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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호 독자와의 만남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후 처음 열린 이번 독자와의 만남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병행으로 이뤄졌습니다. 덕분에 지난 146호 독자와의 만남에서 줌(Zoom)으로 뵀었던 홍윤 님을 실제로 뵐 수 있었고, 오랜 독자이신 윤호 님과 홍익대 교지 《와우》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수경 님 역시 대면으로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현재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계시는 충원 님은 줌으로 참석해 소감을 나눠주셨고, 여름호부터 함께 활동하게 된 편집위원 서현 역시 독자로 참석했습니다. 5월 19일 저녁에 나눴던 대화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리해주신 분들을 비롯해 저희 봄호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 


책 전반 평가 

열음 이번 특집이 ‘장애’죠. 오래전부터 계속 특집 후보였던 주제기도 하고, 편집회의 초반에는 탈시설장애인당이라는 확실한 글감이 있으니 이 김에 다뤄보자 했던 건데요. 이후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굉장히 시의성을 띠게 되었죠. 그래서 참 마음이 아픕니다.


상민 책이 꽤 늦게 나오긴 했는데 그래도 마침 딱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나와서 그때 기념 대자보를 붙이고 그 앞에서 책을 배포했었거든요. 그래서 나름 의미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윤호 장애라는 의제가 상당히 복합적이다 보니 어떻게 생각을 정립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해왔었는데, 이번 호를 읽으면서 명확히 정리됐다기보다 오히려 다양한 면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어요.


홍윤 표지 얘기를 해보자면, 뒷면 우크라이나 국기의 경우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역시 있어서 좋았고요. 늘 《고대문화》의 표지에 정말 감탄하는데 이번 앞표지는 특히 압도적으로 느껴졌어요. 해체되어 있는 글자들을 따라가면서 단어를 조합해 보았을 때 ‘고유함’, ‘결함’ 등이 읽히잖아요. 특히 장애에서 ‘ㅐ’가 ‘H’로 표현되고 그게 ‘HIV’로 연결되는데 또 'V'를 거꾸로 읽으면 ‘소음’의 'ㅅ'이 되는 연결이 정말 좋았어요.


수경 주제가 되게 시의성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의도한 게 아니었다고 해서 좀 놀랐어요. 장애라는 주제에 대해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고 이야기를 해야 되잖아요. 《고대문화》는 날카로운 분석이나 감명 깊은 문장을 담아내면서도 우리가 알고 목소리 내야 되는 부분에 대해 정확하게 써주신 부분들이 많아서 좋았던 것 같아요.


충원 저는 6년 넘게 《고대문화》를 읽고 있는데요, 물론 비용적인 측면 때문에 그렇겠지만 이번 호부터 광고가 실리게 된 점이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특집 주제인 '장애'에 관해서는 이전부터 이준석 대표의 장애혐오적인 발언과 행보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동안 답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이번 《고대문화》를 보면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은 것 같아요. 



편집실에서

상민 초고를 쓴 다음에야 알게 된 일인데, 이 영화(〈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박경석 대표가 건물 벽에 “나 박경석,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라고 쓰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실제로 페이스북에서 동물권 활동가와 장애활동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대요. 물론 저는 양쪽의 입장을 다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개가 아니다’라고 선을 긋기보다는 ‘개면 어떠냐’는 식으로 함께 나아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윤호 대학교 와서 여러 얘기를 듣고 가장 먼저 안 하게 됐던 것 중 하나가 “내가 뭐도 아니고”로 말을 시작하는 거였어요. 그 부분에 대해 잘 고찰해서 실어주신 것 같아요. 제가 ‘뭐’라는 걸 부정하면서 그들과 선을 긋는 것에 대해서 저도 계속 환멸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 고대문화 스스로 받아들이고 당당할 수 있는 점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충원 ‘나 역시도 언제라도 괄호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부분이 가장 뇌리에 박혔고, 또 이번 특집이나 다른 글들의 주제를 관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에 “고대문화, 정신병자입니다. ~ 그 누구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보통은 보기 어려운, 엄청 파격적이면서도 약간 표현상에 있어서 어떻게 보면 '살짝 좀 그렇지 않나'라고 말씀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 오히려 파격적이어서 읽어 나가는 데 있어서 가독성이 더 높아졌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홍윤 대학에 와서 읽어본 모든 교지 여는 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그 ‘괄호’가 부지불식간에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존재로 말해지는 것이 저도 평소에 고민을 하던 부분이었거든요. 한참 정치권에서 '개돼지'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쓰였었는데 그런 게 동물의 본질에서 떠나서 부유하고 있는 이미지이긴 하지만 '개 패듯이 패도 된다'라는 관용구 같은 걸 보면 상투어가 되었다고 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사용하는 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을 하게 돼요. 언어는 관습이잖아요. 부지불식의 관습이 여태까지의 그런 상투어들을 만들었던 거라면, 앞으로 우리가 그런 관습을 언중으로서 바꿔 나갈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했던 게 ‘이제 부정문이 아닌 긍정문으로 말하겠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나는 A이지 B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긍정문으로 바꾸면 ‘나는 A다’가 나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음에 예시로 ‘나는 B다’들이 나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뭘까, 왜 A를 말하려고 하던 사람들의 문장 구조를 바꿨을 때 B를 긍정하는 문장이 남게 됐을까 하는 고민을 좀 했어요. 그렇게 의아했던 것이 뒷부분에서 풀어졌는데요, ‘기꺼이 괄호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런 문장을 써주셨잖아요. 이 말을 읽고 앞에 있는 긍정문이 B로 치환된 게 받아들여졌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고대문화가 괄호에 놓였던 B를 스스로라고 말하는 문단에서 좀 심하게 감동을 받았고, B를 긍정하고, 하지만 그 B가 기꺼이 되겠다는 말씀에 상당히 위로를 받았어요.


열음 상민이 처음에 이 ‘나 상민 정신병자입니다’ 하는 문장을 가져왔을 때 이게 기만적 서술이 아닐까 하고 이야기가 계속 나왔지만 그래도 저희가 이렇게 쓰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유지되었습니다. 


홍윤 괄호에 있는 것들이 부지불식간에 남겨지는 것들이라면, 거꾸로 말하면 그 괄호 안에 있는 것들은 A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이중적인 차별을 받고 있다는 거잖아요. ‘말해질 수 없을’ 정도의 차별을 받는 것들을 ‘말해질 수 있는’ 것으로 꺼내기 위한 작용도 역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평소에 마주하는 언어에서 괄호에 무엇이 들어가고 있는지를 의식하면서 보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굉장히 선언적이잖아요. “그 누구도 남겨두지 '않겠습니다'”가 아니라 “않습니다”라고 쓸 때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이전 문장과 이 문장을 '그리고'라는 접속어로 이어주셨어요. 내가 기꺼이 스스로 괄호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의 것들을 차별의 영역에 남겨두지 않으려는 우리의 방식이라고, 그렇게 이어졌기에 이 글이 당사자성에 대한 기만만으로 남지 않고 고대문화라는 매체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의지의 천명으로 보였습니다. 감동받았어요.


시선; 봄에서 겨울을

홍윤 아,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봤어요. 깔끔해서 더 보탤 말이 없어요. 짧은 토막글인데도 ‘시선’이라는 키워드처럼 각자가 이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가 다 담겨 있어서 좋았어요.


상민 일반 뉴스에서 하는 얘기랑 어떤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하게 되는데, 짧은 분량임에도 그 글에서 주장하는 바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더라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번 여름호에서는 쉬어가게 되었습니다. 


학내 — 총학생회 “논란”?

기영 개인을 비난하고 가해자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도 분명 응당한 처벌의 차원에서 필요하지만 그게 운동적 차원에서 어떤 면에서는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왜냐하면 그 한 사람을 공동체에서 축출하는 것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생각을 담으려고 노력했던 글입니다.


홍윤 방금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게 잘잘못을 가리고 그래서 가해자는 학생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려는 게 아니라 학생사회, 또는 학생 자치라는 것 자체가 대표자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 경우는 ‘다 너가 잘못했다.’ 라고 말하는 상황인데 그 사람만 반성을 못 해서 선본원들이 다 나가버리고 다시 학생회를 꾸렸던 거겠죠. 내부에서도 그렇게까지 소통이 안 되는 걸 보면 총학생회장을 계속했어도 어떤 총학생회장이었을지 뻔하다는 평가가 공감이 갔어요. 피해자가 공론화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학생 사회가 어떤 것인지, 하지만 대표자를 비롯한 총학생회라는 기구가 그런 정신을 좇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잘 지적해주신 글이었습니다.


충원 총학생회장은 학생 사회를 이끄는 리더잖아요. 그런데도 청문회 때마다 기성 정치인들이 보여왔던 모습, 그러니까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나 절대 사퇴 못 한다’ 하고, (좌중 동의) 오히려 더 뻔뻔하게 법적 대응까지 하는 이런 모습이 기성 정치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학생 자치를 통한 자정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약간 해답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영 간단하게 생각하면 학생 사회가 역량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실제로 총학생회 모델이라는 것 자체가 7, 80년대 운동권 모델이잖아요. 그 모델의 구조가 그때의 정치적 지향을 관철하기 쉽게 만들어졌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요. 당시 내세웠던 정치적인 의제와 구호가 사라진 상황에서 조직을 개편해야 하는데 그걸 실질적으로 실행할 역량이 없는 거죠. 그래서 한참 몇 년 전에는 회칙대로 하는 그런 회칙주의 학생회를 싫어하는 것이 대세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회칙조차도 지키는 게 점점 버거워지고요. 근데 그 구조를 바꿀 역량은 내적으로 없고, 그런데 총학생회의 대안 기구가 있냐고 했을 때도 답이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 상황이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생 사회의 자정이 어떻게 가능할 것이냐는… 원칙적인 제 생각을 말하자면 역량을 키워야 바꾸는 게 가능할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싶네요.


홍윤 또 저는 이렇게 결함이 있어도 커버가 되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고 봐요. 만약 여성 자치자였으면 그와 유사하거나 혹은 더 작은 결함이 있더라도 출마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규상 씨 스스로의 문제의식이나 감수성이 대단히 떨어져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 너무나 너그러운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거죠. 그렇게 나와도 아무 일도 없었던 선례가 정말 많아요. 한국 사회에서는 많은 가해자들이 ‘나도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하며 활동을 멈추지 않고, 가해 사실이 공론화되는 것은 재수없는 해프닝 정도로 여겨지잖아요. 아무튼 너무 고생하면서 쓰셨을 기사라는 생각이고 후속 보도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학내 — 여전히, 그럼에도 다시 ‘뉠 곳’

상민 원래 안암 주거환경 전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기획했으나, 기숙사에 대해 쓴 것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글이 나와서 학내 기사로 실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읽으셨나요?


윤호 제가 2017년 입학했을 때 기숙사 문제에 관해서 현수막이 진짜 많이 걸려 있었거든요. 기숙사 신축 문제로 운동도 많이 하고, 집회 같은 것도 하고, 학생회에서도 되게 중요시하기는 문제였어요. 그런데 이 근처 원룸 주인분들께서 반대하셔서 무산됐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로부터 일보 전진도 없는 것 같아 충격을 받았어요.


홍윤 코로나19가 유행하고 기숙사에 학생들이 안 살 때가 기숙사를 개조할 적기였을 텐데 골든타임을 놓친 것 같아요. 글 말미에 보면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나름의 방법을 연속적으로 제시하셨잖아요. 이런 문장들을 나열하기는 쉽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이행하는 게 어렵죠. 어떻게 실행으로 옮길지도 함께 고민되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더 추가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물론 편집위원 개인이 혼자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선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더라도 의제를 던지는 것 자체가 교지의 기능이기도 하니까요. 몇 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기숙사 의제를 다시 다루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집 여는 글 — 당신의 빈자리

홍윤 요새 많이 화제가 되었던 시위 이야기로 특집을 열어주셨더라고요. 다수의 휠체어 이용자가 이동한 것만으로 이렇게 문제시되는 이유는 행위의 당위성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불편’을 겪었다는 것이잖아요. 다른 개인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는 운동이 ‘나쁜 운동’이 되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어요. 집회와 결사의 자유라는, 초등학교 때 배우는 내용조차도 휘발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민 저는 솔직히 말해서 이 시위가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맞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다면 그 피해에 대한 배상이 있어야하는 것은 맞는데, 그 의무는 시위를 한 사람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죠. 회사나 학교가 정당한 지각 사유로 인정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회사나 학교에 따져야 하는데 전장연에 따지고 테러를 하는 상황이잖아요. 여기에는 당연히 그들이 ‘장애인’이라는 약자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요. 윤석열이 자기 출근한다고 길을 막아도 윤석열한테 따지는 사람 없잖아요. 이런 구조적인 얘기는 덮어두고 몇 분이 지연됐고 누가 중간고사를 못 봤고 하는 얘기만 나오는 걸 보면 답답하죠.


특집 — 탈시설장애인당(當) 대(對)통령 경선 취재기

상민 일단 저는 탈시설장애인당이라는 기획을 작년 서울시장 선거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봄호 발간 시기상 대선을 다뤄야 하기는 하잖아요. 그런데 일반 언론처럼 이재명이 어떻고 윤석열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다루기는 싫었고요. 그래서 대선이나 정치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다루면서도 언론에서 잘 주목하지 않았던 탈시설장애인당의 대통령 경선에 대해 써보게 되었습니다. 


윤호  52쪽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거든요. “많은 비장애인들은 ‘아무 잘못 없는’ 시민들을 인질로 잡는다고 했다. 그런데, 비장애인들은 앞서 말한 현실에 대해 ‘정말’ 아무 잘못이 없는가. 그저 그렇게 믿어도 되는 편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너무 맞는 말이고 공감하는 말이지만 항상 이렇게 말을 하면 한 번도 자신이 약자 위치에 서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버튼'이 눌리더라고요. 이걸 읽으면서 이런 분야에 조금만 더 관심이 없었으면 나조차도 잘못하면 기분 나빠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버튼이 눌리지 않게 하면서도 설득을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있을지를 고민했었고요…. 이 글의 좋았던 것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나누면서 장이 끝나서 이게 이렇게 진행되는 글이 아니지 않았나 하고 조금 의문을 가졌었는데, 다음 페이지에서 다시 저쪽 세계를 이쪽 세계로 만들어야 한다며 봉합을 해서 글이 더 인상 깊게 남았던 것 같아요


상민 아, 네 맞습니다. 그 부분은 일부러 글이 끝난 것처럼 여백을 좀 남기고 다음 문단을 다음 페이지에서 시작하도록 의도를 했어요.


홍윤 58-59쪽 걸친 문단 끝부분(“탈시설장애인당의 아홉 후보가 스스로를 ‘대통령 후보’라 부르고 ‘경선’과 ‘당원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 과정은 패러디인 동시에 이들이 정말로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옆에 ‘소름’이라고 써놨는데요 (웃음). 탈시설장애인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수행이 어떻게 기성 정치에 균열을 내는지를 말하며 버틀러를 인용한 이 문단은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해요.


수경 이 글에서 날짜를 보면 1월부터 선전전을 계속 나가신 거더라고요. 이게 막 핫해지기 한 발 이전에요. 장애인 지하철 시위를 언론에서 다룰 때 장애인들의 목소리로 기사가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 것에 비중을 두고 기사가 쓰이고 있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이 글을 읽고 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데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있었을까 하는 식으로 시각이 바뀌었어요. 아침에 등교하면서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나 이러한 것들을 보게 되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이동권을 위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까 싶고. 이렇게까지 다소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나서야, 이제서야 관심을 갖기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읽으면서도 마음이 안 좋았고요.

그리고 말씀하셨듯이 패러디 얘기를 해주시면서 정치, 대선 얘기와도 연결을 엄청 소름 돋게 구성을 해주셔서 읽으면서 정말 소름이 돋았거든요. 마무리까지 느끼는 것이 많았고, 만감이 교차했던 그런 기사였습니다. 굉장히 길지만 일기처럼 날짜별로 서술되어 있어서 읽기 편했고 또 읽기 편한 만큼 생각해볼 만한 점이 많았고요. 조금 허망하게도 코로나에 걸렸다는 부분 같은 걸 보면서 글 구성이 재미지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충원 이전까지는 탈시설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무했었는데, 읽다 보니 진짜 인간으로서 본연의, 당연한 것을 투쟁하는구나, 진짜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데 이렇게까지 힘이 들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또 부양의무자 기준 관련해서는 이왕 고칠 거면 제대로 확실하게 고쳤어야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매하게 고쳤을 때 가장 무서운 게 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떠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쳐나가고 대응하겠다고 말을 꺼냈다면 그에 대해서 합당하게 바꿔 나갔어야 되지 않나 싶은데 문재인 정부에서 그러지 못한 게 안타까움이 굉장히 크네요.

이동권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제가 종종 서울을 가보면 저상버스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근데 광주도 나름대로 저상버스가 있는 편이지만 제 본가인 영암에는 저상 버스가 한 대도 없어요. 좀 더 큰 목포 역시 저상버스가 거의 손꼽을 정도로 없는 수준이고요. 그러다 보니까는 장애인이 생존에 필요한 서비스를 받는 데 있어서도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너무 큰데, 지방에 있는 장애인들의 이동권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된 대책을 수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좀 개탄스러운 심정이에요.

그리고 이번 호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 52페이지에 있는데, “비장애인의 이동권을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점거했을 때야 비로소 방해를 받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에 그들은 분개했다. 하지만 장애인에게 그것은 평생 동안 겪는 일이다.” 이 페이지만 놓고 그때 한 2시간 가까이를 생각했었거든요. 먹고 자고 이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의 불편 때문에 그들을 욕하는 걸 보면서 아무리 자기가 살기 바빠도 인간으로서 그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종합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글이 장애 그리고 탈시설에 대한 개념을 단단하게 해주는 동시에 확실히 제가 스탠스를 좀 제대로 취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특집 — 규정당할 것인가? 규정할 것인가!

해진 작년 여름호에 다른 성원이 시선으로 뚜렛증후군이랑 기타 등등 질환이 장애 범주로 들어갔지만 HIV 감염은 여전히 장애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내용을 썼었거든요. 그 이후로 계속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특집이 장애로 정해져서 이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더해서 저도 퀴어고 주변에 퀴어 친구들이 많으니까 성병이나 성소수자가 마주하는 편견에 대해서 더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던 것도 한몫을 했고요.


윤호 평소에 에이즈에 대해서 교육과정에서도 많이 접하잖아요. 교육 영상에서는 그냥 ‘콘돔을 끼면 아무 문제가 없고 침으로는 옮지 않고’ 이런 얘기만 하다 보니까 정작 감염인들이 차별받는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건 병일뿐이고 병 걸려도 잘 사는 모습만 보여주니까. 그런데 정말 걸린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차별받고 진료부터 거부당한다는 걸 알게 되고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그냥 ‘에이즈 걸리면 이렇게 하면 괜찮고 이렇게 하면 괜찮고’ 이런 거를 알려주기보다는 지금 사회가 에이즈 걸린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는 시선이 이렇고 정말로 어떤 부분은 괜찮고 어떤 부분은 조심을 해야 하는지 이 글처럼 차라리 알려줬다면 무지에서 오는 차별은 적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윤 저도 에이즈를 동성애자의 문란함과 연결하는 사고방식이 질병의 특성이 아니라 성소수자를 혐오하기 위해 질병을 이용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혐오의 방향이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과 에이즈라는 질병 양쪽을 동시에 향하고 또 연결되는 거예요. 에이즈가 장애로 분류되는 나라도 적지 않은데,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생리적인 상태가 이 나라에서는 질병이고 저 나라에서는 장애고, 어떤 데에서는 치료가 가능한데 다른 데에서는 복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건 굉장히 인위적인 거잖아요. 이런 점에서 에이즈가 사회적으로 병리화된 질병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에이즈처럼 성(性)과 관련된 질병이면 ‘정상’의 범위에서 축출되기 더 쉬웠겠죠.


해진 무조건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집단군이 있는데 그게 유흥업소 종사자들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조항만 봐도 (성노동자에 대한 혐오나 공급자한테만 초점을 맞추려는 상황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필요할뿐더러) 에이즈가 동성애자만의 질병이 아닌데도 얼마나 그런 방향으로 이미지화되어있는지, 또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의 섹스가 노골적으로 통제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서현 저는 이걸 읽고 처음에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장애인이 되고 싶어요.”라는 첫 줄을 읽고 나서부터요. 그런데 그 충격 자체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잖아요. 그래서 반성을 했고요. 동성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해서 ‘그럼 정상적인 섹스는 뭔데?’ 이렇게 짚어주셔서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좋은 글일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떤 질병을 가지고 있던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홍윤 이 글이 퀴어 담론에서만 끝나지 않고 장애등급제 등을 언급해주면서 좋게 나아갔다고 생각해요. 등급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 장애와 비장애 이상의 이야기로 확장해서 읽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번 장애 특집의 다음 글이 정신병을 주제로 하잖아요. 글의 배치가 장애라는 영역을 관통하는 수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특집 — 정신병의 ‘교정 당함’에 대하여, 그리고 화학적 사이보그

숙영 제가 작년 12월쯤에 《비마이너》에서 유기훈 씨가 쓰신 화학적 사이보그와 관련된 연재를 읽게 됐어요. 그때 한창 약물치료에 좀 거부감이 있어서 단약을 하고 있었거든요. 내 증상이 왜 병으로 묶이는지 모르겠어서 기분이 나빴고 또 약을 먹어도 별로 차도가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마음대로 단약을 했었는데, 그 글을 읽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좀 희망을 찾게 되어서 다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약을 먹고 했었어요. 제 주변에 비슷한 이유로 병원에 가지 않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친구들이 많은데, 약의 도움을 어느 정도 받아서 새로운 상상들을 만들고 대안을 만들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어요.


서현 저는 정말 공감을 많이 하면서 읽었어요. 원래도 관심이 많았던 글감인데 숙영이 제가 가지고 있던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되는 글을 써줘서 너무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홍윤 ADHD가 굉장히 신자유주의적인 질병이잖아요. 지금의 ADHD 치료가 현대인의 사이클에 맞게 작동하지 못하는 나를 굴러가게 해주는 방법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내가 그 구조의 필요성을 받아들여야 오랜 세월 아침마다 약을 먹는 걸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신자유주의 세계와 내 몸을 화해시키면서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글의 말미에 사이보그로 확장되는 부분이 좋았던 거 같아요. 신체장애 보장구를 신체의 연장선으로 보는 사이보그 담론은 들어봤는데, 정신병에 대한 화학적 약물 치료를 이렇게 확장하는 거는 정말 신선했거든요. 그냥 시력이 나빠서 안경 쓰는 것처럼, 집중력을 높이고 싶은 날에는 이 약의 도움을 받고, 잠을 잘 자고 싶은 날에는 저 약의 도움을 받는 걸 보장구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부담감은 줄어들고 개인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사자로서도 상당히 도움을 받은 감사한 글입니다.


숙영 근데 한편으로 약을 먹는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효과만 100%로 나타나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이제는 약을 먹어도 잘 각성이 안 돼서 용량을 높여서 먹어봤더니 한 밤 9시만 되면은 몸이 너무 무거워지고 그래서 용량을 다시 낮췄어요. 그리고 제 주변 친구들 보면 식욕이 뚝 떨어져서 진짜 살이 몇 키로 빠진 애도 있고, 하여튼 부작용도 되게 많단 말이에요. 그래서 화학적 사이보그가 어쩌면 이런 현실들을 그냥 마냥 낭만화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 지점이 항상 소수자 문제에 있어서 되게 고민되는 지점인 것 같은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욕 같은 것들을 우리의 맥락에서 새로 전유하고 전복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되게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그 작업이 때로는 말장난처럼 느껴질 때도 많고 이것들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을 때도 많고요. 화학적 사이보그라는 말도 비슷한 맹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또 동시에 필요한 말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화학적 사이보그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정신의학이 가지고 있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수평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함의가 있는 한 여전히 이 아이디어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특집 닫는 글 — (어쩌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특집 닫는 글

상민 저는 이런 생각을 예전부터 줄곧 해왔었고, 책 어느 부분에서든지 쓰고 싶다고 생각을 했는데 약간 막혔었거든요. 사전에서 ‘장애’라는 단어의 뜻을 사람에게 쓰이는 것과 사물에게 쓰이는 것으로 구분해 놓은 걸 보고요. 그랬다가 마감이 와서 써야 하니까 (웃음). 두 가지 의미가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을 토대로 글을 전개해보았습니다. 

윤호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지 않나요? 소위 말해서 인권감수성이 별로 없는 친구들이랑 있으면 아예 결정장애 이런 말 안 쓰면 되거든요. 근데 어느 정도 합의된 인식이 있는 사람들끼리 있다 보면 그 말을 혐오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란 걸 아니까 오히려 어느 정도 용인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진짜 아무 혐오도 없이 이런 단어를 쓰고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항상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빻은 말'을 혐오표현이 아니라 일상적인 표현으로, 일상에 섞이게 만들려고 썼지만 정말 그것뿐인가 하는 것이 항상 집에 갈 때 되뇌는 포인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열음 더 많은 장애를 말해야 한다는 말이 좋았어요 어쨌든 장애라는 개념 자체가 정상성에서 출발을 한 거잖아요. 저는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사람인데요. 이런 제 속성이 한가할 때는 그냥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개인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당장 1교시 일어나서 가야 하는데 지각하는 불면증 환자가 되어 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은 장애를 계속 얘기하다 보면 정상성은 허물어질 거고, 그렇다면 개개인이 안고 있는 ‘장애’도 그냥 개인의 특성 중 하나로 남게 되지 않을까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어요.


홍윤 아까 탈시설장애인당 글에 나왔던 패러디 개념, 무한한 반복은 균열을 일으킨다는 말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정상성이라는 신화에 균열을 일으킬 게 자명하고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워진 역사가 있잖아요.


그리고 사전으로 접근한 건 정말 흥미로웠어요. 다의어에는 1번 뜻, 2번 뜻이 있잖아요. 1번이 중심 의미고, 2번이 1번에서 파생되는 게 실제로 맞거든요. 다의어가 가지고 있는 여러 뜻을 어떤 상황에서는 써도 괜찮다, 어떤 상황에서는 쓰면 안 된다, 고민하는 과정에서 혐오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무수히 만들어져 있는 관습적인 표현을 계속 되짚어보며,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대상이나 정체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혐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곳이 경계일 거예요. 여기서 더 나가면 안 된다 하는. 우리는 언어의 주인이잖아요. 우리는 그 말을 어디까지 쓰고 어디부터 안 쓸지 결정하는 사람들이고, 결정하면 돼요. 혐오발언은 참 사람을 피곤하게 해요. 사회구조적인 맥락에서 나 혼자서는 바꿀 수 없는 막막한 측면이 많잖아요. 그런데 이 글을 보고 언어를 도구로 삼아 조금씩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들었어요.


칼럼 — 난춘일기

수경 제가 읽어본 칼럼 중에 제일 공감도 되고 좋았던 글이어서 사이 글 쓰신 분을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이게 1년짜리 프로젝트였고 되게 밀리고 밀려서 쓰셨다고 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참 고뇌가 많이 들어가 있거든요. 이 글도 모티프 따온 것 그대로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고뇌가 잘 드러나 있잖아요. 저도 읽히기 위한 글을 쓰는 게 지금 교지 활동을 하면서 처음이거든요. 보통 '글'만을 위해서 하는 건 더 뭔가 엄중하고 많은 사람들이 좀 사활을 걸잖아요. 그래서 이 글을 쓰시면서 약간 맥을 그릴 수 있었어요. 글에 대한 애증도 너무 잘 느껴졌고요. 정말 좋았습니다. 


홍윤 ‘난중일기’와 ‘난춘’이라는 말과 ‘신춘문예’라는 말과 ‘일기’라는 형식과 새소년의 〈난춘〉 노래 가사 같은 것들이 ‘춘()’이라는 교집합에서 엮이게 되는데, 이걸 다 엮으면서 정렬을 너무나 잘 해주셔서 그 연결고리를 찾는 게 좋았습니다. 단순한 신춘문예 제출기에서 그친 글이 아니라, 학문과 제도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의 비평 글이라는 게 계속 보였어요. 마지막 문단은 더 이상 비평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문학을 쓰셨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단어들의 조합을 만드셨는데 예뻤어요 다.


칼럼 — 용산 다크 투어: 무엇을 그릴까요 

기영 우선 제목이 ‘무엇을 그릴까요’이냐면요. ‘그리다’의 뜻이 두 가지잖아요. ‘그리다’가 과거의 것을 생각한다는 뜻도 있고 그림을 그린다는 뜻의 ‘그리다’도 있잖아요. 그래서….


편집위원 일동 저희도 처음 듣는데요?


기영 이제야 밝혀지는 사실! (웃음) 어쨌든… 그래서 과거의 무엇을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그릴지가 운동에 있어서는 언제나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제목을 적게 되었어요. 그리고 아마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마지막에 셀로판지에 사람들이 내가 꿈꾸는 용산정비창의 모습을 그리는 장면도 이런 운동의 의미를 담는 상징을 지닌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윤호 용산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큰 사건 이후에는 위에서 힘으로 찍어 누르면서 담론이 많이 와해된다고 많이 느꼈거든요. 근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도 이런 내용의 투어를 하는 건 되게 많이 노력이 필요하고 실천적인 부분인데 이걸 계속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요. 이런 투어를 글로 담아주신 게 의의가 큰 것 같아요. 또 읽는 사람이 같이 투어를 온 듯이 적어주셔서 정말 재밌게 읽었던 것 같아요.


수경 용산 참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접하는 건 처음인데요. 서울에 어려움에 처해 계신 분들이 있고, 이 문제가 일단락된 게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데 제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무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 같아요. 이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을 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앞으로도 관심을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충원 저는 용산 참사 현장을 저는 직접 봤었어요 당시에.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래서 이게 분명 13년이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분들의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게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참사 당시 시장이었던 오세훈 시장이 현재 다시 서울시장으로 부임을 했고 차기 선거에서도 당선이 될 거 같은데 그때 그 망루에 올라와서 울부짖고 한탄을 표했던 사람들의 아픔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되면서, 이 글에서 거론된 다크투어가 그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잊지 않게 하는 데 있어서 소기의 의미를 남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참여 소감

수경 우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재밌게 읽었던 《고대문화》에 대해서 더 재미있는 말씀 많이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의미 있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저희 편집실에도 《고대문화》 잘 비치해두고 열심히 읽을게요. 여름호 때도 독자로 만나 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충원 6년 넘게 관심 가져왔던 《고대문화》를 가지고, 그 구성원들과 서로 생각을 나눴다는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고대문화》를 읽다 보면 생각의 폭이 확장되는 느낌이에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물음표를 던져주는 것 같거든요. '나' 역시 언제라도 괄호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다음 여름호에서는 꼭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윤호 읽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던 호인 것 같아요. 지금 시기가 너무 적절하기도 했고 해서 요즘 올라온 뉴스들과 더해서 글들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 항상 생각할 수 있어서 이걸 읽으면서 정말 행복했고요. 글들이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게 만들어서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조금 더 제가 생각을 깊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서현 혼자 읽을 때보다 이렇게 얘기 듣고 나누니까 훨씬 더 와닿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고요. 내가 공부를 많이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저에게 하나의 자극이 된 것 같고요. 몇 번의 편집회의에 참여한 후에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까 한 사람이 쓰는 글이지만 편집위원들의 생각을 계속 듣고 피드백하는 과정들이 상상이 되고, 그런 면에서 교지가 되게 소중하구나 생각했습니다.


홍윤 편집위원분들을 직접 봐서 좋았어요. 《고대문화》는 편집후기가 되게 짧잖아요. 글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여러분들이 궁금해지는데, 여러분들을 알고 싶어도 글과 편집후기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서 아쉬웠거든요. 오늘 여러분들이랑 만나면서 얘기를 하면서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라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얘기를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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