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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비건 되기

[칼럼 '비거니즘'] 편집위원 해진

그림 설명 시작. 눈을 감은 ‘영군(임수정 역)’이가 양손의 검지를 건전지의 양극에 대고 있다. 뒤편에는 밥을 먹고 있는 다른 입원자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림 설명 끝. ©모호필름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주인공 ‘영군’은 자신이 인간이 아닌 싸이보그라고 생각해 밥을 먹지 않는다. 싸이보그는 밥을 먹으면 고장이 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정신병동에서 생활하는 ‘왕곱단’은 그에게 밥을 먹지 않으면 의사와 간호사가 억지로 밥을 먹이려 할 것이라며 영군의 식판에 담긴 음식을 자신이 대신 먹는다. 이후 영군은 식사시간 때마다 분홍색 함을 들고서 왕곱단의 옆에 앉고, 왕곱단이 자신의 식판까지 비워주는 동안 안에 들어 있는 건전지를 꺼내 낼름낼름 핥거나 건전지 양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자신을 ‘충전’한다.


영군이가 자신을 충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자신의 할머니를 싣고 가는 요양병원 구급차를 놓치면서부터다. 영군이는 열심히 언덕을 달음박질치고, 정 안되자 자전거에 올라타 보기도하지만 … 결과는 당연히 실패. 그가 달리는 자동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영군이는 자전거와 얘기를 나누며 싸이보그인 자신의 ‘배터리’가 부족해서 구급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영군이에게 정말 필요한 건 밥 먹기가 아니라 ‘충전하기’가 된다. 이후 그는 라디오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 자신을 충전하기 위해 작업용 칼로 손목을 짼 후 전선을 끼워 넣(는 바람에 감전 당하)고, 그렇게 지금 ‘환자 차영군’으로 정신병동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림 서명 시작. 영군의 할머니가 구급차 뒤쪽의 창문을 통해 자전거를 타고 구급차를 쫓아오는 영군이를 보고 있다. 배경에는 언덕이 조금 보인다. 그림 설명 끝.


[그림3] 구급차를 놓친 영군이가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할머니에게 전해주려던 틀니함을 보고 속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 뒤편에는 영군이가 달려온 동네 골목의 전경이 보인다. 그림 설명 끝. ©모호필름


그가 정확히 언제부터 음식 먹기를 완전히 멈췄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영화상 영군이가 먹기를 거부한 첫번째 음식은 순대였다. 어느 날 영군이는 식당 주방에서 순대를 만들고 있던 엄마를 찾아가 자신이 싸이보그인 것 같다고 고백한다. 엄마는 사람들이 모르기만 하면 된다며 순대에 소금을 찍어 그에게 건넨다. 그러자 그는 엄마 앞에서는 순대를 입에 덜컥 넣고서, 엄마가 일을 하러 돌아가자 뱉어 버린다. 순대를 안 먹는 싸이보그/사람. 고1 겨울방학의 어느 날 이후 나는 떡볶이를 먹을 때 순대를 안 먹었다. 그날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잡지는 내게 비거니즘을, A4용지 3/4만한 철장에서 평생 알을 낳아야다 하는 닭을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동물성 식품을 먹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순대, 그거 돼지 소장인데 소장 가진 동물 많잖아. 사람 소장 씻어서 순대 속 끼우고 간해도 비슷할텐데 돼지 소장으로만 만드는 이유는 돼지가 돼지여서겠지. 죽여도 되고 먹어도 되는 돼지.  인간 소장도 먹자는 건 아니고 그냥 먹기 위해서 돼지 몇 천 몇 만 마리를 한꺼번에 살아있는 채로 도축하고, 이곳저곳 다 빼다 먹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림 설명 시작. 식당 주방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영군의 엄마가 영군에게 소금 찍은 순대를 건네고 있다. 영군은 그런 엄마를 뚱하게 바라본다. 조명 때문에 이미지 전체에 붉은빛이 돈다. 그림 설명 끝. ©모호필름


비거니즘은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신념이자 라이프스타일로서 방금 말한 것들 모두에 반대한다. 하지만 동물을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하는 모든 활동에도 반대하는 비거니즘이 흔히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 쯤으로 여겨지고, 비건의 일상적인 실천과 다짐 역시 주로 먹는 것과 관련되는 이유는 아마 사람이라면 매일매일 무언가를 먹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잡지를 읽고서 가죽 제품을 쓰지 말자거나 동물원에 가지 말자기보다는 동물성 식품을 먹지 말자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이겠다. 이 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절대 생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전류로 영양분을 섭취(한다고) 하는 영군이야말로 비거니즘을 꽤나 쉽게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정말 비거니즘을 알고 지향하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영군이, 싸이보그 영군이, 부럽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당연히 동물도 먹지 않으니.

 

안 먹는 사람

그런데 당연히 그가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싸이보그란 ‘사이버네틱’{cybernatic}과 ‘유기체’{organism}의 합성어로 대개 기술적 변형이 가해진 인간을 일컫는 말인데, 영군이가 정말로 그런 싸이보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기계와 대화할 수 있다 믿어 병동에 있는 기계에게 말을 건네지만 그가 자판기에게 부탁해 받았던 율무차 한 잔은 그를 지켜보던 또다른 환자 ‘일순’이 슬쩍 뽑아준 것이었다. 실제로는 사람이니 건전지로 충전될리도 없지, 영군이는 밥을 전혀 먹지 않는 탓에 점점 쇠약해지고 이후 의사는 그에게 코 속에 호스를 넣어 음식을 강제로 섭취하게 하는 튜브 영양법을 취하기까지 한다. 이유는 뻔한데,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강제로 묶여 ‘먹임 당하는’ 영군을 풀어달라며 일순과 병동 환자들은 단식투쟁을 벌이지만 의사는 그들에게 밥을 사흘만 더 안 먹으면 영군이가 죽는다고 말한다.)


그림 설명 시작. 영군이가 정신병동 안에 있는 자판기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 오른쪽 뒤에 서있는 ‘일순’은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고 있다. 왼편 배경에는 병동의 복도가, 중앙에는 자판기가, 오른편에는 벽면에 걸려있는 게시판이 있다. 그림 설명 끝. 


그림 설명 시작. 영군이가 팔을 늘어뜨린 채 혀를 내밀고 멍한 표정으로 벤치 한쪽끝에 누워있다. 그림 설명 끝. ©모호필름


그래, 인간은 먹어야 한다. 인간은 치아구조와 침 성분으로 미루어 보아 잡식동물로 파악되는데,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다른 유기체를 먹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강아지와 고양이도 동물성 사료를 (때로는 살코기를) 먹고, 닭도 곤충과 벌레 등을 먹고, 곤충도 다른 동물과 식물을 먹는다. 그 외에도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움직이는 생명체 모두가 “스스로 영양소를 생성하지 못해 생명활동에 필요한 영양소를 다른 생물에게 의존하여 얻어”내는 종속영양생물로서 모두 살아있는 것을 먹고 산다. 식물과 일부 박테리아는 광합성을 통해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닌 무기 영양소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광합성을 하지 않는 인간에게 무언가를 먹고 이용하는 행위는 살아있는 한 당연하게 되므로, 인간 생물은 대개 나 아닌 무언가를 해치며 존재하는 것이다. 


영군이에 대한 엄마의 염려도 주로 밥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영군이를 카타토니아 상태라고 진단하곤 전화로 전기치료요법를 권하는 그의 담당의에게 엄마는 전기치료요법의 부작용을 물어보며 “그냥 밥만 먹게 해주시면 되는데”라고 말한다. 영군이가 굶어 죽을까 하는 걱정도 있겠지만 아마 영군이가 스스로를 싸이보그라 ‘믿는’ 것을 들키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게 엄마의 생각이겠다. 앞서 식당에 찾아와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말하는 영군이에게 (그의 말을 믿는 것은 고사하고) 남들 모르게만 하면 된다며 순대를 먹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거, 움직이는 거, 그 밖에 다른 거 다 아니고, 먹는 거. 그것이 사람처럼 보이는 최소한의 조건이자 ‘위장’인 것이다.


하지만 만약 특정한 무언갈 먹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고,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게 아니며, 먹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를 들면 비건이 그렇다. 동물이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들어 동물성 식품의 섭취를 지양하는 비건은 나의 살아있음이 곧 해침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그리고 아마 미래에도 이어질) 방식으로 착취되는 생명은 먹거나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허나 비건도 여전히 먹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대신 비동물성 식품을 먹는다. 콩국수, 고기 없이 볶은 비건 짜장면, 채수에 채th를 잔뜩 넣은 비건 짬뽕, 가지튀김, 고기 없이 청경채와 두부, 버섯이 가득한 마라탕과 마라샹궈, 오리엔탈 드레싱이 뿌려진 포케, 감자전, 우유/버터/달걀 없이 밀가루와 올리브유 등으로 만든 빵 같은 것, 그외에도 야채라면, 두부텐더, 콩고기함박, 버섯탕수 등등 아주 맛있는 식물성 음식이 있다. 그런데 잠시만 … 

 

… 왜 식물은 먹어?

그러게. 왜 식물은 먹지? 우리는 이에 대한 여러 동물권리론자들의 답변 중 톰 레이건의 말에 주목해볼만하다. 피터 싱어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적 동물권리론은 식물이 의식적 존재로서 고통과 쾌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기에 식물은 (당연히) 먹어도 된다고 일갈하기 때문이다. 톰 레이건은 「동물권에 대한 옹호」에서 동물이 인간에게 유용한지, 이성적인지, 정말로 고통과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별개로 동물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 그 자체로서 권리를 지닌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동물이 삶의 주체로 가지는 내재적 가치가 권리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돌멩이도 권리를 가지냐’며 비난하는 몇몇 이들을 의식한듯 나무, 강, 언덕과 같은 자연(물)이 내재적 가치를 갖는지 우리는 알 수도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이 말은 현 시점에서 정말로 적절하다. 누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그 경계를 재설정하고 확인하는 일은 아주 혁명적이고 까다로운 일이므로 공장식 축산과 어업, 동물을 이용한 패션 산업, 관광 산업 등 그들에게 온갖 형태의 착취가 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선은 정말 삶의 주체임을 확인할 수 있는 (듯한) 동물에게 고유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니 말이다.


그런데 돌멩이의 권리를 따져 묻는 이들이 보통 누군가의 권리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단순히 비건의 ‘위선’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비거니즘은 언젠가 그런 ‘극단적인’ 권리의 확장을 마주하고 누구/무엇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권리와 그의 해방을 주장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인간종에 국한되어 그 범위를 넓혀왔던 와중에 비거니즘은 비인간동물종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인 까닭이며, 더욱이 권리를 인정하는 일은 어떤 행위와 상호작용이 정당하고 윤리적인지의 경계를 정(하게)하기 때문이다. 비건이라는 단어를 창안한 인물이자 영국 비건 협회{The Vegan Soceity}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도날드 왓슨은 살코기는 먹지 않되 유제품과 난류의 섭취는 허용하는 베지테리언 협회{The Vegeterian Society}만이 있던 때에 비건 협회의 창립을 주도하며 “채식주의자의 이상적인 지위는 동물성 제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들 대부분은 다른 여느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권리가 확장되는 일이 반드시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계별로 이뤄지지는 않으나, 그가 유제품과 달걀을 먹는 베지테리언를 조망한 방식으로 식물을 먹는 비건도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톰 레이건류의 동물권리론에서 삶의 주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무)의식적 소망, 욕구, 희망, 충동, 잠재성향, 성장 추세, 자연적 성취 등 어떤 존재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가지는 관심’을 고려한다면 식물 또한 하나의 유기체로서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 존재를 지키고 유지하는 지속적인 경향이 있으며 목표 지향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식물의 권리를 부정할 연유는 딱히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법적으로 강과 식물을 비롯한 자연(물)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한 사례는 이미 있다. 에콰도르 정부는 2008년 9월 헌법개정에서 헌법 제71조로 ‘자연의 권리’를 포함하면서 “생명이 재창조되고 존재하는 자연 또는 어머니 대지{Pacha Mama}는 존재와 생명의 순환과 구조, 기능 및 진화과정을 유지하고 재생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며 에콰도르 내의 국민, 공동체, 민족이 자연의 권리를 당국에 요청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이후 2011년 해당 법조항은 ‘빌카밤바’ 강의 자연적 흐름과 건강에 간섭하는 공사 행위를 중단하라는 판결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편 뉴질랜드 정부는 2017년에 ‘테 아와 투푸아법’을 제정하여 뉴질랜드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인 황가누이 강을 법적 인격체로 설정하고 황가누이 강을 구성하는 (비)물질적인 요소에 대한 그것의 권리와 권한을 인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례들은 해당 지역의 거주민들의 이해관계와 권리가 일부 개입되었고 (인간에 의한) 환경 오염이 인간에게도 가시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시점에 이뤄졌다. 허나 이것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려는 시도인 한편 회사 법인이나 사단 법인처럼 비인간이지만 권리를 (때로는 여성, 흑인과 같은 인간보다도 먼저) 담지한 법인격들을 상기시키며 누구와 무엇을 법인격으로 인정할 지를 정하는 기준이 사회가 그것에 부여하는 영향력 및 가치에 의해 정해짐을 여실히 보여준다.

 

트랜스휴먼 비건?

그렇다면 권리를 담지한 존재의 범위가 크게 확장된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비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감히 상상컨대 그건 정말 영군이가 상상하는 싸이보그처럼 아무것도 먹지 않는 비건, 건전지로 스스로를 충전시킬 수 있는 비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트랜스휴먼 비건’이라 칭해볼 수 있겠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지속적인 개선을 목표로 삼아 육체의 변형을 통해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사조이다. 그러니까 트랜스휴먼 비건은 육체를 가졌기에 반드시 무언갈 먹고 이용해야 하는 ‘휴먼 비건’의 도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몸을 변형 혹은 소거한 싸이보그인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과 인간이 맺는 관계, 주로 인간이 여타의 다른 존재를 지속적으로, 체계적으로, 압도적으로 억압하는 관계가 발생할 가능성을 적어도 먹는 것에서만큼은 아예 일어날 수조차 없게 만듦으로써 말이다. 


그림 설명 시작. 병동 급식실에 있는 왕곱단과 영군의 뒷모습, 식탁, 밥을 먹고 있는 다른 환자들 몇몇이 보인다. 왕곱단은 영군의 왼편에 앉아 급식을 먹고 있고 영군은 분홍색 함에 든 건전지를 꺼내어 무언갈 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 모호필름


인간 개체가 다른 대상과 맺는 관계의 양상을 혁신적으로 바꾸자는 이 제안은 다음의 맥락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변화의 방향을 ‘환경/대상’이 아닌 ‘우리’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는 지금 살아있는 비인간동물에 특정한 조치를 취하거나 지구공학적 방법으로 지구를 ‘알맞게’ 통제함으로써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존의 시도에 대한 비판과도 궤를 함께 한다. 가령 소의 입에 메탄가스를 흡수하는 마스크를 씌우거나 소의 사료를 해조류로 대체해서 온실가스를 줄이고 (영화 〈킹스맨〉에 나온 것처럼) 온열 시스템을 가동시켜 지구의 온도를 조절하기 … 등등이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며 그대신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우리를 바꾸자는 주장이다. 


한편 이러한 혁신의 목적이 우리 자신을 개조하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계속해서 최적화하려 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은 휴머니즘, 곧 인본주의에 기초한다. 인본주의란 지속적인 교육과 자기 개발을 통해 소위 ‘문명화된’, 자유로우나 다른 인간 타자에 대한 섬세한 감정을 지닌 인간상에 도달하려는 사조로서 자유, 이성, 책임의 능력을 가진 인간을 전제로 삼는 한편 그것을 이상으로도 설정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여기에서 인간 개선의 근본적인 동기이자 이상향을 (때로는 형식적인 의미로) 계승한 것이며,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 트랜스휴먼 비건 또한 인간 신체를 싸이보그 신체로 교체하여 음식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측면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도야{陶冶}하는 인간상을 지향한다. 비로소 비건은 다른 존재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트랜스휴먼 되기―을 찾은 것이다…


…라고 썼지만, 그리고 이제껏 영군이를 닮은 트랜스휴먼 비건에 대해 말하기 위해 십여 문단을 지나왔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되는 트랜스휴먼 비건에게는 아주 난처한 문제가 있다. 그 무엇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먹는 것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는 결코 먹는 문제에 관해 도덕적일 수 없다는 게 그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행위가 윤리적이라면 정말 ‘윤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논리에 따라, 누군가는 도덕적으로 취약하여 ‘악할 수’ 있어야 비로소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론적 취약성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타자와 연결되어 윤리라는 문제를 맞닥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앞선 내용은 이런 방식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지구가 점차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 되어가자 지구 대신 화성에서 살자며 환경 오염과 기후위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완전히 방기하는 주장, 혹은 혹은 선거 참패 이후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책임에 대해 과도한 사명감을 품고 내린 당 지도부 총사퇴 결단(같은 것)은 상황 자체를 종식시켜버림으로써 해결해야 할 문제에는 접근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트랜스휴먼 비건은 도야라는 명목 아래 상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의 권리를 고민해야만 하는 자신의 위치와 그에 따른 책임을 회피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남아야 한다. 취약하게, 휴먼 비건으로. 


이제 우리에게 던져진 문제는 어떻게 관계 속에서 먹음과 해침이라는 필수적인 행위를 상대의 권리와 공존시킬 수 있는지이며, 이 물음은 분명 새로운 권리와 윤리를 찾고자 할 테다. (주로 인간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성-책임-의무에 토대한 권리나 어떤 존재가 삶의 주체라는 점에 근거한 권리는 모두 독립적인 권리 담지자만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포스트)휴먼 비건

그렇다면 새로운 권리는 무엇보다도 다른 개체와 다른 종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의 단면을 반영해야 할 것이며, 그것을 부정하거나 제거하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의존과 관계망으로 얽혀 있는 현실을 자신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도나 해러웨이의 ‘반려종’ 개념은 이러한 종류의 권리가 성립할 단초를 제공하는데, . ‘반려종’이란 인간의 삶에 개입하며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의 조건과 양상 또한 재구성하는 모든 유기체적 존재이다. 그에 따르면 개와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처럼 우리가 관계를 맺는 중요한 타자가 우리와 동종·동류일 필요는 없다. 핵심은 우리가 친밀하고도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들에서 나아가 지구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다른 모든 생명체들을 반려종으로 삼아 반려관계를 맺을 수 있다/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내미생물은 인간의 소화기계 안에서 살아가며 그곳에서 얻은 영양분으로 대사를 하고 그 과정에서 배출된 대사산물은 인간의 감정과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개, 고양이, 돼지, 소, 꿀벌 등의 동물은 인간과 교류하거나 인간의 활동 및 산업에 동원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의 양식과 유전적 구성을 바꾼다. 이들에게 전적으로 기대어 (혹은 이들을 이용하여) 사는 인간이 그들의 생태와 변화에 영향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듯 인간과 비인간동물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자신과 상대의 삶 양측을 구성짓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반려자들이고 빵을 나누는 이들(cum panis)이며,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있다. 우리는 서로를 위태롭게 만들고, 남의 살점으로 존재하며, 서로 먹고 먹히고, 소화불량에 걸리다가, (…중략…) 지구상에서 살다 죽는 접합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반려관계에 있는 두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둘의 삶과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상대의 상황과 필요를 살피고 응답할 의무와 함께 상대에게 주의-반응-존중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요컨대 이질적인 두 종 ― 허나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두 종이 맺는 관계가 권리와 의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림 설명 시작. ‘라이스 메가트론’과 영군의 등 위로 공기 펌프를 쏘는 일순의 손이 보인다. 일순의 시각에서 일순의 두 손과 영군의 등, 지하실 바닥과 배관 등이 보인다. 그림 설명 끝.


그림 설명 시작. 병동의 지하실에 있는 영군과 일순의 모습이다. 영군이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고, 일순은 작업용 헤드라이트를 끼고 그의 바로 뒤에 앉아 있다. 그림 설명 끝. © 모호필름

 

일순은 영화 후반부에서 영군이에게 음식을 기계의 에너지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인 라이스 메가트론을 만들어 영군의 몸 속에 넣어준다. 실제로 일순이 그런 기능을 가진 장치를 만들어 영군의 몸에 넣어준 건 아니고, 영군의 등에 메스를 대는 것처럼 연필을 긋고 수술을 하는 척하며 흉내를 낸 것뿐이다. 하지만 일순이 “생활전력 정도는 밥을 먹어서 충당할 수 있다”라며 제안한 ‘수술’은 영군이가 싸이보그인 걸 믿는 ‘척’하며 치는 장난이 아니라, 그가 정말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수술이다. 이것은 이전에 안정실에 갇혀 강제로 튜브영양법을 당하고 나온 영군에게 “싸이보그라고 밥 먹으면 안돼? … 싸이보그지만 먹어도 괜찮아. 응?”이라고 말하던 예전의 그와도, 전기 충격으로 영군이의 질환을 치료하고자 했던 영군의 담당의와도 다르다. 그는 영군을 인간으로 교정하는 대신 영군의 심리적 진실을 존중하는 돌봄의 윤리를 제시한 것이다. 
수술 이후 영군은 급식실 의자에 앉아 ‘첫째, 숟가락을 든다. 둘째, 밥을 푼다 …’ 하는 일순의 말을 따라 밥을 먹는다. 그 둘은 아마 이 순간만큼은 분명 인간과 싸이보그라는 이질적인 두 종일 것이며, 일순의 수술은 영군의 구체적인 실존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타자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도움을 주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노력일 테다. 

 

한편 (짐작했을 수 있겠으나) 일순은 영군의 환상 공간을 함께 경험하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을 떠난 이후 자신이 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일순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의 물건, 성격, 정체성 등을 훔치고는 그동안 그들처럼 행동하며 그들로서 산다. 일순과 영군의 접점도 그의 도벽 덕에 형성된 것인데, 일순은 죄책감, 망설임 등을 없애고 싶어하는 영군의 감정을 훔치면서 그의 세계 더욱 자주, 깊이 경험한다. 그렇게 끝내는 라이스 메가트론까지 만들어 주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과거를 얘기할 때마다 꺼내곤 하던 (어머니의 사진이 끼워진) 함을 라이스 메가트론의 본체로 이용하고, 영군의 몸 속에서 그것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곤 그것을 땅에 묻는다. 그렇게 일순은 영군의 세계를 계속해서 자신의 세계와 동시에/번갈아 경험하게 되었지만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영군은 일순의 라이스 메가트론 덕에 밥을 먹게 됨으로써 싸이보그의 정체성은 위협받게 되었지만 싸이보그로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체성, ‘나’라는 존재의 경계를 흐리는 이러한 관계는 언제나 불완전하며 서로를 위협할 것이다. 허나 이 둘은 이질적인 상대의 삶을 가능하게 하며 그를 통해 자신의 삶 또한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관계에서 비롯한 응답의 의무와 권리는 이를 가능케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와 권리는 결코 비인간동물과 그들의 살점, 움직임, 혹은 존재를 암묵적이고 체계적으로 이용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의존을 위시해 폭력을 휘두르는, 혹은 비가시화된 착취의 구조에 기대어 살아가는 ‘그냥’ 휴먼의 삶 말이다. 반려종에게 다해야 하는 주의-반응-존중의 의무는 인간종이 반려자의 목소리를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한계 속에서 상호적인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최선의 실패를 하라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건은 ‘그냥’ 휴먼과 모든 취약함과 의존에서 자유로워 완벽히 도덕적인 (그래서 도덕적일 수 없는) 트랜스휴먼 그 사이 어드메에 서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중심적·인본주의적 사고와 행위를 극복하려는 사조’라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의 정의를 참고하여 ‘그냥’ 휴먼의 생태를 지양하고자 하는 비건을 ‘포스트휴먼 비건’이라 부를 수 있을까. 허나 인간과 비인간동물이 맺는 제한적이고 불균등한 관계를 떠올려 본다면 반려자에 대한 더 큰 의무와 책임을 져야하는 ― 질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를 포스트휴먼이 아니라 (포스트)휴먼이라 불러야 맞을 듯하다. 그래서 감히, 비건은 (포스트)휴먼이어야 한다고 말해본다.  


편집위원 해진 / jnnnterm@gmail.com

 


[1]  ‘사이보그’가 표준어이나, 이 글은 글의 출발점이 된 영화의 제목을 고려하여 표준어 대신 ‘싸이보그’를 사용함을 미리 밝힌다.

[2]  상민 (2021.10.). 163.

[3]  야니나 로 (2020). 70-72.

[4]  [인간은 과식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잡식동물 인간, 수만 가지 동식물을 탐하다 (2015.10.30.). 동아사이언스.

[5]  [과학백과사전] 종속 영양(heterotrophism). 사이언스올. 

[6]  카타토니아(catatonia)란 ‘극도의 무기력함,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음, 과도한 신체 활동을 보임, 지나치게 부정적인 경향을 보이거나 말을 하지 않음, 상대의 말을 그대로 따라함(메아리증)’ 등의 증상을 보이는 정신의학적 상태의 하나이다. (영화가 제작되었을 당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4판 기준) 주로 조현병의 하위 분류나 기분장애의 삽화 중 하나로 분류된다(Rajiv Tandon et al., 2013).

[7]  고대문화 편집회의 때 주로 이런 걸 먹는다.

[8]  맹주만 (2009). 246-247.

[9]  톰 레이건 (2019).

[10]  잘 알려진 초록색 풀 모양 비건 인증 마크가 이 협회에서 발급된다. 비건 협회는 이전 1847년에 창립된 베지테리언 협회의 분파로서 1944년에 설립되었다.

[11]  Ripened by human determination: 70 years of The Vegan Society (2014).

[12]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을 지니고 생활하는 이들을 비건(Vegan)을 에서 ‘V’를 뺀 이건(Egan)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겠다.

[13]  송정은 (2020) 20-21.

[14]  박태현 (2019). 133.

[15]  법적 인격체, 법인이란 자연인 이외에 법인격(권리능력)이 인정된 것, 즉 권리·의무의 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찾기쉬운 생활법령정보). 

[16]  송정은 (2020). 14-15.

[17]  싸이보그가 모두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 모든 싸이보그가 트랜스휴먼은 아니지만 (따라서 영군이도 트랜스휴먼은 아니다) 싸이보그는 트랜스휴먼 범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18]  나오미 클라인 (2020). 300.

[19]  야니나 로 (2020). 26-30.

[20]  김애령 (2020). 15-19. 

[21]  해러웨이 (2008); 김애령 (2020)에서 재인용.

[22]  김애령 (2020). 21.

[23]  박진 (2008). 472, 479-481.

[24]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지속적인 개선에 집중하는 트랜스휴머니즘과 달리 인간의 극복 자체에 초점을 둔다. 그 종류에는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과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야니나 로 (2020).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조창오 역. 부산대학교 출판문화원. 

톰 레이건 (2019). 동물권에 대한 옹호. 신우승 역. 전기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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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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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령 (2020). ‘다른 세계화’의 가능성 -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 읽기. 코기토, 92,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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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및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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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백과사전] 종속 영양(heterotrophism). 사이언스올. Retrieved from https://www.scienceall.com/%EC%A2%85%EC%86%8D-%EC%98%81%EC%96%91heterotrophism/ 

The Vegan Society. Definition of veganism. Retrieved from https://www.vegansociety.com/go-vegan/definition-veg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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