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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괴물에게 이름 붙이기

[꼬문생각] 은지

 “남자애들이 너 무섭대.” 지금 들으면 ‘어쩌라고’ 싶은 말이기는 하나, 학창 시절에는 대응 매뉴얼이 있었다. (사실 알고 있었으면서)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엥 진짜? 왜?”라 묻기, 그리고 그 대답을 즐기기. 초등학생 때부터 ‘조폭 마누라’ 소리를 들었으니 그리 특별한 딱지는 아니었다. 사실 그 이미지는 내 추구미(美)이자 계산된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남자 기숙사에서 온갖 얘기들이 오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 더러운 (이라 써도 되나요?)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기 위해서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 - 더 적확하게는 여자애 - 가 되어야만 했다. 섹슈얼리티를 바탕으로 하는 그들의 이분법에 따라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여지 따위 주지 않는 방식으로 휘말릴 일이 적은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을 권력이라 착각하며 속으로 조소했다. 그들이 짠 판 위에 올려진 채로 말이다. 내 안에는 여성괴물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 여성괴물은 형체 없이 아로새겨져 있었으나 최근 이 괴물의 뼈대를 잡아볼 수 있게 됐다. 그는 스페인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1]의 가부장제 대리인, ‘베르나르다 알바’와 닮았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그의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의 8년 상을 치르는 동안 다섯 딸[2]에게 극도로 절제된 삶을 강요하며 그들을 통제한다. 집 안으로 바람 한 조각 들어올 수 없게 창문까지 걸어 잠그는 그의 억압은 숨 막히는 더위로 형상화된다. 어느 날, ‘빼빼’라는 남성이 청혼하면서 장녀 앙구스티아스는 탈출할 기회를 얻는다. 막내딸 아델라를 비롯한 자매들은 그를 질투한다.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기회, 무의식적으로는 자유의 기회를 포착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순결’을 강조하던 공간에 등장한 남성은 자매들에게 환상과 같았다. 결국 아델라는 “그이와 함께 초록 드레스 입고 세상 저 밖으로 나가 춤출래”라고 노래하며 빼빼와 사랑을 나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르나르다는 도망가는 빼빼에게 총을 쏘지만 빗나가고, 아델라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베르나르다는 “아델라, 베르나르다 알바의 막내딸은 처녀로 죽었다.”며 집안을 침묵시킨다. 뮤지컬[3]에서는 커튼콜이 이어지고, 베르나르다는 대문을 다시 닫고 들어간다. 그가 만든 집안의 언어는 공고하다.

 

 베르나르다 알바를 ‘여성괴물’로 읽어볼 수 있을까? 딸들의 숨통을 쥐고 있는 데다 잔인하기까지 한 ‘괴물적’ 면모는 충분히 지닌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여성괴물’보다 여성 캐릭터들을 ‘여성괴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가깝다. ‘여성괴물’은 공포영화에서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으로, 정상의 영역 밖에 있는 타자이기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금기되었기에 매혹적으로 그려지지만, 동시에 낯설어서 거부감이 든다. 이들은 본질적으로는 비체적인[4] 존재가 아니지만, 남근 중심의 이분법적 잣대에 따라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상징계[5]의 반대항에 놓여 비체로 폄하된다. 특히 ‘여성괴물’은 성녀에서 창녀로 이르기까지의 섹슈얼리티가 강조된다. 짚고 넘어갈 점은 ‘여성괴물’이 실로 그러한 특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판단하고 타자화한다는 것이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집안을 통제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도 상징계와 비체의 대립이 드러난다. 베르나르다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한 채 상징계 사회의 구조를 지키며 형체 없던 가부장적 억압을 가시적으로 대변한다. 상징계의 질서를 지키지만, 한편으로 여성이면서 남성의 환영을 수행하는 비체적 존재가 된다. 베르나르다는 ‘내가 시집가는 날’ 노래에서 스스로를 ‘창녀’ 같다고 비난한다. 이는 “남성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자기 육체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아드리엔느 리치, 1996)”이다. 그래서 그는 딸들이 창녀처럼 굴지 않도록 단속한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관점에서, 여성괴물은 ‘호세파’와 ‘아델라’다. 베르나르다의 노모이자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호세파’는 치매에 걸려 감금당했으나 ‘바다로 가겠다’며 상징계를 벗어나려고 노래하는 비체적 인물로, 상징계인 베르나르다의 집에 균열을 가져온다. 아델라 또한 자유를 갈망하다 끝내 죽음으로 집 대문을 열어버린다. 그의 죽음은 “욕망을 억압하던 상징계의 경계를 능동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현수정, 2018:144)”[6]하지만, 상징계에서 추방된 비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델라를 ‘깨끗한’ 처녀로 단장하라는 명령 또한 아델라가 베르나르다의 관점에서 비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호세파가 의자를 넘어뜨리며 아델라의 죽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비체인 호세파와 비체인 아델라의 죽음은 연결된다. 또한 딸들이 갈망하는 ‘빼빼’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그의 존재도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에서는 여성 배우를 통해 재현된다. 그는 기의 없는 기표로서 환상처럼 존재한다. 그는 억압적인 상징계에서 벗어나게 해줄 구원자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부질없는 희망이다. 이미 결혼한 ‘로제타’라는 여성 친구는 결혼 후에 화장과 외출을 모두 금지당한 채 또 다른 상징계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딸들은 상상으로 그려온 결혼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남성을 욕망한다. 이는 스페인 민속음계를 바탕으로 한 집시 음계와 안달루시아 지방의 플라멩코 춤으로 표현된다.

 

 본 극은 긍정적으로 표상되던 상징계를 벗어나야 할 세계로 전복함으로써 가부장적 사회의 이면을 폭로한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내재한 가부장적 관념을 바탕으로 집안 내 여성들을 여성괴물로 타자화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성’으로 절대적 타자이며, 남근적 관점에서 ‘비체’에 불과하다. 베르나르다 알바 또한 자신을 ‘안토니오의 창녀’라 지칭하며 타자화되기를 자처한다. 그러한 점에서, 베르나르다 알바는 내 안의 괴물을 키운 속삭임과 닮았다. 그는 나를 남성중심적 사고에 묶어 내가 감히 욕망 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기로 ‘선택’했다고 믿게 했으며, 그 선택을 ‘권력’이라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억압에서 오는 불쾌감과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 갈증이, 베르나르다의 눈을 빌려 내 안의 괴물에게 이름을 붙여주도록 했던 것이리라.

 

 아델라는 자유를 쥔 채 죽었다. 태생부터 속한 상징계를 벗어나면 또 다른 상징계로 귀속되던 시절의 여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가 아델라와 전혀 다른 시절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며, 실제로 그리 다르지도 않다. 그러나 죽음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많을 것이고, 최소한 또 다른 상징계로 귀속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수는 있다. 내 안의 괴물도 아델라처럼 베르나르다의 시선과 그-들을 견디며 비체로 자라났다. 가부장제를 내재하는 한, 그리고 그-들이 변하지 않는 한 내 괴물은 계속 ‘여성괴물’일 것이다.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너네 잘못’으로 못 박고 내 자유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티끌만큼도 대상화되고 싶지 않다는 역겨움에 내 여성괴물은 끊임없이 검열될 것이다. (예컨대 그-들의 시선이 닿을 만한 신체 부위를 가능한 한 모조리 차단해 버리는 행위) 베르나르다의 시선, 이제는 지겹고 피곤하다. ‘알 바?’의 심정으로 그저 그-들을 조소하며 그-들이 두려워할 만한 내 안의 여성괴물을 무럭무럭 키워 나가련다.


은지 | choeej.eun@gmail.com


 [1] 스페인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이다. 1930년대 초 보수적인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2] 차례로 앙구스티아스, 막달레나, 아멜리아, 마르띠리오, 아델라. 앙구스티아스는 베르나르다가 첫 번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딸로, 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3]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2023년 국립정동극장에서 삼연을 올렸다.

[4]  ‘비체’란 여성 정신분석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개념으로, 상징계에서 거부당한 존재, 오물과 같이 더럽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의미한다. 주체도 객체도 될 수 없는 지워진 존재다. 즉, 경계를 넘거나 넘겠다고 위협하는 것으로, 반드시 추방되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부정적인 특징으로 표상된다(현수정, 2018:122).

[5] 상징계는 언어로 소통하는 인간 세상이다.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면서 가부장적인 문명사회인 상징계로 편입되어 들어오고, 상징계의 질서와 체제를 내면화한다(현수정, 2018:124).

[6]  현수정 (2018). 뮤지컬에 등장하는 문제적 어머니들의 억압과 전복. 144.



참고문헌

단행본

바바라 크리드 (2020). 여성괴물 – 억압과 위반 사이(개정판). 손희정 (번역). 여이연.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2011).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안영옥 (번역). 지식을만드는지식.

 

논문 및 저널

김일송 (2021). 남성적 가부장제에 대한 반동. 연극평론 통권, 100호 2021 봄.

유현주 (2011). 괴물, 여성, 기계 – 프로이트의 언캐니 이론과 우리 안의 타자들. 뷔히너와 현대문학 37.

현수정 (2018). 뮤지컬에 등장하는 문제적 어머니들의 억압과 전복. 한국연극학, 제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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