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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OB베어 : 만선이 빈곤이 된 사회에 대하여

[칼럼] 편집위원 기영

종일 땅을 파고 건물을 부수는데도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공사가 끝난 뒤 사소하게 놀라고 말 것이다. 이 난장판을 금세 잊을 것이다. 이 도시 사람들은 뭔가 뜯고 부수고 갈아 치우는 데 익숙해져 있다. (김혜진, 중앙역)

 

2020년 가을을 생각한다. 그때 나는 풍물패를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하여 30년 전통을 자랑하던 풍물패가 말 그대로 문 닫을 위기에 놓이게 됐었다. 그래도 동아리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공연이라도 하기로 하였다. 원래대로면 9월에는 해야 했을 공연을 확진자 수가 줄어들기를 바라며 11월로 미룬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연 전 주에 확진자 수가 폭증하면서 공연 일주일 전 모든 것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의 허망함을 잊지 못한다. 그런 종류의 감정은 잊힌다기보다 몸에 새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을지로로 갔다. 술은 많이 마셔야 하고 안주는 딱히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술만 많이 시켜도 눈치 보이지 않는 시끄러운 노상에 자리를 잡았다. 몸에 받지도 않는 소주를 마시고 엉엉 울다 지하철역 화장실에 가 다 토해버리고 나왔다. 그때도 노가리 골목의 사람들은 넘쳤고 원래 가려했던 을지OB베어는 앉을 자리도 없어 앞집인 뮌헨에 가야 했을 정도였다.


나는 술에 취해 정신도 못 차리는 와중에 ‘강제집행 문제는 해결된 건가’하는 생각을 했다. 괜한 믿음이 있었던 거 같다. 이렇게 장사가 잘되는데 저렇게 분위기가 좋은데 어쩌면 큰일은 없지 않을까. 어쩌면 풍물패처럼 아무것도 손에 안 남고 사라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 아닐까. 내가 술을 마신 날로부터 2주 전에는 을지OB베어의 첫 번째 강제집행이 있었지만, 노가리 골목은 여전히 시끄러웠으니까. 평온한 시끄러움이 넘쳤으니까.

그러니까 큰일은 보통 그런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일. 이를테면 용역 깡패 수십 명이 새벽에 들이쳐서 기물을 다 때려 부순다든지. 세입자는 이겨야 본전인 싸움에 생명을 걸고 매달려야 한다든지. 그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그 거리의 역사에 대해 무지해지는 일 같은 거.

 

을지OB베어 자본의 타임라인

을지OB베어는 1980년에 문을 열었다. 이렇게 오래된 노포의 고유한 역사를 종이 몇 장에 정리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다음 타임라인은 을지OB베어의 타임라인이 될 수 없다. 을지OB베어의 역사가 몇 차례의 강제집행과 명도소송으로 요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래의 내용은 을지OB베어의 역사가 아닌 자본에 의한 도시개발의 타임라인으로 읽어주시라. 자본의 개발은 우리 삶의 다채롭고 풍성한 이야기를 단지 부동산의 이야기로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2018~2019년은 명도소송 과정의 이야기로, 2020년~2022년은 강제집행 이후의 이야기로 요약 정리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얼마나 파괴되었는가’가 기준이 되는 시간의 분할이라는 것이 적절한가 싶기도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파괴하였는가’를 기록하는 것이 4월 21일 강제 철거 이후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림 설명 시작. 을지OB베어 사장님 부부가 강제철거된 을지OB베어 가게 앞에 서있다. 문닫은 가게에는 회색빛 철창이 내려져 있고 그 위에는 ‘상생하라’, ‘대화하라’와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이 여러 개 붙어 있다. 그림 설명 끝.


2018년과 2019년: 명도소송

을지로3가역 4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나온다. 바깥으로 즐비한 인쇄업소 사이 안쪽에는 반짝이는 맥줏집과 노상에서 웃고 마시는 손님들이 보인다. 이는 2017년 중구청이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이 일대의 옥외영업을 허용하며 가능해진 풍경이다.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단골손님들만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지만 정식으로 노상 음주가 가능해지자 젊은이들과 주변 직장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림 설명 시작. 을지OB베어가 강제철거되기 이전인 2019년의 골목의 풍경이다. 날이 저물어 따닥따닥 붙어있는 맥줏집들 사이로 6~8인이 앉을 수 있는 노상이 골목 양쪽으로 놓여져 있다. 코로나19 이전이라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테이블마다 생맥주를 시켜놓고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노상이 많다보니 가운데에는 사람 2-3명이 겨우지나갈 정도로 협소하다. 사진의 맨앞 좌측에는 을지OB베어가 있으며 그 뒤로는 ‘만선호프 본점’을 비롯한 만선호프가 쭉 이어져 있다. 그런데 사실 만선호프 본점은 진짜 만선호프 본점이 아닌, 을지OB베어를 견제하기 위해 붙인 가게명일 뿐이다. 그림 설명 끝.


그리고 2018년 을지 OB베어는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백년가게로 선정되었다. 노가리 골목의 호황으로 을지로는 더이상 중장년층만이 오는 곳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이색적인 나들이 장소가 되었고 ‘힙지로’라는 별명을 얻었다. 골목이 인기를 얻자 오래된 인쇄상가 2층에는 ‘감성’ 카페들이 군데군데 생겨났다. 딱 봐도 2-30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간판들이 넘치는 거리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아인슈페너라니!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맥주라니!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부시고 새로 짓는 것이 일상인 서울에서 을지로는 부서지지 않은 것들이 켜켜이 쌓여,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폭이 넓은 동네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 시기 시가지 모양이 남아있는 땅 위에 한국전쟁 직후 형성된 공구거리가 하나의 생태계로 자리 잡고 있고 그 상인들을 위한 식당이니 술집 등이 노포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곳. 그리고 그러한 생경한 모습에 일종의 ‘멋’을 느껴 모여든 젊은이들까지 하나의 퇴적층처럼 쌓여 을지로만의 분위기를 만든다. 그 분위기가 사람들이 ‘힙지로’라고 부르는 것의 근원일 것이다.


그림 설명 시작. 좌측은 철거되기 이전 을지OB베어에 붙어있던 백년가게와 서울미래유산 현판이다. 백년가게는 흰색 배경에 적혀있으며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지정했음이 나와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시에서 지정했으며 동색의 현판에 ‘을지로 노가리 골복-서울미래유산’이 적혀있다. 우측은 철거 이후 모습이다. 을지OB베어가 철거되며 두 현판 모두 같이 제거되었지만 백년가게 현판의 경우 A4용지로 인쇄해 테이프로 벽면에 붙여놓았다. 그림 설명 끝.


아! 하지만 이렇게 활기찬 2018년에도 분명 찜찜한 구석은 있었다. 노가리 골목 맞은편에 있는 공구 거리는 이미 2006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설정되었고 2018년에도 재개발 문제가 불거지면서 입점 상인들은 내쫓길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는 어느 순간부터 만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호프집이 너무 많아졌다.


 만선호프는 2015년부터 공격적으로 매년 하나씩 점포를 늘려갔다. 만선호프 사장이 보기에 을지로는 ‘뜨는 곳’이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맥줏집들은 각각의 고유한 메뉴와 맛을 지키며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다. 그러나 점포 하나로 어느 세월에 떼돈을 벌겠는가. 만선호프가 매년 점포를 늘렸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어떤 맥줏집은 사라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선호프 사장은 때로는 임대인과의 협상을 통해,  때로는 건물 매입 등을 통하여 점포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림 설명 시작. 2022년 4월 21일 을지OB베어의 강제철거일에 촬영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모습이다. 하지만 사진의 좌측과 우측에서 보이는 것은 만선호프의 간판 뿐이다. 좌측에는 검정 배경에 LED 전등을 켠 ‘만선호프 7호점’이 있으며 우측에는 노란 간판의  ‘원조 만선호프 2호점’이 있다.  그림 설명 끝.


2018년 9월 초 을지OB베어의 건물주는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명도소송을 제기한다. 계약 기간은 2018년 10월 30일까지인 상황에서의 통보였다. 40년간 장사하던 곳에서 나가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물론 법적으로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 정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지 않을까.


 을지OB베어 사장에게 을지로 골목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수익을 얼마나 낼 수 있느냐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손님들과 만들어온 가게의 역사를 지키고자 임대료를 두 배 주겠다는 제안까지 하였지만, 이미 건물주는 만선호프와 계약을 해버린 상황이었기에 소용이 없었다. 만선호프는 그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하나씩 주변 호프집들의 자리를 뺏으며 점포를 늘려왔다. 그리고 을지OB베어의 차례가 온 것이었다. 을지OB베어는 2020년 10월 상소와 상고를 거쳐 대법원에서 기각 결정이 나면서 법적으로 가게를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2020년 이후: 강제집행

2022년 4월 21일의 강제 철거 이전까지 을지OB베어에는 총 5번의 강제집행 시도가 있었다. 첫 번째는 2020년 11월 3일이었다. 이날 오전 9시 50분경 강제집행을 위한 철거 인력 10여 명이 왔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4~50명의 단골들은 가게 앞으로 찾아와 집행 시도를 무산시켰다. 


이어 2021년 3월 10일에는 두 번째 강제집행이 예고되었다. 이번에도 해당 소식을 들은 시민단체 회원들과 주변 상인 40여 명은 오전 7시 30분부터 가게 앞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10시부터 용역 100여 명이 강제집행에 나섰지만, 시민 측의 거센 저항으로 건물주 측은 오후 1시경 철수한다.


이어서 2021년 4월 26일과 6월 29일에도 강제집행이 허가되었지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2021년 8월 23일에는 마지막으로 실패한 강제 집행 시도가 있었다. 이날도 건물주 측이 고용한 사설 용역 20여 명은 오전 9시 30분경 을지OB베어 강제집행에 나섰으나 시민단체와 주변 상인들은 강제 철거를 막아내었다.


“용역이 오면 시민이 막았다.” 말로 요약하면 한없이 밍숭맹숭해지는 이 레퍼토리가 을지OB베어에서는 매일 반복되었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 언제나처럼 손님들은 즐겁게 지냈다. 옥외 영업을 금지당하는 듯 종종 부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을지OB베어를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에 하루에 하루씩 영업일을 늘려간 시간들이었다. 마치 지난 40년이 그랬던 것처럼. 


그림 설명 시작. 시민들의 연대로 무산된 2021년 3월 10일 을지OB베어 강제집행 현장의 모습이다. 사진의 상단에는 을지OB베어 가게가 있으며 가게를 등지고 시민들 10여 명이 서있다. 몇 명을 피켓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기도 하다. 시민들 앞으로는 용역을 막기 위해 승용차 2대가 연이어 세워져 있으며 승용차 틈 사이에도 용역과 시민들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승용차 바깥으로는 100여 명의 용역들이 모두 같은 회색 후드 바람막이를 입고 을지OB베어를 향해 서있는 상황이다. 승용차 위에도 한 명의 시민이  서있다. 그림 설명 끝.


을지OB베어는 2022년 4월 21일 진행된 강제집행으로 철거되었다. 을지OB베어는 상시적인 강제집행의 위협때문에 항상 3~4명의 활동가가 가게를 지켜왔지만 이른 새벽 몰아닥친 불법 용역 100여 명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동도 안 튼 새벽 4시. 100여 명의 용역은 1시간 만에 을지OB베어의 간판을 끌어 내리고 내부 집기류를 압류해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을지OB베어가 명도소송에서 패소하는 사이인  2022년 1월 만선호프 사장은 을지OB베어의 건물주가 되었다. 만선호프 사장이 건물주가 되면서 만선호프와 을지OB베어 양측은 보증금과 임대료를 인상하고 만선호프가 을지OB베어를 강제 집행하느라 사용한 금액을 대신 배상하는 대신 계속 장사할 수 있도록 상호합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 소유 부지에 화장실 지을 공간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다시 불거졌고 끝내 강제집행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림 설명 시작. 4월 21일 동도 안 튼 어두운 새벽 100 여명의 용역이 강제집행을 진행하고 있다. 용역들은 모두 형광색 조끼를 입고 있으며 을지OB베어를 완전히 둘러쌌다. 사진의 중앙에는 용역이 을지OB베어를 지키고 있던 활동가를 바닥으로 밀치며 제압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어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어요

그래, 맞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물주가 나가라면 나가야지 별수 있냐. 4월 21일 강제집행으로 인하여 을지OB베어는 철거되면서 이제 지도 앱에 ‘을지OB베어’를 검색해도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활동가와 을지OB베어를 기억하는 시민들은 여전히 매일 밤 각종 문화제와 행진, DJ 공연 등으로 을지OB베어 앞을 지키고 있다. 만선호프를 향해 외친다. 상생하라고. 그리고 을지 노가리 골목에 선선한 초여름 밤을 즐기기 위해 나온 손님들을 향해 외친다. 만선만은 불매하라고. 당신이 만선에서 소비한 돈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 골목을 망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고.

그림 설명 시작. 을지OB베어가 철거된 4월 21일 저녁에는 긴급 연대 기도회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노가리 골목을 찾았다. 좌측의 사진은 을지OB베어의 강제집행 상황을 정리한 전단의 표지이다. 표지에는 그날 새벽 진행된 강제집행 현장 사진이 배경으로 ‘을지오비베어 야간강제집행을 규탄하는 긴급 연대 기도회-4/21(목) 저녁 7시 30분 을지OB베어 앞’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우측에는 긴급 연대 기도회에 참여한 시민이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찾은 시민들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 설명 끝. 


노가리 골목을 즐기러 온 손님들은 이 시끄럽고 신나고 끈질긴 문화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즐긴다. 시원한 맥주에 즐거운 음악이 덧붙여지니 딱히 나쁜 것은 없는 까닭이다. 또한 을지OB베어에서 나눠준 유인물을 받은 사람들은 이 상황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남긴다. 가장 흔한 평가는 대략 이런 것인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혹은 좀 더 냉정하게 이렇게 말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이미 끝난 일 아니야?” 혹은 “그동안 돈 번 걸로 건물도 안 사고 뭐 한 거야?”


피케팅에 참여했을 때 지나가던 한 시민분은 나에게 자본주의란 무엇인지를 10여 분간 설명해주시기도 했다. 자본주의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렇게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였다. 그래서 “수정 자본주의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게요. 상황이 참 쉽지 않네요.” 10여 분간의 대화는 각자가 생각하는 문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시민 분은 내가 건네드리는 유인물을 받으신 뒤 유유히 골목을 나가셨다.


참 쉽지 않다. 강제집행 이후의 시간이 길어지며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을지OB베어의 강제집행은 ‘안타까운’ 일이 맞을까? 우리는 누군가가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지만 해결할 방법이 묘연할 때 안타깝다고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을지OB베어의 강제집행은 ‘안타까운’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건물주가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 것이 처벌받을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로 인해 오랫동안 을지로 인쇄골목을 지켜온 을지OB베어가 사라진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래 그러면 이 모든 일련의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하나의 안타까움으로만 남으면 되는 것이다. 마치 동전 지갑을 지하철에 놓고 내린 친구에게 건네는 말처럼. “안타깝다.”


그런데 을지OB베어의 강제 철거는 안타깝기만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일도 아니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지향이기도 하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소유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당한 문장일 수 있지만 그것이 소유권만이 보장되는 세계를 만들자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집이 없어도 집은 필요하고 돈이 없어도 밥은 먹어야 한다. 그런 것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 않는가. 죽는 것도 선택이라고 말하지는 말아야겠다.

 

① 세입자는 정말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것일까? 

세입자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자. 세입자는 세를 내고 남의 집이나 방 따위를 빌려 사는 사람이다. ‘빌린다’에 초점을 맞추면 장소는 상품이 되지만 ‘산다’에 초점을 맞추면 그 장소는 집이 된다. 임대인은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임대인의 결정이 임차인의 기본권 및 생존권과 반할 때 조차 그 모든 권리가 온전하게 보장받아도 되는 것일까? 우리는 자유의 범위는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수준까지’라고 배웠다. 나의 권리 행사가 타인의 권리에 반한다면 그것은 법적으로 조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토지의 소유관계에 대하여 급진적인 비판이나 변혁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에서 임대인의 권리가 과도하게 보장되고 있다는 비판은 아주 가능하다.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과도한 임대료를 요구하거나 내쫓을 권리까지 있다는 것은 결코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과 일본의 사례를살펴보자. 독일은 양차대전을 거치며 심각한 주택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민간자본이 주택공급을 주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민간 임대시장에 대해서는 강한 규제정책을 시행해 왔다. 우선 임대 기간에 있어 독일은 기간을 정하지 않은 무기한 임대차가 원칙이다. 아주 특별한 계약 해지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세입자는 기간의 제한 없이 계속해서 거주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 세입자의 평균 주거 기간이 12.8년인데, 이는 세입자라고 하더라도 안정적인 주거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임대료 조정에서도 제한받는다. 임대인은 15개월마다 임대료 인상을 요구할 수 있는 그 기준은 국가에서 정한 표준임대료를 따르는 등 임대료 급등을 막기 위한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차지차가법이라는 특별법을 통하여 임대차를 규율하고 있다. 차지차가법은 임대인의 갱신 거절 또는 해약신청에 정당한 사유가 있는지를 판단하여 정당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임대차계약이 종료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임대료의 경우 당사자 간 자유롭게 정한다. 다만 임차인에게는 임대료의 증감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인 차임증감청구권을 인정하고 있는데 장기임대차를 전제로 하는 일본의 경우 차임증감청구권 행사가 실제로 제 역할이 가능한 편이다.


해외의 사례가 좋으니 이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소유권의 범위와 적용은 영구한 것도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소유권이 우리가 가진 권리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어요’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환원론적 설명에 그치는 것 아닌가?


을지OB베어에 대한 첫 번째 강제 집행이 있었던 2020년 하반기는 공교롭게도 세간의 모든 이목이 부동산에 몰렸던 시기였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여러 가지 부동한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중 하나가 임대차 3법이었다. 개정된 임대차 3법이 실제로 주거 안정에 도움을 주었는지는 보다 면밀한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세입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입법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자명하다. 우리는 세입자이기 전에 시민이다. 우리의 지향은 내 집 마련이 아니라 세입자로 평생 살아도 내쫓길 걱정 없는 사회여야 한다. 


② 문화는 무슨 문화

현재 을지OB베어 피케팅 현장에서 눈에 띄는 구호가 하나 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 물론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있는 각각의 가게에는 건물주가 존재한다. 땅과 건물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가게는 건물주의 것이 맞다. 그러나 밀집되어있는 가게들 사이에 노상을 깔고 저렴한 가격에 생맥주와 안주를 먹을 수 있는 문화까지 특정 업주의 소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그 골목을 찾게 된 역사와 기억까지 소유주의 몫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노가리 골목을 닳도록 다닌 시민들의 몫이며, 임대한 사업장이지만 그 공간만의 문화와 매력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한 임대사업자의 몫이다.


을지OB베어의 강제집행을 규탄하고 연대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을지OB베어를 등지고 피케팅을 하고 있다. 그들의 피켓에는 ‘을지로노가리골목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노란색 보드지에 직접 손으로 적은 ‘이웃 내쫓는 만선불매’라는 피켓도 있다. 그림 설명 끝.


미안하지만 우리가 을지로에 가는 이유에 맥주의 맛만 있지는 않지 않은가. 무엇이 을지로로 사람을 모이게 하였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42년 전, 을지OB베어는 주변 인쇄업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을지OB베어 뒤로 하나둘 맥줏집이 늘어갔다. 노가리 골목이 만들어진 이유인 인쇄업도, 공구 거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노가리 골목이 노가리 골목이기 전부터 가게를 창업하여 그 골목의 문화를 만든 을지OB베어도 사라졌다. 지도에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라고 떡하니 붙어 있지만 이제 그곳에 남은 것은 마늘 치킨을 주력으로 하는 만선 1.2, 3, 4, 5, 6, 7…뿐이다. 그럼 을지로에는 이제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생맥주 한 잔만이 남는다. 그곳에 가고 싶은가? 당장 1, 2년은 모르겠다. 그런데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만선만 있는 그 골목에 ‘힙’이 남아 있을까. 우리는 이미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유행처럼 붙은 뒤에 임대료가 비싸져 프랜차이즈 가게들만 빽빽이 남은 수많은 골목을 보지 않았나. ‘거기 요즘 예전 같지 않더라.’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쯤 만선 사장은 떼돈을 벌었을테니 그 골목이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부동산 이익까지 알차게 챙기고 나간다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 골목에 알량하게 남는 것은 생맥주뿐이 아니다. 텅 빈 공간에는 흔하디흔한 생맥주와 갈 곳 잃은 시민들도 덩그러니 남는다. 10년 뒤에는 또 다른 ‘힙’한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니 괜찮은가. 정말 이 도시에 ‘힙’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아! 올해 영업이 종료되는 것은 을지OB베어 뿐은 아니다. 1989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뮌헨호프도 오는 9월 문을 닫는다. 재개발 예정지인 수표도시환경정비구역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는 찜찜함들

을지OB베어에서는 오늘도 투쟁 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집회 현장은 일종의 축제다. 환희의 장소이다. 나와 다르지만 같은 주장을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춤추고 노래하며 투쟁을 외친다. 그러나 왁자지껄한 술자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닥치는 우울감처럼 반복되는 집회를 마치고 타는 지하철 안에서는 해결되지 못하는 찜찜한 마음이 남는다. 어쩌면 이런다고 바뀔까 하는 회의의 마음일 수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느냐는 반성일 수도 있겠다. 사실은 둘 다인 거 같다.


그림 설명 시작. 6월 13일(월)부터 19일(일)까지 을지OB베어의 투쟁일정을 정리한 홍보물이다. 6월 13일(월) 저녁 8시-심야라디오(with 나동). 6월 14일(화) 저녁 8시-거리강연회(with 최인기 작가). 6월 14일(수) 저녁 8시-현장예배(with 옥선). 6월 15일(목) 저녁 7~11시-만선호프 규탄 피켓 선전전. 6월 17일(금) 저녁 8시-을지OB베어와 함께하는 음악회07. 6월 18일(토) 저녁 8시-Music with Eulji OB Bear 09. 6월 19일(일) 저녁 7시-연대하는 채식인 모임. 그림 설명 끝.


① 백년 가게니까?

자부심은 점점 낯선 개념이 된다. 자부심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된 것에 대하여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다. 뭐든 유연화하고 보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부심을 가질 만큼 꾸준하고 뚝심 있게 살지 못한다. 어쩌면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생산수단과 노동자가 분리되면서 발생하는 인간종 스스로부터의 소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장인 정신을 쌓은 사람들을 보면 공감보다 낯섦의 감정이 앞선다. 그런 자부심은 현대인의 것은 아닌 거 같기 때문이다.


을지OB베어 사장님은 숱한 발언과 인터뷰에서 을지OB베어의 생맥주를 자랑하신다. 그 모습에서는 단단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을지OB베어의 맥주는 냉각기를 사용하지 않고 케그(맥주 통)를 통째로 냉장숙성한다. 여름에는 2℃, 겨울에는 4℃. 공간과 시간을 많이 차지하는 방법이지만 부드럽고 서늘한 맛을 위해 지키는 원칙이라고 한다. 노가리 소스 레시피는 아직도 창업주 강효근 씨와 딸 강호신 씨만 알고 있다. 노가리는 반드시 연탄불에 손으로 굽는다. 언제나 1도 화상을 입은 손가락 끝은 사장님의 훈장이 되었다. 음식 맛 외에 지키는 원칙들도 여럿이다. 가게를 넓히지 않고 지금 위치를 유지하는 것, 노가리 가격 천 원을 지키는 것, 외국인 종업원이 아닌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것, 안주 개수를 무리해서 늘리지 않는 것, 열 시 반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열한 시에 문을 닫는 것까지 심지어 열한 시까지 영업하는 것도 창업주 강효근 씨에게 사정하여 열 시에서 간신히 늘린 것이라고 한다.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게 집에 들어가라는 것이 취지였다.


나는 맥주 맛은 잘 몰라 그런지 (가장 좋아하는 맥주가 카스라고 하면 열의 아홉은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카스는 싸고 맛있는걸.) 을지OB베어의 맥주가 유달리 맛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맥주의 ‘맛’만 따진다면 내로라하는 수제 맥줏집도 골목마다 생긴 것이 요즘이다. 또한 가격만 따진다면 값싼 프랜차이즈 맥줏집을 가면 그만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을지OB베어를 찾는 이유가 생맥주의 맛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자부심 넘치는 사장님이 주는 믿음이 있었던 거 같다. 사장님의 맥주와 가게에 대한 철학은 여러 번 들은 나머지 나도 이제 친구랑 을지OB베어를 갈 때면 시시콜콜 설명해주던 그런 것이었으니까.


강제 철거가 이뤄진 당일에 열린 문화제에서도 사장님은 을지OB베어의 역사와 생맥주에 대하여 핏대를 세우며 발언하셨다. 백년가게로 선정되기까지 한 을지OB베어가 없어지는 것이 말이 되냐고. 이제는 함께 노포가 된 뮌헨 사장님이 처음 장사를 을지OB베어 앞에서 시작할 때 맥주를 팔아도 되느냐라는 물음에 ‘함께 잘해봅시다’라고 1대 사장님이 말씀하시며 상생의 가치를 말씀하신다. 사장님은 을지OB베어의 역사에서 을지OB베어가 사라지면 안 되는 이유를 찾는다.


처음 을지OB베어의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이와 같은 얘기를 들으며 일종의 어지러움을 느꼈던 거 같다. 그렇다면 백 년 가게가 아닌 임대사업자는 무슨 구호를 외쳐야 할까? 그런 사업장은 너무 많아서 어떻게 사라지는지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텐데. 자영업자의 평균 영업 기간은 2.1년. 대부분의 자영업자가 건물을 임대해 영업하는 임대사업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재계약 기간이 2년인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을지OB베어와 연대하는 까닭이 을지OB베어의 유구한 역사에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 곤란함을 느꼈던 거 같다.

물론 모든 운동의 계기를 논리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가게마저 세입자라는 이유로 당장 가게를 비워야 하는 상황은 사회의 모순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백년가게라는 호칭 자체를 정부에서 부여한 만큼 그 말 자체가 정부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백년가게 하나 못 지키면 앞으로 을지OB베어만큼 유명하지 않은 가게들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은 타당하지만 동시에 부족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당장 을지OB베어의 구호는 상생과 불매이기 때문이다.

그림 설명 시작. 좌측에는 ‘건물주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라고 적힌 피켓이 의자에 고정되어 있다. 우측에는 사람이 ‘을지OB베어 내쫓는 만선호프 불매!’라고 적힌 피켓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리고 있다. 그 뒤로는 ‘원조 만선호프’ 간판이 있다. 그림 설명 끝. 


② 상생은 무력하다

‘을지OB베어 공동대책위원회’는 5월 11일 오전 11시 을지OB베어 앞에서 투쟁 선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기자회견에서 든 플랑은 지난 20여 일간 외친 구호였다. “만선호프는 탐욕을 멈추고,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 현재 지속되고 있는 집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구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실제 거리 피케팅에서는 만선호프를 이용하는 손님들에게 만선을 불매하자는 주장도 동시에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상생하라는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든다. 상생이라는 말은 만선 사장에게 조금의 타격도 가하지 못하는 말이다. 그것은 건물주의 선의를 바라는 말이다. 높은 확률로 만선 사장은 선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상생이라는 단어는 상생하지 않은 탐욕스러운 만선을 창피 주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상생하라는 말은 또 높은 확률로 창피마저 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선 사장은 법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 사람이 탐욕스러운지 여부마저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개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런 것을 사업 역량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상생하라는 구호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무엇도 요구할 수 없고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구호인 건 아닐까. 


역량 소진도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반드시 온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운동도 어쩌면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이길 때까지 투쟁할 거니까 지는 일은 없다. 그런데 이건 긴 흐름에서 운동의 몫이지 당장 몇 년씩 지속되는 투쟁이 참여자들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투쟁의 괴로운 과정이라고만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건물주의 선의뿐이라면 계속 매달려 투쟁을 하는 것이 진이 빠지는 과정인 것은 맞지 않는가. 끈질기게 버티는 것도 투쟁의 덕목이지만 투쟁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고려하여 참여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하는 것도 투쟁의 덕목일 것이다.

‘을지OB베어 공동대책위원회’는 5월 11일 오전 11시 을지OB베어 앞에서 투쟁 선포 기자회견의 모습이다.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을지 OB베어를 등지고 서있다. 사람들의 손에는 다양한 피켓이 들려 있다. 사람들 앞으로 2개의 플랑이 있다. 좌측에는 ‘을지OB베어. 을지로에서 처음으로 문 연집’ 이 적혀 있고. 우측에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가득 채운 만선호프는, 탐욕을 멈추고,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 장소: 을지OB베어 앞. 주관: 을지OB베어공동대책위원회’가 적혀 있다.  그림 설명 끝. 


앞서 언급한 대로 대로 진행된 투쟁 선포 기자회견에서는 다음 세 가지 요구안이 발표되었다. ① 건물주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 ② 서울시와 중구청은 서울미래유산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본래 가치 보존을 위해 을지OB베어 사태를 해결하라!  ③ 중소벤처기업부는 백년가게 지정을 넘어 백년가게 보존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 해당 기자회견을 보면 을지OB베어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번 사태를 단지 개인 간의 사적 분쟁이 아닌 공동의 대안이 필요한 사태라는 주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월 21일 빈곤사회연대에서 작성한 성명 또한 임대차계약의 한계를 짚는 것과 동시에 당장 현행 법체계로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미래문화유산을 지키고 상생하는 중재가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 을지OB베어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전체 법체계의 변화가 요구되는 임대차계약의 문제점을 보다 강력하게 짚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최소한 정부에서 지정한 미래 유산인 곳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그렇기에 전략이 된다.


그럼에도 더 넓은 세입자의 권리를 을지OB베어 사례를 통해 말할 수는 없을까. 이렇게 장사가 잘되는 노포도 세입자이기에 언제든 이렇게 폭력적으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를 더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을지OB베어를 지키자를 넘어서는 주장을 해야만 을지OB베어도, 그리고 을지OB베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도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을지OB베어의 간판이 걸린 벽면에 ‘을지OB베어가 쫓겨나면 서울시의 어떤 가게도 지킬 수 없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이 기대어 서있다.

그래도 일단

나는 을지OB베어가 없어지지 않기 바란다. 그 때문에 시간이 되는 대로 피케팅에, 문화제에 갈 수밖에 없을 거 같다. 그 마음은 복합적이다. 나의 (좋고 나쁜) 시간과 기억이 묻은 곳이기 때문이고, 소유권이 모든 권리를 압도하는 세계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가 세입자의 권리가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는 한걸음에 오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을지OB베어가 없어지지 않는 일에 함께하고자 한다. 당신도 함께하자.

그림 설명 시작. 좌측은 을지OB베어의 상징인 OB베어 곰 캐릭터가 투쟁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맥주를 들고 있는 그림 피켓의 모습이다. 캐릭터 아래에는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우측에는 철거된 을지OB베어 철문 위로 시민들이 포스트잇에 색색이 남긴 연대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철문 중앙에는 철거된 간판과 현판들을 대신하여 ‘을지OB베어’, ‘서울미래유산’,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는 글귀들이 적혀 있다. 그림 설명 끝. 


나아가며: 우리에게 나아갈 곳이 있을까

1960년대 쓰인 천승세의 〈만선〉에는 만선이 꿈인 곰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곰치는 뼛속까지 뱃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바다에서 죽었다. 젊은 아들은 이제 돈 되는 일을 하자고 하지만 곰치는 만선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그에게 만선은 단지 경제적 가치를 지닌 무언가는 아니다. 바람을 살살 타고 바다에 나서 고기를 가득 실은 배가 뿌듯하게 기우뚱하는 감각 그 총체이다. 이자를 내기 전까지는 배도 묶인 신세이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못한다.

만선은 어민에게 풍요의 상징이지만 역설적으로 임차인의 빈곤을 보여준다.

그림 설명 시작. 사진은 2021년 국립극단에서 열린 연극 <만선>의 장면이다. 비가 내리는 배경 앞 기울어진 배의 갑판 위에서 좌측으로는 주저앉은 곰치의 아내가 땅을 보고 있다. 우측에는 곰치가 통탄스러운 표정으로 관객석을 응시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2022년에 이 작품을 보는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것이다. 어업에 대한 신념을 가진 곰치에 대한 생경함과 동시에 이 정도 바람도 이루어주지 않는 세계에 대한 답답함. 곰치가 낚은 것은 모두 선주인 임제순에게 이자로 넘어간다. 배를 가졌기 때문에 점점 더 부자가 될 수 있다. 곰치네 식구는 모두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곰치의 꿈은 만선이지만 결국 배를 채우는 것은 선주다.


만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호프집이 있었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는 만선 호프가 아니라 만선 골목이 될지도 모르겠는 호프집이다. 만선 호프가 을지OB베어를 포함한 노가리 골목 일대를 먹으러 드는 행위에서 선주의 야욕을 느낀다. 만선 사장이 탐욕스러운 사람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나쁘다고는 못할 것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할 수 있어 한 것뿐이다. 그것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사회이기에 그런 야욕을 펼친 것 뿐이다.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빽빽해지는 서울의 구석구석을 보며 느끼는 것은 불안감이다. 도시의 공사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내몰린다. 건물주라는 꿈은 세상의 적극적 용인을 받는다. 그곳에서 삶을 살고 가꾸는 이들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떼쟁이가 된다. 세상은 글의 결론부를 <나아가며>라고 적는데, 되묻는다. 이렇게 밖으로 밖으로 쫓겨나기만 하는 우리들에게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것은 맞는가. 그 조금의 가능성마저 휘발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야만 ‘나아가며’라는 말을 조금은 당당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편집위원 기영/7191zero@gmail.com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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