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네게 무해한 사람

[특집 '비거니즘' 닫는 글] 편집위원 열음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과 해가 되지 않고 싶다는 마음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아주 다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나를 조심하면 된다. 각지고 날선 말을 혀 안에 감추어 반질반질 둥글게 깎아낸다면, 무심코 휘저은 몸짓이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도록 어깨를 조금 웅크린다면 그러면 적어도 폐는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가 되지 않는 일은 아마 폐를 끼치지 않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몰라 머뭇거리다가 우선 내게 두었던 무게중심을 너에게로 옮겨보기로 하지만 나는 금방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고작 한 명인데 너는 무수히 많은 탓이다. 하루를, 한 해를 살아낼수록 너는 어째 점점 더 많아진다.


작년 이맘때의 내가 새삼 발견한 너는 내 식탁 위에 있었다. 내가 멘 가방 안에도, 손목 위에도 심지어는 입술과 뺨 위에도 있었다. 너는 죽은 채였다. 살아있는 내가 죽어 있는 너를 걸치고 씹고 삼킨다는 게 아주아주 이상하게 느껴졌다. 더 솔직해지자면, 너 역시도 언젠가는 나와 같이 살아 숨쉬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건 여지껏 의식하지 못했음이 이상할만큼 당연한 일임에도 마치 그간의 나는 네가 죽은 채로 태어난다고 생각하기라도 했던 것마냥 순진한 척 슬퍼했다. 누군가 나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으나 너의 삶 혹은 죽음은 분명 내가 관장할 수 있는 영역에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던 것을 관둘 때였다.


미처 눈길이 닿지 않던 곳의 존재들을 너로 호명하고서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허나 나를 감싸고 돌던 알량한 우월감이 가신 후 남은 건 나는 결코 네게 무해할 수 없다는 체념이었다. 가끔 숨을 마시고 내뱉는 일이 크나큰 잘못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를 점점 넓혀 너에게로 확장시키자 나의 날숨 위로 너의 신음이 겹쳤다. 그럴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못내 슬프게 다가왔다. 너를 나의 세계로 이양시키려는 일은 자주 기만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한없이 무력해졌고 무용해졌고 부끄럽다가 이내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다르게 초록빛이 짙은 요즘이다. 물끄러미 바깥의 여름을 바라보고 있자면 살아있음의 경이로움까지도 느끼게 된다. 이럴 때 나는 마냥 우는 대신 살고 싶고, 살리고 싶다. 죽은 채 태어나거나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나의 편의에 의해 죽어 마땅한 것은 없다는 걸 이제야 안다. 그러니 울 힘을 다해 살고, 살리기로 마음먹는다. 거창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당장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라떼에 우유 대신 두유를 타 달라고 부탁하는 일, 그리고 고작 이런 글을 적으며 나의 무능력을 합리화하는 일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네게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마음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영역에 남아있을 줄도 안다. 어쩌면 무해함을 바라면 바랄수록 깨닫게 되는 건 나는 영영 네게 유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용할 줄을 알면서도 이대로 두고 싶고, 심지어는 나날이 크기를 기워가고만 싶은. 고작 이 정도의 노력뿐일지라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니 나는 언제까지라도 불가능한 마음으로 한없이 슬퍼하고 그보다 더 살고 싶어하며, 살리고 싶어하며 유해한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택한다. 너는 내가 살려야 할 존재가 아닌, 그저 살아가는 존재임을 매일 되새기며, 그리하여 네게. 


편집위원 열음 / yeoleumse@gmail.com

이전 12화 (포스트)휴먼 비건 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