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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모든 희망을 버려라 아쎄이!

[칼럼] 편집위원 민상

해병문학과 취약성을 품는 남성학-음모론 하기 


인터넷 밈 중독자의 수기, 혹은 해병문학 중독자의 간증


 나는 인터넷 중독자다. 오랫동안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정을 확인하려 스마트폰을 켰다가 관성적으로 트위터를 접속하는 스스로를 보며 느낀다. 중독은 삶의 방향성을 송두리째 규정한다. 들뢰즈는 ‘알코올 중독자는 마지막 잔의 직전까지 마시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마지막 잔이란 중독자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어지는 한계지점이다. 중독자는 오늘 마지막 잔 직전에 멈춤으로써 내일도 술을 마시기를 선택한다. 중독은 이렇게 우리를 죽음 직전까지 내몰면서 딱 그만큼만 살려놓는 식으로 삶과 공모한다. 만약 중독이 삶이 아니라면 나는 살아본 적이 없다. 중독,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을 것이다.


내가 처음 인터넷 중독자가 된 계기는 디시인사이드 합성필수요소 갤러리(이하 합필갤)였다. 로이조, 대정령 등의 인터넷 방송이 남자아이들의 또래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때였고, 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생산하고 인용하는 밈은 또래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기 위한, 그야말로 ‘필수요소’였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뒤늦게 인터넷 문화를 접했다는 조바심과 찐따 취급을 받던 초등학생 시절보다 신분 상승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열정에 불을 질렀다. 문제는 내가 합필갤을 접한 2013년이라는 시점이었다. 인터넷방송문화가 급부상하며 인터넷 커뮤니티의 중심이 디씨인사이드에서 아프리카TV, 티비플, 유튜브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었고, 신규유입이 줄어 위기에 빠진 합필갤 유저들은 이호성, 노무현 등의 인기 소재만 재료로 합성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합필갤의 노무현 합성물은 ‘MC무현’ 리믹스의 기원이 되었고, 이는 초기 일베가 빠르게 남성 청소년들을 끌어들인 유인이었다. 거의 모든 또래들이 ‘여긴 응디시티’를 부르고 다니는데 나도 끼지 않을 겨를이 없었다. 그때 내게 또래집단 바깥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가지 다행인 건, 그 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적 지형도나 관련한 개념 틀이 전무한 상태이니 당연했다. 주변의 또래들도 마찬가지였다. 밈은 그 자체로는 텅 비어있는,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놀이’일 뿐이다. 모든 밈과 유행어의 하이퍼링크를 눌러 기원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밈의 문형은 사실상 유령처럼 넷을 부유한다. 특정 용어 사용이나 손가락 모양을 근거로 그 사람의 정치 성향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이다. 기호 논쟁은 정치의 언어에 대한 고민을 숨은그림찾기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 중독자가 면죄부를 얻는 것은 아니다. 인셀들이 동일시하던 캐릭터에서 트럼프주의자들의 상징으로 전유된 ‘슬픈 개구리 페페’는 오늘날 미국의 혐오범죄, 제노포비아, 여성 혐오에 뒤따르는 그림자이자 워터마크로 기능한다. 밈은 그 자체로는 정치적이지 않다. 폐쇄적인 공동체 내에서 공유되는 밈은 정치적으로 전용되는 것을 피하려는 성질이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일단 정치적 자원에 성공한 밈은 더욱 유해해진다. 그런 면에서 나의 무지는 충분히 위험했고, 운이 좋은 편이었다. 때마침 중2병이 도져 록 음악과 인디음악, 그리고 문학을 읽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일베가, 아니면 적어도 인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문학을 읽는다고 인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당장에 주의를 돌려주었을 뿐이다.)

당시의 난 세상에 인셀로서 냉소하는 대신에 힙스터로 냉소하기를 택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내게 인터넷은 또래들에 섞여 들기보다 취향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장소로 변했다. 문학과 예술이 꿈이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그냥 여러모로 아는 척하기 좋은 분야처럼 보여서 그랬다. 중학생 시절의 진부한 허영심이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을 그나마 차악으로 바꾸어 놓았음을, 나중에야 깨닫고 안도했다.


그러나 이 안도가 섣부른 자기기만에 불과했음을 군대에서 깨달았다. 20대 대선을 맞아 ‘정치적 중립을 준수해달라’는 전달 사항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밤이면 이어지던 동기들의 열띤 정치토론을 흘려듣다보니 나날이 정신이 피폐해져 갔다. 신인성검사에서 ‘성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에 ‘가끔 있음’이라고 답했다가 간부들에게 매달 불려 가 ‘여자친구는 아직 만나고 있냐’는 물음을 받고 있던 때였다. 요즘 사이는 어떤지, 가장 최근의 외출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세세하게 보고했고, 간부들은 꼼꼼하게 수첩에 적었다. 그들은 여자친구만 없어지면 내가 남자들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물었다. 이 일이 다른 병사들의 귀에 들어갈까 불안하고 두려웠다. 나의 정보가 적힌 ‘관심병사 리스트’가 관리부실로 유출되어 몇몇 병사가 그걸 봤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무서워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러다 보니 남자를 점점 미워하게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남자’ 답지 않은 남자들도, 괜찮은 남자들도 있었다. 그들과 괜찮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하나의 ‘남자’를 의식하고 수행하려 노력한다는 게 참 이상했다. 이것이 분명히 즐겨도 될 순간들도 즐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나는 퇴근만 하면 침대 위에 누워 트위터에 ‘20대 남성을 절멸시킬 수만 있다면 나 자신을 희생할 용의가 있다’라고 그다지 유익하지 않은 남혐 살풀이 같은 것을 하며 가상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남자’의 일원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신기했다. 사회에서 뭐하다왔냐는 질문에 국문과를 다녔다고 하면 ‘근데 거기에 페미 많지 않아? 고생했겠다’는 식의 다정한(?) 위로가 날아왔고, 실수로 모두보기로 인스타 스토리에 공유한 소수자인권위원회 대자보에 ‘너도 페미과 다니느라 고생하는구나… 응~ 차별할 거야’라는 내용의 DM을 받았다. 나는 누가 봐도 남자였기 때문에 ‘씹게이도 아니고’라는 친근한(?)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내 대답을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남자를 연기하기로 했다. 얼핏 단일해 보이는 남성성의 각본 속엔 무시무시하고 억압적인 남성성과 입에 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하찮은 남성성이 공존하고 있다. ‘하남자’의 한 사람으로 후자를 연기하는 법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익힌 남초 커뮤의 언어였다. 우선 대자보 스토리에 날아온 디엠에는 ‘차별 한다면 하는 남자(줄여서 한남)ㄷㄷ’라고 답장했다. 남초 밈을 사용하면서 나는 그들 틈에서 ‘남자’로 패싱되면서 일상을 보냈고, 밈에 내재한 자조와 냉소의 어법에 (나만 아는) 거부감과 조롱을 실어 보내며 정신 승리했다. 인셀들에게 ‘한남’이라는 단어가 실체 없는 ‘남성 혐오’를 추적하는 기호인 동시에 자조와 자학의 언어로 사용되듯이(“우리 진짜 한남 같지 않냐”), 남초 밈은 내 문제상황을 해결해 주지도, 고통을 치료해 주지도 않았지만, 분열을 분열인 채로 보존하고 그 틈에서 숨 쉴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남자들의 언어가 나를 죽인 만큼 그에 빚졌다. 밈은 나를 조금도 성장시키지 않았다. 그저 살려두었다. 그렇게 점점 밈에 중독되어 갔다. 당시에는 그것이 나의 남자됨을 즐길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다.


그때 내가 특히 빠져있던 밈은 해병문학이었다. 뒤늦게 해병문학을 접한 서평가 금정연이 “하나의 예술사”를 발견했다며 당혹스러워했던 것처럼, 나도 최초의 당혹감을 빠르게 매혹감으로 바꾸며 해병문학에 매료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병문학은 ‘남혐’에 빠진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해병문학은 내게 나태주의 시였고 미움받을 용기였고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였다. 급기야 친구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해병문학의 예술성을 전파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반쯤 아는 것들과 나와 너무 가까워 정직하게 바라볼 용기도 없고 거리도 확보되지 않은 것들을 얼기설기 엮어 (적어도 내겐) 그럴듯한 이론들을 만들었다.


해병문학을 비롯한 각종 인터넷 밈들이 이미 그러하듯이, 나의 이론들은 지독한 음모론에 불과했다. 음모론은 세계와 나 사이에 자리한 겹겹의 지층들을 고려하지 않고 내게서 비롯된 단 하나의 기술과 체계로만 둘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인식의 한계를 초과하는 거대한 세계를 마주하는 개인이 자신의 경험과 선입견을 연장삼아 세계를 조각내면서 음모론은 발생한다.


그렇다면, 개별적이고 특수한 남자들이 거대한 ‘남자’라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는 일, 혹은 남성학 또한 이미 음모론이라고 주장해 보고 싶다. ‘초등학교 때 우유는 늘 남자아이들만 옮겼다’라는 피해경험을 도입부 삼아 시작하는 어떤 남성들의 이야기는 한국남성이 여성과 성소수자보다 손해를 보며 살고 있다는 음모론적 세계관으로 자라난다. 내가 생활관 구석에 찌그러져 만들어 낸 남성학 역시 내가 남성으로 행해온 자기 억압과 유해함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음모론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이론은 나의 위치에서 남자들을 얼마 정도 이해하고 얼마 정도는 오해하면서, 남자를 ‘남자’로 납작하게 볼 때만 성립했다.


만약 나의 음모론이 그들의 음모론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음모론의 주인공, 세계의 비밀을 알아내고 도취한 자리에 놓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조금 외롭고 지쳤을 뿐, 이야기의 주인공도 그렇다고 피해자도 아니었다. 인터넷 중독자, 해병문학 중독자일 뿐이었다. 해병문학은 그런 내게 ‘남자’라는 전체 속에서 이를 갈고 있는 무수하고도 혼자인 남자들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외롭고 약하고 무력하게 생활관 구석에서 ‘따흐흑’하고 울고 있었다. 그 약함과 무력함이 유해하고 혐오적인 것으로 변하기 전에 선수를 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처럼 ‘나는 혼자고 저들은 전체다’라는 푸념이었지만, 그 결과 나부터가 어느 정도 ‘혼자인 전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와, 너와, 세계의 못생김이 하나로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 비로소 나의 음모론은 희망을 담을 지저분한 그릇이 되어주었다. 낙관을 발라내고 남은, 왜소한 희망이었다.


부정확하고 오해 가득한 해병(문학)의 역사


한국의 남초 인터넷 문화는 언제나 군사주의와 함께했다. 군가산점제 폐지는 남성들이 군대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서사를 탄생시켰고, ‘성난 예비역’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성재기에서 신남성연대로 이어지는 남성 인권 음모담의 핍박받는 주인공으로, 병사 처우 문제에 미적지근한 ‘꼰대’들과 국방부에 분노를 표출하다가도 국방과 관련한 문제에선 급격히 보수화한다. 전자를 향하던 분노는 국방에 ‘무임승차’ 한다고 여겨지는 여성과 공익, 약자들에게로 돌려지며, 여성 징병과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정치적 밈을 중심으로 결집한다.


Xtvn 예능 ‘최신유행프로그램’에서 군대 이야기를 반복하는 군복학생들을 ‘군무새’, ‘군부심’ 등의 어휘로 지칭한 콩트에 쏟아진 비판은 ‘성난 예비역’들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당초 방송사 시청자게시판에서 "나라 위해서 2년간 고생했으면 부심 좀 부리면 안 되느냐. 사과문 올리라“는 식으로 전개되던 반발은 디시, 펨코 등에서 핫한 ‘떡밥’으로 돈 뒤에 해당 프로그램이 군복학생 뿐 아니라 6.25 참전용사도 조롱했다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이는 병사로의 처우와 징병제에 대한 불만과는 별개로 ‘군부심’과 ‘군대썰’이 예비역 남성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자원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군대썰을 구전시키며 피해의식을 공유하는 한편 자신들이 대외적으로는 적대하는 군사주의에 환상적으로 접속한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군대썰은 군대 경험을 서열화해 ‘진짜 사나이’를 판별하는 동시에(”뭐 행정병? 넌 어디가서 군대 다녀왔다고 하지마라”), 군대라는 폐쇄적 공간에서의 경험을 ‘선임으로 만나면 ㅈ되는 관상’ 등의 골상학을 통해 보편적 인간군상에 대한 통찰로 확대한다. 계급과 서열로 위계지어진 남성들의 세계는 정글 같은 세계의 무정함과 연결되며 남성적인 것의 세계화, 혹은 세계의 남성화라는 결과를 낳는다.


해병대는 이때 한국의 군사주의가 통치 장치로 관리해 온 ‘남성’ 젠더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져왔다. 인천상륙작전과 베트남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해병대는 실제로 한국군의 전위와도 같은 집단이었으며, 그 덕에 어느 국가의 해병대에 비해 보아도 큰 규모의 조직을 꾸려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남성사회에서 해병대는 남성 위의 남성으로 여겨졌다. ‘해병은 만들어진다’는 해병대 속설은 곧 ‘남자는 만들어진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군사주의자에게 해병과 남자는 훈육과 폭력, 순응을 통해 제작되는 ‘작품’이다. “해병은 만들어지는 것이다(차수정, 2010:22).” 일단 완성된 남자는 신체와 물질성을 잃는다. 폴 비릴리오가 맥아더를 인용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진다’고 말할 때, 이것은 신체 이미지 없이 팔각모와 해병대 티셔츠라는 상징으로 환원되어 여느 동네 구석의 컨테이너에서 영구적인 군생활을 계속하는 해병대 예비역들을 염두에 둔 것처럼 읽힌다. 이처럼 군인과 남성의 신체에서 발생하는 균열은 해병대에서 극대화된다. 폭력을 통해 남성을 훈육하고 제작하던 전통을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훈육 전통은 지금껏 해병대의 군부심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었지만, 이것이 ‘부조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는 그대로 (잠재적) 군필들이 해병대를 조롱하는 이유가 된다. 해병문학의 출발도 해병대 예비역들의 군부심 담긴 경험담을 패러디하고자 하는 목적의식 아래 가능했다.

 

"바닥에 흘린 니 토를 아무도 대신 치워주지 않는다. 여기는 너희 집이 아니다. 아무도 니 실수를 묵인하고 넘어가주지 않는다. 여기 해병대에서뿐만이 아니다. 사회가 그렇다. 아무도 니가 흘린 똥 대신 치우고 닦아주지 않아. 그래서 무슨일이 있어도 실수하지 않도록 악으로 깡으로 이악물고 사는거고, 그래도 실수를 했다면 니 과오는 니 손으로 되돌려야 돼.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아. 그래서 다시 먹으라 한거다.
"명심해라. 해병은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책임을 피하지 않는다”

그날 나는 소주를 먹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 그날 맛동산 몇봉지에 해병정신을 배웠고 해병정신에 취했다.


해병문학의 정전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위 작품의 댓글 반응에서 알 수 있듯, 당초 해병문학의 패러디정신은 실제 해병대 출신의 군대썰과 형식상 거의 분간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병대 갤러리와 해병문학에서 해병대 출신들이 담당하는 역할이 축소되면서 해병대의 군부심을 조롱하는 놀이에서 출발한 해병문학은 독자적인 장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해병문학이 고유의 장르 영역을 구축했다는 말은, 곧 해병문학사와 해병문학비평의 기술이 가능해졌다는 뜻에 다름아니었다. 이때 해병문학사를 예술사라고 주장하는 논리적 비약은 해병문학의 패러디 기법에 의해 발생하는 담론적 효과였다.


러시아의 민속학자 블라디미르 쁘로쁘는 패러디가 대상을 과장함으로써 패러디되는 대상 내면의 공허함을 폭로한다고 정의한다. 패러디는 패러디되는 대상이 몰락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고전 서사시에서 과장은 영웅을 묘사하고 만들어 내는 수사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과장된 패러디는 한 영웅이 대표하는 세계관이 붕괴하는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림1] 초기 해병문학의 주인공 ‘황근출’ © 디시인사이드 해병대 갤러리


해병대 팔각모를 쓰고 상의를 탈의한 구릿빛 피부의 남성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 설명 끝.


이같은 쁘로쁘의 논의를 해병문학에 적용하면, 해병문학은 군사주의와 그것이 추동하던 남성성의 종말 이후에 탄생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해병문학은 영웅 ‘황근출’과 지배적 남성의 세계관을 과장하여 그것이 오늘날 지속 불가능해졌음을 폭로한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육체와 ‘우람한 포신’을 갖춘 군인 ‘황근출’과 현실의 해병대 전우회 사이의 격차를 생각해 보자. 군사주의에서 숭상하는 남성성이란 오로지 전자에만 속한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의 전사자와 상이군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제1국민’으로 호명되며 각종 선전과 프로파간다에 동원되었지만, 잊을만하면 참전용사와 국가유공자의 처우 문제가 지적되듯 그들은 ‘정상 남성’보다도 홀대받아 왔다. 그들은 가장 남자다운 존재인 동시에 가장 훼손된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시기의 ‘진정한 남성’이란 알맹이가 없는 허상이었다. 현실의 남성 중에서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해병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해병문학이 그리는 해병대의 군생활은 영원하다. 익명의 창작자들에 의해 무한히 추가되는 에피소드들은 영원히 5살인 채로 남아있는 짱구처럼, 역사와 생애사에서 탈각된 추상적인 ‘남성’의 시간을 보여준다. 매일같이 ‘전역까지 얼마 남았다(냐?)’를 반복하며 선임을 부러워하고 후임을 놀리는 곳이 군대다. ‘국방부 시계(군생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는 간다’라는 진리 아래에서 전우애는 불가능하다. ‘어차피 떠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네가 사람 구실은 하게 만들어야겠다”) 가해지는 모든 폭력은 근거를 잃는다. 그들을 묶어주고 연대의 단초가 될 공통성은 학대 받는 신체 외엔 없다.


그래서 해병문학에서 해병들의 신체는 결국 '해병수육’으로 전락하고 만다. 피와 살이라는 최소한의 공통성만이 이들을 해병대이고 남자이게 하는 요소이다. 영원히 전역할 수 없는 해병들은 수육이 되어야만 해병대를 떠날 수 있다. 해병은 전우의 고기를 먹고 전우를 위해 고기가 된다. 전우가 부족해지면 ‘포항오도기합짜세특별시’의 시민들을 ‘자원입대’시켜 전우로 삼는다. 그러나 언제나 사망자가 자원입대자의 수를 상회하는 집단은 유지할 수 없다. 해병문학이 그리는 군 내의 호모소셜은 지속 불가능한 소모 경제인 것이다.


이러한 해병문학의 세계관은 ‘해병 비문학 사태’ 발생 이후 더욱 고도화한다. 해병비문학은 해병문학 마니아들에 의해 점거된 해병대갤러리에 해병대 현역/예비역들이 귀환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해병대 내의 부조리를 내부고발하며 해병문학이라는 픽션을 압도하는 현실― 해병비문학을 제시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불가능하다’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을 상기시키듯 해병비문학 사태는 해병문학 창작자들의 사기를 꺾어 잠시 해병문학의 침체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쳐 찾아온 해병비문학 사태는 결과적으로 해병문학이 여러 형식적, 미학적 실험을 추동하는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어찌됐든 해병문학이라는 놀이는 계속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병비문학과 관계맺은 해병문학의 역사는 현실이 픽션을 초과하는 상황에서 픽션을 통해 가능한 실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이루어져 왔다.


해병문학의 성과는 여기에 있다. 지금껏 현실과 넷 커뮤니티에서 예비역 남성들의 군대썰은 그 구연자와 청중을 자연스레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었다. 이곳에서는 징병제에 대한 이들의 불만과 트라우마까지도 군대썰의 화용론적 맥락 아래 군사주의로 흡수된다, 징병제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반공을 외치며 안보의식을 다지는 예비역 남성들의 모습이 그렇다. 해병문학은 이러한 군대썰을 ‘문학’화함으로써 군사주의의 맥락에서 일단 분리한 뒤 철저한 조롱을 통해 밈으로 물화한다. 이는 물론 예비역 정체성보다 우선하는 디시인사이드의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그 덕에 해병문학의 참여자들은 픽션과 현실을 견주어 보며 군사주의와 예비역 공동체가 실은 성립이 불가능한 무능의 공동체이고, 군사주의와 그것이 가능케 하던 전통적인 남성상이 몰락했다는 사실을 감각하게 된다. 해병문학은 문학이 아닐지라도, 마치 문학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대상의 표현과 외양만을 표절하고 복제하는 밈의 예술성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세계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해병문학과 서브컬처


 그러나 당연하게도, 해병문학에서 예술성과 해방성을 추출하려는 모든 일은 어쩌면 호들갑에 불과하다. 기원부터 패러디와 조롱의 문법이 담긴 해병문학에 소위 ‘진지를 빤’ 접근은 오히려 해병문학의 생성력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일 수 있다. 크게 유행한 밈이 지상파 방송이나 광고에 등장하며 ‘사망선고’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해병문학의 나무위키 문서가 구성하는 장장 5세대에 걸친 해병문학사 역시, 해병대갤러리에서 매일 수백 개씩 리젠되는 쓰레기 더미에서 추려낸 하나의 가능한 기술일 뿐이다. 해병문학은 애초에 동질적인 남성들에 의해 창작되지 않았다. 군내 동성 성추행을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우애’ 모티프의 호모포비아적 속성을 반성하거나 변호를 시도하는 부류가 있었는가 하면 아예 원숭이두창 등의 소재를 활용해 혐오적인 맥락을 강화하는 부류도 있었다. 이 면에선 우선 ‘해병문학’ 나무위키 문서의 서술조차 일관적이지 않다. 하나의 해병문학사는 환상이다.


따라서 해병문학을 정말로 ‘문학’으로 보는 우를 범하지 않고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해병문학이 해병비문학을 스스로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동시에 데이터베이스로 활용하는 양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공동창작을 통해 ‘MCU’를 확장해 나가는 해병문학에서 픽션은 데이터베이스를 경유해서만 군대 부조리라는 현실과 만난다. ‘황근출’, ‘황룡’ 같은 주요 인물들의 설정은 장르의 내적인 논리에 따라 끝없이 갱신되는 한편, 현실 해병대 부조리 역시 해병문학이 재료삼는 데이터베이스에 기입되며 여러 작품에 변형된 형태로 출현한다.

서브컬처의 문법을 지닌 해병문학에 참여하는 군필들은 이제 ‘성난 예비역’보다는 오타쿠에 더 가까운 존재가 된다. 군사주의에 접속한 예비역 남성이 6.25 참전용사에서 이어지는 단일한 지배적인 남성 서사에 이입하는 반면, 해병문학 오타쿠는 해병유니버스 속에서 패러디되어 조각난 군사주의 남성성을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기성 문학과 구분되는 서브컬처 서사의 향유 방식에 대한 아즈마 히로키의 분석을 빌리면, 예비역 남성들은 해병문학에서 단일한 ‘거대 서사’를 소비하는 대신 각 캐릭터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식으로 장르의 내적 데이터베이스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브컬쳐의 데이터베이스는 특정 작품이나 작가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근대 이후 문학이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이입하여 국가, 민족 등의 거대서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반면, 현대사회와 서브컬처에서는 그 회로가 막혀있다. 오타쿠는 자신이 수집한 데이터베이스만을 소비하며 고독하게 ‘동물화’한다. 서브컬쳐의 이야기가 표면에서 주장하는 상위의 가치들은 그저 구실에 불과하다. 따라서 서브컬쳐로서 해병문학을 비평하는 일은 그 안에 담긴 예비역 남성들의 담론적 목표의식만큼이나 해병문학의 데이터베이스에 내재한 집단무의식, 혹은 ‘일반의지’를 추적하는 일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해병문학은 군사주의의 잔해와 부조리한 현실의 폭력을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난 예비역들이 외면해 온 남성성의 위기와 불안까지 은연중에 표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해병문학에서 위기와 불안의 정동은 해병비문학을 의식한 해병문학처럼 현실을 경유해서 모사하려는 작가적 의식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극적인 묘사가 극단화되어 현실과의 고리가 희미해진 결과로, 과잉된 패러디가 그로테스크로 변질되는 순간 발생한다. 그것은 해병문학과 예비역 남성들이 의도하지 않은 해병문학의 버그이다.


원색적인 혐오발언과 욕설, 폭식과 성적 향락이 과잉되어 발생하는 해병문학의 그로테스크와 디시인사이드 유저들의 고어 취향은 바흐친이 정의하는 카니발의 상상력과 일부 맞닿아 있다. 바흐친은 카니발의 상상력이 민중들이 금기와 위계를 일시적으로 해제하고 억눌린 욕망을 분출하도록 돕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지배계급에게 카니발이 민중의 폭력적 불만을 관리하는 장치였듯이, 카니발은 지배 질서를 공격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지배 질서에 기생한다. 카니발의 상상력은 세계의 전제 자체를 뒤흔들지 않는다. 그것은 대신 섹스, 오물을 통해 신체 깊숙한 곳까지 내려앉는다.


예컨대 해병문학에서 반복되는 동성 섹스는 ‘전우애’라고 포장되어 향락을 분출하는 통로로 사용된다. ‘전우애’ 모티프는 해병대의 동성 성추행 부조리에 기원을 두는 화소지만, 본래의 비판적 의도와는 유리되어 ‘붕탁물’ 밈의 계보와 만나면서 재맥락화되었다. 2009년을 시작으로 유행한 붕탁물은 빌리 해링턴, 반 다크홈 등 게이 포르노배우의 이미지를 ‘엽기’ 코드 아래 패러디한다. 이는 훗날 디시인사이드와 그에서 파생된 남초커뮤니티들에서 유저들이 서로를 ‘게이’라고 지칭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전까지 남성 호모소셜에서 동성애가 호모소셜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성과 함께 배제해야 할 요소였던 반면, 붕탁물의 유행은 동성애를 최소한 넷에서만큼은 호모소셜을 강화하는 기호로 활용되도록 했다.

[그림2] 오메가 버스 속 ‘오메가’의 가상해부도 ©Betaboys


가상의 오메가 해부도에서 오메가 남성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궁을 가지고 있고, 이 자궁의 산도는 항문과 이어져 있다.


해병문학의 등장인물 ‘톤톤정’이 남성 임신을 통해 낳은 아들 ‘민준이’를 부대에서 공동으로 육아하는 모습은 카니발과 그로테스크의 상상력을 도입하며 붕탁물의 오랜 계보를 갱신한다. 마찬가지로 남성 임신이 등장하는 BL의 하위장르 오메가버스{Omegaverse}에서 여성의 신체 특성을 남성의 신체에 기입해 가상의 생물학을 창조해 내듯, 톤톤정의 신체에는 항문이 산도로 설정되는 등 변형이 가해진다. 그러나 오메가버스를 비롯한 BL이 자신들이 부분적으로 재현하는 동성애자의 소수성을 어렴풋하게라도 인식하고 재현하려는 시도도 이따금 행하는 반면, 해병문학과 붕탁물에서 그런 모습은 일절 나타나지 않는다. 남초커뮤니티에 만연한 호모포비아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남초커뮤니티의 ‘게이’가 헤게모니적 남성만큼이나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존재인 탓도 있다.


 이들에게 게이는 남성의 외부에 접합된 채 남성성의 불안과 일탈을 포용하는, 유용한 상상적 고안물이다. 항문을 산도 삼아 민준이를 출산하고 무모칠과 부부(父父)관계를 이루는 톤톤정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민준이는 호모포비아와 아동혐오가 낳은 사생아이지만, 해병문학은 동시에 해병들에게 정서적으로 지지받고 돌봄 받으며 성장하는 민준이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무모칠과 톤톤정이 바쁠 때 민준이를 맡아 기르는 것은 해병문학에서 ‘정상인’들이 이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황룡’이다. 이것을 해병대라는 세계를 탈출할 수 없는 해병들이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있다고 읽어볼 수 있을까?


 창작집단의 성격은 완전히 정반대에 있을지라도 해병문학과 오메가버스는 세계와 개인을 연결하는 항으로써 사회를 재현하지 않는다. 특히 해병문학은 군사주의와 전형적 남성성에 대한 불만을 주요한 동력으로 삼으면서도 해병대 부조리를 가부장제나 자본주의 자체의 부조리함이나 청년에 행해지는 정치적 착취로 해석하기 거부한다. 대신 여성과 남성의 젠더적 조건을 생물학적 설정으로 유비해 캐릭터들의 신체 속으로 가라앉힌다. 카니발에서는 신체변형과 그로테스크가 민중들 사이에 동류의식을 형성하고 세계의 총체성에 스스로를 포함시키는 기능을 하는 반면, 해병문학의 그로테스크는 오히려 공동체와 세계를 상상하는 데 실패한 결과로써 나타난다. 이제 세계를 상상하고 바꾸는 일은 민중이나 시민이 아니라 자본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병 유니버스가 패러디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영웅들은 여러 행성과 평행우주를 오간다. 마이클 베이류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자본의 크기가 곧 폭발의 크기인 것처럼 마블 유니버스에서 자본의 크기는 우주의 크기다. 자본에게 세계를 향한 상상력이 선점당한 상황에서 남은 길은 세계를 상상하는 대신 자조적인 신체의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는 것뿐이다. 해병문학에서 재현된 해병대는 소속 구성원들을 지지해 주는 공동체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 대원들 간의 연대는 말 그대로 서로 먹고 먹히는 무자비함을 매개로 기이하게 유지된다. 여기서 개인은 사회의 중개없이 거대하고 냉정한 세계와 직접 만나고, 이는 형용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코스믹호러로 나타나거나 개인의 신체 생리 속으로 스며들어 자연화하는 두 가지 길만을 앞에 둔다. 해병문학의 버그와 그것이 가지는 전복성은 이렇게 언제든 자본의 스펙터클의 하위로서 회수될 처지이다.


사실 해병문학에 담긴 군사주의를 향한 냉소 역시 저항적인 측면보다는 이런 맥락에서 기능한다. 군사주의와 헤게모니 남성성은 21세기 들어 진작에 신자유주의에 패배를 선언하고 합류했다. 군인이 ‘제복 입은 시민’이라는 군 인권운동의 모토는 군의 훈육 목표를 ‘남성’을 키워내는 것에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으로 전환하는 핑곗거리가 되었다. 국민과 남성의 당연한 역할로 받아들여지던 병역의무는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기 시작하며 생애경영계획의 암초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군 민주화와 병영 악습 철폐라는 요구는 교묘하게 병 자기계발 지원이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하지만 군이 행하는 각종 자기계발 지원 및 장려 정책은 오히려 자기경영 주체의 내적 분열만 가속한다. 자기경영은 선택과 자유를 전제하지만 군 복무는 그것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예비역 남성들의 군대썰은 이 분열에서 발생하는 불안을 관리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근대 헤게모니 남성성과 군사주의의 성장 서사가 개인을 완성된 도덕적 인간(남성)을 목적으로 했다면 오늘날 해병문학과 군대썰의 서사양상은 개인의 생존적 각성이라고 압축할 수 있다. 간부들이 병사들을 훈계할 때 가장 비근하게 인용하는 경구는 군대는 냉정한 세계를 압축해 놓은 ‘사회’의 연습장이자 마지막으로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일종의 모라토리엄이라는 것이다. 보호가 끝나고 다시 세계로 던져지는 전역이란 사건은 해방을 상상하는 유일한 방법인 동시에 일면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자기계발은 공포를 무시하는 가장 쉽고 접근 가능한 대안이다. 


단례로 해병문학에서 해병은 공군을 보면 ‘역돌격(후퇴)’하거나 실신, 심하면 사망에 이른다는 설정이 있다. 이 모티프의 기원은 1966년의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이지만, 그와 별개로 공군은 해병문학에서 점차 중요한 서사적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해병들의 입을 빌려 그려지는 공군은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크툴루처럼 차마 저항이 불가능한 공포적 존재이다. 양승훈은 군종에 따른 자기계발 시간의 차이가 각 군 병사들의 계급적 격차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공군에 주로 지원하는 소수의 엘리트 남성의 자기계발은 ‘가고 싶은 군대’, ‘자기계발하는 군대’라는 자기선전에 동원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유포하는 ‘탈락’의 공포를 징병제 복무에서도 느끼게 된 남성들이다. 이는 대안과 어떤 저항적 상상력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코스믹 호러다.


이제 ‘평화를 원하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여느 부대 화장실 거울에나 붙어있는 격언은 단순히 국방과 군사 안보의 차원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냉전 시대의 반공-국방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 시대 자기경영주체의 ‘생존’의 유비로서 국가 ‘안전’으로 진화한다. 전쟁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일상이 되었고, 타인은 정글 같은 사회에 나가 경쟁할 적들로 인식된다. 성난 예비역들은 ‘여성 징병’ 의제를 던지며 여성혐오로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지언정, 군 인권과 군사 안보에 관해 자발적으로 의제를 만들고 공론화를 할 역량을 상실하고 만다.


나가며 - 남성성의 위기를 감각하는 음모론적 악마-남성학


오늘날의 남성들이 경험하는 남성성의 위기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남성성의 위기는 남성성이라는 범주가 종말에 다다랐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대남에게 여성이 이기적인 가짜 소수자이면섣 결혼과 같은 낭만화된 관계의 구애 대상이기도 하듯, 이대남의 남성성은 헤게모니 남성성과 그것이 비틀린  소년성, 신자유주의적 경영주체로서의 남성성이 혼합되어 형성된다. 이들은 혼자인 동시에 전체다. 합리성과 ‘팩트’를 무기로 이들은 헤게모니 남성성과 ‘페미’를 비롯한 적들을 무찌르려 전진하지만, 이런 틀로는 그들에게 닥쳐온 위기를 정당하게 감각할 수 없다.


‘이대남’들의 세계관을 섣불리 정치화하려는 제도권 미디어의 담론은 따라서 일시적인 봉합에 불과하다. 마치 이전 시대의 통치 장치가 훼손된 남성들과는 무관한 헤게모니 남성성을 내세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대남 담론을 구성하는 ‘공정’과 역차별 내러티브는 이전 세대의 강력한 국가-군사주의 내러티브를 대체하기엔 헐겁기 그지없다. 이는 청년 남성들이 처한 노동환경과 고립 문제 등을 은폐하고 또 당사자들이 이를 부인하도록 돕는다. 냉정한 세계를 그리는 이대남들의 내러티브는 따라서 패자로 전락한 남성들을 관리하는 데 실패하고, 그들의 남성성 각본엔 무수한 구멍들이 뚫리고 만다. 그 구멍으로 무엇이 흐르고 있고, 또 흘러나올지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림 3]© 트위터


트위터에서 공유되었던 칼부림 난동 예고 정리글. 8월 4일과 5일 양일에 칼부림이 예고된 지역과 예상 시간 등이 정리되어있다. 그림 설명 끝.


신림역 ‘묻지마 칼부림’ 사건 이후 칼부림 예고가 잇따르며 트위터를 중심으로 전파된 ‘칼부림 예고 정리글’은 칼부림을 마치 기후재난현상인 것처럼 나열한다. 비록 다수의 예고가 그저 커뮤 이용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이번 사태의 주범 격으로 호명된 모태솔로갤러리와 도태갤러리는 그것이 꾸준히 재생산되도록 하는 (반)인정체계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곳에서 끝없이 팽창하는 분노는 끝내 목적지를 찾지 못해 편집증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남성 외부에 있는 집단으로 여기고 정치, 경제적 자원을 분배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인셀 또한 남성성의 위기를 구성하는 복수의 남성들 중 하나이니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셀을 비롯한 '지하생활자'들을 살펴보는 일이 곧 오늘날 남성성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응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남초 커뮤니티에서조차 배척당하는 '심연'의 존재들은 그 상위에 있는 '정상시민'들과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다. 엄밀한 의미에서 심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와 인셀은 인터넷에서 동일한 평면 위에 놓여있다. 고립되어 있냐 아니냐가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실상 유일한 기준인 것이다. 

[그림4] 디시인사이드의 지옥도 © 우리는 디씨 36p


단테의 지옥도의 각층에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의 이름들을 중요도에 따라 덧씌운 가상의 지도. 중심에는 코미디프로그램갤러리와 막장갤러리, 와우갤러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따라서 칼부림 난동 가해자들을 재빠르게 타자화한 남초 커뮤니티의 반응이나 '악역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하야 한다'는 '정상화'된 언어들은 보다 신중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김학준 같은 인터넷 문화 연구자들이 지적했듯, 그들을 관찰하고 재현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관찰 대상인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디시인사이드의 지형도를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도에 비유한 위의 그림은 우리가 그들을 악마로 호명하기 전부터 이미 그들이 스스로를 악마로 여겨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악마의 삶을 멈춰”줘 감사하다는 조주빈의 반-영웅주의는 이런 자기인식의 계보 위에서 탄생한다.


 '악마'라는 호명을 통해 시스템 밖의 일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심연' 속 남성들의 비행은 그 위에 자리하는 인터넷남성성의 지층들을 지탱하는 지반으로 기능한다. 《신곡》의 세계관에서 악마의 본거지인 지옥은 천상에 있는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즉 천동설 세계관에서 지구의 가장 깊숙한 중심에 자리한다. 즉, 모든 인간은 지옥을 발아래 두고 그것에 발붙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마의 개념과 악마학은 카톨릭 교회의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교회의 요구에 따라 탄생하고 전파됐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와 만성불황의 시대가 끊임없이 소환하는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남초 커뮤니티나 인셀 남성의 문제를 악마학으로 환원하고 싶게끔 유혹한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되는 ‘젠더전쟁’은 명백히 젠더화된 불평등만큼이나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코호트 안의 불균질함까지 은폐하고 만다. 지금 시급한 것은 마녀사냥이나 종교전쟁을 위한 악마학이 아니라 정상 남성성에 감지한 사탄숭배의 흔적을 감지하는 악마학이다.  해병문학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보기 드문 후자의 사례로서 세계와 헤게모니 남성성을 악마적으로 조소하는 동시에 누구도 '포항오도짜세기합특별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이곳에 들어온 자 희망을 버려라”라는 단테의 지옥문에 적힌 경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아쎄이”라는 황근출의 대사로 전이된다.


 이는 비단 생물학적 남성들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니다. 워마드 등 래디컬 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 ‘자기계발’, '이민' 등의 키워드가 폭증한 현상은 이 사회의 일상과 허울뿐인 '젠더전쟁'의 전장이 어떤 불안과 무기력함에 포위당했는지 알려준다. 영국 청년들의 '반성적 무기력'이 탈정치현상과 저항에의 체념을 불러온다는 마크 피셔의 분석은 이것이 이미 전 세계적인 상상력의 위기임을 방증한다.


 반성적 무기력이 비관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성찰한 결과물이라면, 이를 극복하는 방법론은 보다 성실하고 냉철한 자기반성을 경유해야만 한다. 일본의 남성성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는 자신의 남성학이 “스스로가 어둠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인셀 레프트’라는 개념을 제안하며 완고한 정체성 대신 끊임없는 주체화와 자기돌봄을 통해 남성 문제를 대하자고 주장한다. 한편, 미국의 페미니스트 벨 훅스 자신이 여성학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상처’ 때문이었다고 털어놓는다.


내가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상처 때문이었다. 내 안의 고통은 너무나 격렬해서 나는 살아가기조차 힘들었다. 내 내부와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고 파악하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이론에 매달렸다. 내 상처가 사라지기를 원했다는 점이 제일 중요했다. 그리고 나는 이론에서 치유의 공간을 발견했다(벨 훅스, 2008:76).


우리는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론을 이론의 저자와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근대 학문 제도는 그런 이론을 그렇지 않은 이론에 비해 더 낫고 정확한 이론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와 그것을 설명하려는 이론에 관심을 갖는 계기들을 무시할 수 없다. 과학기술학에 도입된 페미니즘의 통찰은 아무리 무정하고 가치중립적인 이론일지라도 그 인간적인 기원과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이론 속에 숨은 픽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것을 하나의 음모론으로 다루면서 가능해지는 일이 있다. 패배하고 고립된 남성들이 동물화하기를 넘어 ‘괴물화’하고 있는 지금, 요구되는 남성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당연하게도 분열된 남성들과 냉정한 세계를 통합하여 설명하는 단 하나의 남성학 이론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삶의 매 국면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스스로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이론들‘을 기술하는 일은 가능하다. 페미니즘의 하위 분류인 남성학이 가부장제의 구조를 포착하려한다면, 남성들의 남성학은 이런 매순간의 성실한 기술들을 발명해내는 것으로 발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이 사회적 약자라고 주장하며 전통적 남성상에 기대 여성혐오를 재발명하려는 앤드류 테이트 등의 ‘남성심리학’ 음모론을 끝장내는 과업 역시 이 음모론적 남성학에 기대해볼 수 있다. 남성은 사회적 소수자가 아니지만 불안한 세계에서 마찬가지로 위험에 내던져진 취약한 존재다. 이것을 인정하고 또 긍정하고 출발할 때, 비로소 남성학은 저항과 희망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 우리에겐 더 많은 음모론적인 남성학이 필요하다. 충분히 터무니없고 불완전하고 정치적으로 유해하지 않은 음모론은 단순한 논리적 비약을 넘어 치유와 희망으로의 비약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저항과 순응이, 또 희망과 비관이 한데 뒤섞인 세계에서 저항과 희망은 끊임없이 입에 올려져야 비로소 존재하고 실재하게 된다. 비록 해병문학이 반동적으로 회수되어 죽은 밈이 되었을지라도, 한 인터넷 중독자로 하여금 그 다음 밈, 다음 음모론을 기다리게 하는 이유다.



편집위원 민상 | hitch9662@gmail.com


[1] Pierre Andre Boutang(1996). L'Abécédaire de Gilles Deleuze(질 들뢰즈의  A to Z). Sub-til

[2]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y celibate)’의 약자로, 2014년 미국의 총격 살해범 엘리엇 로저가 사용한 이후 인터넷의 베타 남성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3] 거칠게 분류하자면 남성학은 여성학/젠더학의 하위범주인 남성학과 남성들에 의한 남성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후자는 기존에 은퇴기 고령자 남성들의 ‘멘즈리브’ 차원에서 통속적으로 다루어져온 반면, 최근 유튜브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얻은 조던 피터슨, 앤드류 테이트 등의 ‘인셀구루’들은 ‘남성심리학’을 통해 인셀들의 피해의식을 학문제도의 언어로 기술하여 정당화한다.

[4] 해병문학에서 해병이 울 때 내는 소리이다.

[5] 민물장어의꿈(2019.02.22 11:28). 1130기다 우리땐 악기바리가 이정도였다.txt [해병대 갤러리 게시물]. 접속일 2023.08.17.. Retrived from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marinecorps&no=164431

[6] 이 작품의 초기댓글에는 ‘주작도 정도껏’, ‘가혹행위한 새끼를 이렇게 감싼다고...?’ 등 해당 글을 픽션으로 간주하지 않는 반응이 다수 있었다.

[7] 블라디미르 쁘로쁘 (2010). 희극성과 웃음. 118.

[8] 블라디미르 쁘로쁘 (2010). 희극성과 웃음. 118,

[9] 해병문학에서 '포신'은 남근의 대체어이다.

[10] 허윤(2021). 남성성의 각본들. 123.

[11] 해병문학에는 ‘찐빠(업무상의 실수)’를 낸 해병은 황근출 등의 선임해병에 의해 ‘해병수육’으로 요리되어 다른 해병들의 식사재료가 된다는 설정이 있다. 이는 당초 선임병이 자신의 대변을 후임병에게 먹인 부조리 사건을 ‘해병짜장 사건’이라 일컬은 해병대 조롱 밈이 변형되어 화소로 정착한 것이다. 

[12] 평범한 문체에, 경험에 기반한 해병 비문학으로 써내려가더니 갑자기 문체가 강건체로 바뀌며 내용이 해병문학으로 가버리는 드리프트를 도입하거나, 반대로 전형적인 병맛 해병문학을 써내려가나 싶더니 마지막에 실화 기반임을 밝히거나실화 기반임을 나타내는 증거를 본문에 은근슬쩍 첨부하는 작가들도 생겨나면서 해병문학의 새로운 방향성 또한 제시하고 있다. 아예 이게 문학인지 비문학인지 구분이 불가능하도록 교묘하게 집필하는 사례도 있는 편. (해병문학 나무위키)

[13] Marine Corps Universe의 약어로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의 패러디이다.

[14] 아즈마 히로키(2007).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163-165

[15] 바흐친은 근대 초기 도시에서 나타난 축제에 중세적 질서를 향한 저항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며 이에 담긴 신성한 것, 죽음, 규범 등 모든 것을 극복하고 조롱하고자 하는 민중 문화의 특징을 언급한다.

[16] 미하일 바흐찐 (2001).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이덕형 (번역). 아카넷. 31.

[17] 일게이’(일베 유저), ‘익게이’(익명 게시판 유저) 등의 형태로 활용된다. 상대가 남성 동성애자인 경우 ‘게이 게이야…’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18] 미조구치 아키코(2018). BL진화론. 277~280.

[19] 1966년 해병대 장교들이 사소한 시비로 공군비행학교를 습격하던 중, 공군 장교훈련생들의 반격을 맞고 퇴각하다 48명의 부상자와 1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이다.

[20] 양승훈 (2012). 2000년대 군대개혁과 군복무 중 ‘자기계발’을 통한 계급재생산:엘리트 남성들의 군복무 경험을 중심으로(석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144-146

[21] 마크 피셔 (2018).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번역). 리시올. 

[22] '취약성'을 키워드로 남성성을 분석하다. (2023.02.28.). 일다. Retrieved from https://www.ildaro.com/9573

[23] 진화심리학의 수사를 차용해 가부장제의 진화론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대안우파 담론을 거칠게 일컫는 말이다. 한국의 경우 유튜버 ‘유읽남’을 통해 미국 대안우파 담론이 수입되었고, 이는 ‘설거지론’ 등으로 현지화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강덕구 (2022). 밀레니얼의 마음. 민음사.

김학준 (2022). 보통일베들의 시대. 오월의봄.

도나 저커버그 (2022).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이민경 (번역).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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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 아키코 (2018). BL진화론. 김효진 (번역). 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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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2013). 일베의 사상. 오월의봄.

박권일 (2014).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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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223.39)(2021.09.12 18:26). 서킨 딕슨 조(sucking dickson joe)해병과의 나날! [해병대 갤러리 게시물]. 접속일 2023.08.17.. Retrived from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2011482

민물장어의꿈(2019.02.22 11:28). 1130기다 우리땐 악기바리가 이정도였다.txt [해병대 갤러리 게시물]. 접속일 2023.08.17.. Retrived from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marinecorps&no=16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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