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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비건은 없다

[특집 '비거니즘'] 편집위원 숙영

고통과 죄책감

‘고기’는 어떤 동물의 죽음을 의미한다. 어느 살아있는 동물을 ‘고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 속에 놓이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오물이 잔뜩 묻은 비좁은 삶, 한 번 배면 잘 빠지지 않는 온갖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도살장, 그리고 죽음 앞에서 발버둥 치는 끈질긴 최후의 순간과 같은 것들. 육식을 지탱하는 여러 산업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소독하고 제거한 뒤에 ‘고기’라는 상품을 소비자 앞에 내보인다. 우리가 고기를 구입하기 위해 지불하는 값은 그 모든 잔혹한 과정을 대신 이행해주는 것, 그리고 그 흔적을 지워주는 것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다.

그림 설명 시작. 지난 해 《고대문화》 가을호에 실렸던 비질 르포 「식탁 위의 죽음은 어디에서 오는가」에도 실렸던 사진이다. 도살장으로 향하는 트럭에 탄 소가 철창 밖으로 겨우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림 설명 끝. ⓒ다연


그렇기 때문에 은폐된 동물의 고통을 가시화하는 것은 비거니즘 운동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많은 동물해방 단체들이 고통을 가시화하는 활동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나 많은 동물들이 먹히기 위해 태어나 겨우 살다가 병들고 죽임당하는 이 과정이 아주 빠르게 순환되는 구조, 그리고 모든 인간이 그 구조의 공모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서 고통의 가시화는 죄책감으로 이어지고, 이는 때때로 몇몇 사람들이 비건 지향을 선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도 일종의 죄책감이 계기가 되어 몇 년 전부터 비건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동물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런 효과도 갖지 못할 수 있다. 이들을 두고 감수성이 무딘 사람들로 치부할 수는 없다. 또한 만일 정말로 이들의 감수성이 무뎌서 그런 것이라면 왜 그것이 무뎌져 있는지를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 고통이 아무런 효과를 갖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이미 이들의 일상에 여기저기 널려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당연한 것이기에, 동물의 살점을 먹는 행위가 동물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그냥 인정하고 수용한 채로 살아간다. 그러니까, 일상화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어떤 이들에게 동물의 고통은 인간인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어찌할 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순히 무딘 감수성 때문은 아니다.


고통을 이야기하는 방식에도 어려움이 있다. 동물의 고통을 인간 세계의 시각으로 추측하면서 언어화하는 것은 적확하지 않을뿐더러 비유로 쓰이는 둘 중 하나는 지워지기 마련이다. 강간, 홀로코스트 등… 동물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실재하는 다른 고통을 끌어다 쓸 필요는 없다. 


그림 서명 시작. “우리에겐 하루 세 번 지구를 구할 기회가 있다”라는 말과 함께 하루에 한 끼라도 식물성으로 먹을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풀무원


한편 비건 지향을 시작하는 것은 죄책감이 동물을 죽이는 행위에 일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는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는 욕망,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해함’은 비건을 권하는 말에 수식어로 쉽게 사용되기도 한다. 누구도 해치지 않는 식사, 지구에 무해한 한 끼, 또는 지구를 구하는 행위, 그리고 무해한 삶. SNS에서 ‘#나의비거니즘일기’ 해시태그나 유명한 비건 계정 같은 것을 팔로우하면 빈번하게 마주칠 수 있는 문구들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당연히 불가능하다. 우리는 비건식을 먹으면서도 분명 누군가를 해치고 있다. 한 끼 식사만으로 지구를 구하는 것은 어렵다. 무엇보다, 애초에 우리의 삶은 서로의 삶에 대한 침해의 연속이기에 결코 무해할 수 없다. 


무해함은 불가능하다

비건을 시작한 지 올해로 4년째다. 그동안 바뀐 것이라고 한다면, 처음에는 거의 매 끼니를 직접 해 먹었지만 지금은 ‘오뚜기 비건 카레볶음밥’을 주식으로 먹는다는 점이다. 또 몇 년 전에는 ‘혁명은 식탁에서부터’와 같은 말에 동의했다면, 지금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오뚜기 비건 카레볶음밥’이 나의 가사노동 시간을 확연히 줄여주었다는 점에서는 ‘혁명’일지도 모르나, 이것이 사회의 모순을 뒤엎는 혁명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 설명 시작. 전자레인지로 데운 오뚜기 비건 카레볶음밥을 한 숟가락 뜨기 전에 사진을 찍어보았다. 플라스틱 그릇 안에 카레볶음밥이 담겨 있다. 그림 설명 끝.

이 볶음밥을 먹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비닐봉지에 담겨있던 볶음밥을 그릇에 옮겨 담고 전자레인지로 데우기, 4분 후 ‘땡’ 소리와 함께 뜨끈해진 음식 앞에 수저를 챙겨 들고 앉기뿐이다. 볶음밥이 담겨 있던 두 겹의 비닐봉지를 버리는 것은 덤이다. 나는 동물이 어떻게 ‘고기’가 되었는지는 알게 되었지만, 내 앞에 놓인 이 볶음밥이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른다. 그저 이 간편함―대기업의 효율적인 생산, 유통 체계에서 비롯된―에 감사하며 허겁지겁 배를 채울 뿐이다. 매일 같이 비건 간편식을 먹다 보면 일주일 만에 자취방 한쪽에 쓰레기 산이 하나 만들어진다. 쓰레기가 수북이 쌓인 모습을 보고 무덤 같다는 생각을 한다. 치킨을 먹고 난 후 그릇 위에 쌓이는 뼈 무덤 앞에는 어느 한 닭의 죽음이라는 특정한 묘비라도 세울 수 있으나, 비건 간편식을 먹고 난 후에 만들어진 일상적인 쓰레기 무덤의 묘비는 아마도 백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이 쓰레기 무덤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동시에, 이 중 누가 묻혔는지 혹은 누가 묻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콕 집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 설명 시작. 대청소를 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내 자취방에 또 다시 만들어진 쓰레기 무덤의 사진이다.종이 상자 여러 개와 스티로폼 상자, 보냉팩 등이 쌓여 있다. 그림 설명 끝.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니까 그나마의 삶을 위해서는 편리함을 택해야만 하는 요즘의 상황에서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거대한 쓰레기 발전소가 된다. 나는 단지 게으르거나 나태해서 간편식을 매일 같이 먹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단지 게으른 것이 맞을지도 모르나, 자신의 속도에 맞춰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다면 게으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빈틈없이 움직일 것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 나를 돌보는 것이 온전히 나만의 몫으로 떨어지는 이 사회 속에서 정성스럽게 요리를 해먹을 시간과 여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허덕일 때 우선순위에서 제일 먼저 삭제되는 것은 나를 돌보는 시간, 가사노동에 들어가는 시간이다. 아마도 나는 오늘도 저녁으로 오뚜기 비건 카레볶음밥 아니면 풀무원 동치미 냉면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는 간편함의 대가로 내 앞에 쌓이게 된 쓰레기 더미를 보면서, 또 이 쓰레기 더미가 결국에는 향하게 될 인천이나 김포, 그리고 제3세계 지역 어딘가의 장면을 상상하면서, 살아있기만 해도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에 일조하는 것이 되는 지금의 상황에 눈을 질끈 감을 것이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매 끼니를 비건식으로 직접 요리해서 먹는다고 해도 나는 누군가를 착취하는 데에 기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품종이 개량되어 유전적 다양성이 제거된 채 재배되는 작물, 그리고 이 작물만을 효율적으로 수확하기 위해 뿌려지는 제초제를 맞으며 죽어 나가는 주변의 동식물. 반나절 동안 해당 작물을 최대한 많이 수확해야 1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고 그 중 20만원 정도는 숙소라고 불리는 비닐하우스에 숙박하는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 이주 노동자들. 그것을 서울까지 배송하면서 최대한 많은 물량을 옮겨야만 한 달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부담해야 하는 화물 노동자들···. 풀만 먹고 산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체제 속에서는 ‘그 어떤 생명도 착취하거나 죽이지 않고’ 평화롭게, ‘무해’하게 살 수는 없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자궁과 질 비슷한 것들을 찢고 나오고 무의 상태에 돌아갈 때조차 주변 존재들에게 유·무형의 고통을 주는 우리들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기쁨과 동시에 고통을 주며 침범하는 존재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체제에서 우리의 연결과 서로에 대한 침범은 착취의 형태로만 나타나기 쉽다. 


다시, 무해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곳에는 무엇이라도 하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 무엇이라도 하려는 마음은 소중하다. 그러나 우리의 비건 실천이 ‘어떤 상품을 선택하고 소비할 것인지’의 문제에만 머무른다면 무해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노력은 점점 더 허망해진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냥 살아있기만 해도 더욱 ‘유해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라도 하려는 마음을 지금의 체제가 계속해서 좌절시키는 것이다. 소중하지만 흔들리고 깨지기 쉬운 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각자의 식탁에서 나와서 무엇이 우리의 노력과 마음을 계속해서 좌절시키는지 함께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에게 ‘무해하다’는 말은 모욕이다

한편 자신이 혹은 누군가가 무해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환상과 믿음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노력하면 무해해질 수 있다는 누군가의 믿음은 온갖 군데에서 떠다니면서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유해함’을 보지 않아도 되는, ‘유해’하지 않을 수 있는 그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해함’의 일상적인 사례들을 떠올려보자. 무해하다는 말은 비건 실천을 권유하는 수사로 사용될 뿐 아니라 몇 년 새 긍정적인 특성으로 빈번하게 거론되곤 하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해함이 어떤 특성들에 대한 거부로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 특성들은 다음과 같다. 불편함, 무례함, 더러움, 악함, 교묘함, 민폐, 시끄러움 등. 무해함에 대한 이야기에는 이러한 특성들에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어서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기존의 가치 체계 속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무해함 역시 불편함을 주고 무례하고 더럽기도 하며 악하면서 교묘하고 민폐를 끼치고 시끄럽기도 한 누군가가 있어야만 그것에 기대어 존재할 수 있는 특성인 것이다.


해를 끼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 독립적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해를 덜 끼치는 것이 미덕이 된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정신)장애인들, 만성질환자, 퀴어, 유색인종 등은 비정상으로 묶이는 여러 특성을 몸에 지닌 채 살아가기에 일상적으로 ‘민폐’가 되는 경험을 한다. 이들은 앞서서 나열한 저 부정적인 특성들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거나 때로는 완벽하게 맞닿으면서 살아가면서, ‘무해함’은 애초에 본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무언가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이들이 무해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몸에 아로새겨진 부정적인 특성들을 지워내고 표백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한다. 그렇기에 때때로 ‘무해하다’라는 수식어는 이들에게 모욕이다. 이는 자신을 비정상으로, 기생적 존재로, 수치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지금의 체제에 고분고분하게 순응하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한편 무해하다는 말을 모욕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동시에 이들이 가진 ‘부정적’ 특성을 자신만의 무기로 사용하고자 마음먹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7년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캐치프레이즈이기도 했던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이들의 ‘유해함’은 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때로는 지향되어야 할 무언가가 된다. 

그림 설명 시작.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던 변재원 前정책국장의 인터뷰 중 한 장면이다. 장애인을 차별하는 제도를 바꿀 수 있는 건 착하고 무해한 장애인이 아니라 나쁜 장애인이다. 변 前국장은 “착한 장애인으로 저 살아봤거든요? 살아봤더니 좋더라구요. 뭐가 좋냐면 비장애인들 입장에서 무해해요. 무해한 장애인을 원하지, 나와 맞먹으려고 하는 장애인이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사람들에게는. 착한 장애인은 개인의 삶을 바꿀 수 있지만 나쁜 장애인은 제도를 바꿀 수 있거든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씨리얼


무해와 유해의 이분법 속에서라면 우리 모두는 유해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이분법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계급적이며 비장애중심적이고 젠더적이면서 이성애중심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정상성이다. 동물해방을 위해 우리가 참고해야 할 것은 정상성이 아니다. 어긋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상성에서 탈락한 것이 아니라 정상성에 기반을 둔 차별의 결과로서 어긋난 몸을 가지게 된 존재들이 우리가 참고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무결하고 무해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더럽고 시끄럽고 냄새나고 민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해함, 즉 더러움과 시끄러움 불편함 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우리의 자원과 무기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죽는 것이야말로 친환경’인 세상 말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마크 피셔는 이미 자연화된 21세기의 자본주의 체제를 진단하면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지젝의 말을 인용한다. 이는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 더 이상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감각이 널려 퍼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지적 외부를 모두 통합해버린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제 사람들의 희망과 꿈조차 식민화하며 대안에 대한 상상력을 메마르게 하고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대기업 자본이 ‘비인간동물’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느끼게 되는 ‘인간동물’의 고통까지 상품화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기에 현재 판매되고 있는 비건 상품들을 구매하는 것 이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자본이 내어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내는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개인화된 비건 실천 그 이상을 상상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 된 것이다.


일상에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것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할 수도 없다. 권리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 중심적이기에 기만적일 수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어찌 됐건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환경-동물-인간 사이에 설정된 위계적 질서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왜 저들은 착취되어도 괜찮은 위치에 놓여있는지, 이들이 동물이라서 그런 것이라면 이는 동물이 인간보다 ‘열등’하기 때문인지, 열등하다면 그런 상황에 놓여도 되는지, 애초에 인간과 동물 사이에 놓인 우등과 열등의 기준은 누가 설정한 것인지 등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답해야만 하는 순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면, 이에 대항할 방법 중 하나는 일상 속 비거니즘 실천처럼 일단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비건 실천이 세상의 모든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비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체제는 가만히 내버려 두고 죽임당하는 동물만을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한 만약에 죽임당하는 동물만을 구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짐승 같은 삶’이라는 비유로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체제와 함께 이곳에 내버려진다.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없이 비건을 하자고 권유하는 것, 더 나아가 무해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며 비건 실천의 효용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기업이 타겟팅 하려는 비건 시장의 확대만을 의미할 것이다. 이미 적지 않은 대기업에서 비건 상품을 연구하고 출시하면서 그 조짐이 보이고 있지만, 비거니즘 운동의 승자가 자본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해한 존재가 되자는 말은 지금처럼 소비자의 위치에만 머무르고 있으면 동물이 더 이상 착취당하거나 죽지 않고 기후 위기도 해결될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무해한 존재가 되기 위해 비건이 되자고 하기보다는 유해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에서 우리의 행동을 시작하자. 오뚜기 비건 카레볶음밥을 간편하게 데워 먹을 뿐이면서 우리가 무해한 존재이며 지구를 구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어떠한 마음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면서 거대한 쓰레기 생성소와 착취 발전소가 되어 일상을 살아가도록 하는 체제에 대항하는 목소리들을 만들고 엮어내자. 


편집위원 숙영/ sonsy213@gmail.com



참고문헌

단행본

김도현 (2019).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 봄. 

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2000). 에코 페미니즘. 손덕수·이난아(번역). 창비.

마크 피셔 (2018).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번역). 리시올.


기사 및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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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2016). 파시즘의 욕망체제를 전복할 소수자들의 전쟁기계를 작동하라. 비마이너. Retrieved from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06

이연숙 (2021). 급진적 부정성을 위해서. zineseminar, 01. Retrieved from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1/%EA%B8%89%EC%A7%84%EC%A0%81-%EB%B6%80%EC%A0%95%EC%84%B1%EC%9D%84-%EC%9C%84%ED%95%B4%EC%84%9C/ 

우춘희 (2021.02.10). 임금 안 주고 협박 “너 불법 만들어 버린다”. 일다. Retrieved from https://www.ildaro.com/8963 

조수근 (2021.09.12). 비건 테라리움. 대학알리. Retrieved from https://www.univalli.com/mobile/article.html?no=23571

채효정 (2021). 탈육식과 동물해방운동. Off magazine. Retrieved from https://off-magazine.net/TEXT/2021-hyojeongca.html

한겨레 (2021.02.16). 더는 뺏길 게 없는 도살장 앞 흰 소..'비질'은 계속된다. 한겨레. Retrieved from https://news.v.daum.net/v/20210216105629696?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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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2022.05.23).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 "차별금지법, 준비는 다 했는데 제정은 누가 할래?".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 연대 차차. 접속일 2022.05.27. Retrieved from https://sexworkproject.tistory.com/143 

그리고 장애인 범죄집단으로 이직한 이유 | 장애인권 | 씨리얼 사회탐구 (2021). 씨리얼. 접속일 2022. 05. 27. Retrieved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P9Tf8JBR5TM&t=2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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