도하게 병리화, 개인화된 것은 맞지만 당시 여성들이 겪었던 증상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여성들은 실제로 아팠다. 여성 환자들은 ‘꾀병’이라는 의심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증상에 마땅한 이름을 붙이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증상들에 모두 히스테리라는 한 가지의 이름만을 붙일 수 있었다. 여성이 이야기하는 자신의 ‘주관적인’ 증상은 객관적인 증거로 입증되기 전까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의사조차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8] 마야 뒤센베리 (2019) 101.

[9] Howell (1981), 최윤경 (2010) 209.에서 재인용.

[10] 하미나 (2021).

[11] 신현영 의원실 (2021), 한겨레 (2021.10.01.)에서 재인용.

[12] 많은 전문가들은 이러한 증가 추세의 원인으로 “뒤늦은 발견”을 꼽는다(한겨레 (2021.10.01.). 나도 20대 초반에 들어서고 나서야 나의 ADHD를 뒤늦게 발견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엄마에게 ‘나 ADHD인 것 같아’라고 처음 말을 꺼냈을 때, 엄마는 수십 년의 경력 동안 있었던 몇몇의 남자 초등학생들을 떠올리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너는 ADHD 절대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엄마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그동안 ADHD의 증상 유형인 부주의 우세형, 과잉행동/충동 우세형, 복합형 중에서 과잉행동/충동 우세형만 강조되면서 ADHD가 ‘남자 초등학생들이 주로 앓는 질환’으로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들도 주로 남자 초등학생들을 표본으로 삼았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여성 ADHD 환자들이 소아·청소년기에 적절한 진단을 받지 못해 발견되지 않다가, 성인이 되어서야 뒤늦게 그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13] SWOT은 강점(Strength), 약점(Weakness), 기회(Opportunity), 위협(Threat)의 머리글자를 모아 만든 단어로, 조직 내부와 외부의 상황을 고려하여 효율적인 경영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분석 도구이다.

[14] 이유림 (2016). 109-110.

[15] 내가 경험한 콘서타의 여러 부작용 중 하나이다.

[16] 앤 보이어 (2021).

[17] 유기훈 (2021.09.14). 비마이너.

[18] 최한별 (2015.12.04). 비마이너.

[19] 保障具, 장애인들의 활동을 도와주는 기구라는 뜻이다.

[20] 김원영·김초엽 (2021).

[21] 유기훈 (2021.06.24). 비마이너.

[22]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전통적인 정신의학 접근이 정신장애 당사자를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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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 해러웨이 (2019).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번역). 책세상.

마야 뒤센베리 (2019).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김보은 외 (번역). 한문화.

신지수 (2021).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휴머니스트.

앤 보이어 (2021). 언다잉. 양미래 (번역). 플레이타임.

임소연 (2014). 사이보그로 살아가기. 생각의 힘.

하미나 (2021).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동아시아.


논문 및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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