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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기 또는 말하기

[꼬문생각] 이다미

 주변과는 분리된 채 우뚝 솟아있는 건물을 보면 반절 정도의 어딘가를 깔끔하게 잘라서 밀어버리고 그 단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상상을 한다. 물론 거기에도 사람이 있겠지? 그러나 상상의 순간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괘씸한 나머지 반으로 자르는 이벤트라도 주고 싶어지는 건물과 달리 시간의 흔적을 덕지덕지 묻히고 멀뚱히 서 있는 건물 앞에서는 “오래오래 잘 살아야 한다~”라는 나레이션이라도 넣어주고 싶다. 왜? 사람이 살아서?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보통 끝을 전제하고 등장하는 바람이다. 언젠간 사라질 것에 대고 건강과 장수를 빌어봤던 경험은 많다.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생긴 철근과 콘크리트를 열심히 쌓아 올려도 건물 또한 낡는다. 그리고 건물의 노후에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이해관계가 줄곧 얽혀 그것이 늙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재개발이라는 카드를 달고 온다. 꼭 그런 방식밖에 없다는 듯이, 또는 그것 말고 다른 방식 따위를 생각할 겨를은 없다는 듯이 건물은 무너지고 사람은 사라지고 풍경은 대체된다. 이것이 어제와 오늘의 시세차익이 달라지는 부동산의 방식이다. 그 방식을 따라가고 나면 조악한 이미지들이 터를 잡지도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풍경만이 남는다. 상승장과 하락장이 전부인 규칙 안에서는 빨강과 초록만이 확인되는 시각적인 요소이므로 규칙이 보는 것 또한 단 두 가지, 땅과 건물뿐이다. 땅에 건물이 올라가면 된다. 높으면 좋고, 더 높으면 더더욱 좋다. 반으로 잘라버리면 나을 거라니까. 귓가에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좋습니다. 반으로 잘라버립시다! 머릿속 법정의 판사는 이미 판결을 내렸다. 저주하는 일밖에 할 수 없는 곳에서 최선을 다했던 저주가 입안에서 빙빙 맴돈다. 


 거주가 가지는 무게를 설명하기 위해 골몰하는 시간이 있었다.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삶을 모두 헤집어 내서 모양을 구체적으로 짚어내고 필요성과 간절함을 역설하는 것이 모든 것(재개발 사업의 저지, 연대의 확장, 그것의 기반이 되는 마음의 동요 등…)을 이뤄주는 마법의 열쇠 같은 거라면 몇 번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데 마법의 열쇠 같은 건 당연하게도 없고, ‘사람이 사라진다’라는 말의 무게는 의심받기 시작한다. 여기가 철거되면 생명의 끝과 동의어가 아니더라도 발생하는 죽음이 있다, 라는 일종의 구호를 자주 생각한다. 아무튼 둘 다 죽음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죽음의 무게를 어떻게 다시 달아볼 수 있지…아니면 다른 게 필요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내어놓아야 듣는 척이라도 해줄 테지? 


 이렇듯 어떤 것이 재화로서 치환될 때 사라지는 것을 말하면서 자본의 폭력성을 설명하려 시도하고는 한다. 그러나 ‘돈이 된다’라는 논리 앞에서 그것을 반박하기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다. 거주지에서 밀려나는 사람이 어떻게 시공간에서 탈각되는지, 오랜 세월을 가진 건물이 무너지면 어떻게 이 장소의 의미가 상실되는지, 그러한 상실이 개인에게만 주어진 슬픔 ’따위’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이익을 무마시킬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걸 자본의 원리에 충실한 사람에게 납득시키려고 시도할 때마다 드는 실패하는 느낌 앞에서 여전히 꺼내 놓을 것을 뒤적거린다. 반으로 잘라버리자는 마음 위에 켜켜이 쌓아내어 내놓는다. 실패하는 느낌은 중요한 재료이다. 말은 일종의 그릇이고, 그곳에 진실된 욕망을 담아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법칙이다. 저주와 마법은 말에 염원을 담는다는 제조의 과정을 공유한다. 마법 열쇠 같은 건 없어도 비슷한 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말을 멈추지 말 것. 무엇이 잘릴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다미 | madi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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