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리뷰: 국가에 의해 허락된 좌파 음악 〈Brat〉

[칼럼] 편집위원 정후

1. 서론: 팬데믹 시대의 음악


2024년이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과연 올해의 앨범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 현재 (2024.12.18.) RYM[1] 기준으로 2024년의 1위 앨범은 막달레나 배이의 〈Imaginal Disk〉 (2024)이지만, 블랙 미디의 해체 이후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시작한 조르디 그립의 〈The New Sound〉 (2024)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Chromakopia〉 (2024)도 취향이나 관점에 따라서 충분히 올해의 앨범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하려는 것은 올해의 앨범을 선정하는 게 아니라, 올해 가장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컸다고 판단되는,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까지 볼 수 있는 〈Brat〉 (2024)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꽤 개인적인 맥락에서 이 글을 시작하는 게 좋을 듯한데, 나는 찰리 XCX(이하 찰리)의 음악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들었다. 그 해는 2021년이었고, 나는 충분히 의식하고 있지 못했지만, 팬데믹의 한가운데였다. 덥스텝[2]을 비롯한 전자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와 한창 록에 빠져 NME 500대 명반 리스트를 뒤적거리던 나는 수업 시간에 서로 음악을 추천해 주곤 했는데, 나는 록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전자음악 특유의 ‘인공적인’ 질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친구는 신시사이저로 소리를 창조해 내는 것의 위대함에 대해 말하며 이것저것 추천해 줬지만, 모두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때 들려준 곡이 찰리가 소피와 함께 작업한 〈Vroom Vroom〉 (2016)이었고, 나의 반응이 좋아지자 우리는 찰리의 정규 4집 〈how I’m feeling now〉 (2020)를 함께 들었다. 나는 이 음악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약 3년이 흐른 지금 팬데믹을 회상해 보면 몇 개의 음악 장르들이 떠오른다. 해외의 메인스트림에서는 두아 리파와 더 위켄드가 신스팝[3]을 기반으로 레트로 음악들을 만들어냈고, 힙합에서는 플레이보이 카티가 레이지[4] 장르를 주류 힙합으로 끌어오고 있었으며, 록에서는 윈드밀 신을 중심으로 포스트 펑크 장르[5]가 유행했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파란노을이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2021)을 발매하며 슈게이징[6]의 유행이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그리고 하이퍼팝이 있었다. 버블검 베이스로도 불리는 이 장르는, 영국의 음악 레이블 PC Music을 필두로 하며 빠르고 강렬한 비트와 인공적으로 조정된 보컬 피치 등의 특징을 가지고, Spotify가 만든 플레이리스트에서 비롯된 장르로 알려져 있다. (장르의 유령적 특성상[7] 하이퍼팝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정의될 것인가에 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다. 이는 하이퍼팝이라는 장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이어진다.) 이 장르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은 모든 게 과장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운드적으로 그럴 뿐만 아니라, 이미지적(하이퍼팝 장르의 뮤직비디오에는 광과민성 증후군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경고문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으로도 그렇다. 이런 과장된 감각은 소비 사회에 대한 진단이자 증상이기도 하고, 과장된 섹슈얼리티를 보여줌으로써 고정된 성 역할을 비판하는 장르의 트랜스젠더적 성격에 기반하는 것이기도 하다.[8]


「The Lost Promises of Hyperpoptimism」에서 분석하듯이, 팬데믹 당시 하이퍼팝은, 그 장르의 실체 없음이 10대의 정체성 위기를 반영하기도 했고, 젠더와 자아의 유동성, 우울과 불안을 반영하기도 했다. 팬데믹이 끝나며 음악을 소비하던 아이들은 장르를 떠났고, 하이퍼팝을 통해 아티스트들이 메인스트림으로 유입되기도 했다. 이후, 이 장르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활력을 잃었다. 또한 하이퍼팝이라는, ‘모든 순간에 트랜스함이 존재하고, 물리 법칙이 무시되는 듯한 곡’[9]을 가졌던 장르가 “낮은 오토튠 노래+사이보그스러운 비트+격렬히 찢어지는 퍼즈”[10]로 어느 정도 도식화된 것도 이 장르가 메인스트림과 만나며 특유의 활기를 얼마나 잃었는지 보여준다.


2. 하이퍼팝의 숨겨진 슬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이퍼팝이라는 과장된 장르가 자아의 혼란, 우울·불안과 연관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과장된 소비 사회를 반영하는 장르가 우울함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으나, 영국의 문화평론가 마크 피셔가 「The Secret Sadness of 21st Century」에서 제임스 블레이크, 칸예 그리고 드레이크의 음악을 분석하며 사이먼 레이놀즈와의 대화를 인용해 말했듯이, 제임스 블레이크의 음악에는 “댄스 음악이 그게 한때 집단적인 카타르시스를 통해 주었던 감정적인 해방을 더는 제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과 거기서 비롯된 실망과 슬픔이 존재”한다. 힙합에도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무언가 공허하다는, 그럼에도 끝없이 쾌락을 추구해야만 하는 쾌락주의자의 슬픔이 존재한다. 드레이크와 칸예의 음악에도 이런 감정이 내재하지만, 디지털적으로 조작된 멜랑콜리는, “자기자신이 슬픔인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열의 없이 시들해진다.” 이는 또한 21세기 소비 사회의 징표로, 모든 결함들이 지워진, 디지털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정상성(비뚤어진 한편 너무나 진부한)이다.[11] 00년대의 팝 음악은 쾌락을 마치 노동처럼 여기며, 언제든 일 속으로 접속(이메일이나 휴대전화를 통해)해야만 하는 ‘접속 자본주의’[12] 시대, 쾌락마저 팔 수 있는 상품이 됐을 만큼 상업화된 시대의 슬픔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러한 슬픔은, 앞서 언급한 쾌락을 노동처럼 여기는 음악들에 자리를 빼앗긴 알앤비 장르의 가수 프랭크 오션에 의해 지적된다. 그의 곡 〈Novacane〉 (2011)에서 그는 섹스할 때조차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비아그라를 복용해야만 하는[13] 쾌락이 의무가 된 시대(Did-didn't I can't feel nothing, superhuman Even when I'm fucking, Viagra popping)에, 감정 없이 인공적으로 피치가 조정된 팝 음악(Every single record, autotuning Zero emotion, muted emotion Pitch corrected, computed emotion)을 언급한다. 곡의 제목인 ‘Novacane’은 치과에서 쓰는 국부 마취제 ‘Novocain’을 이용한 말장난으로, 마취된 사회에서 어떻게든 쾌락을 느끼려는 슬픔을 전면에 내세운 곡이다. 쾌락을 느끼지 못하기에 의무적으로 인공의 것(비아그라, 오토튠 등)을 통해 쾌락을 느끼려고 하나, 이에 실패하여 슬퍼하는 시대의 연장선상에 하이퍼팝이 위치하는 것이다.


모든 게 과장된 시대에서의 우울함이 내재한 소비 사회의 음악은 PC 뮤직의 창립자, A.G. Cook의 앨범 〈7G〉 (2020)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과장된 일렉트로닉과 절제된 어쿠스틱을 지속적으로 오가는 이 앨범은, 누군가가 볼품없는 자신을 구해서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는 믿음에(I don’t know who I’m gonna talk now at school But I know I’m laughing In the car ride home…[14], He want it easy, he want it relaxed Said I can do a lot of things, but I can’t do that [15])관해 끊임없이 서술한다. 또한, 그는 “진짜와 가짜, 일렉트로닉과 어쿠스틱과 같이 대립되어 보이는 게 사실 같은 층위에서 작동 중이며, 음악 업계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음악에는 이런 20세기의 구시대적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16] 이렇게 하나의 장르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시도는 고정된 정체성으로 사람들을 분류하려는 권력의 기획에 반기를 드는 ‘퀴어’적인[17]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소피의 경우 인터넷에서의 자신과 현실에서 자신의 자아 경계가 불분명함을 보여주며,[18] ‘미래가 없어진’ 상태로 과거의 음악이 반복되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지 못하는 시대에 새로운 음악을 제시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19] 이런 불안·우울·저항·각종 정체성 등이 뒤섞이며 ‘고정되지 않는’ 장르라는 점이 하이퍼팝의 특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퍼팝은 자기파괴가 아닌 탈구축이다.[20])


3. 저항의 상품화, 〈Brat〉


이런 하이퍼팝 장르를 계승한 (더불어 영국 노동 계급의 문화인 레이브[21]까지) 찰리는 언더와 메인스트림[22]을 자유로이 오가며 하이퍼팝과 메인스트림의 융합에 앞섰다. 팝스타로서의 커리어에 전환을 주고 싶었던 그녀는 소피와 함께 〈Vroom Vroom〉을 발매하며 하이퍼팝의 선구자가 되었고, 음악적 성격뿐만 아니라, 과장된 섹슈얼리티와 인공적인 느낌이 결합한 이미지를 차용하는 등 하이퍼팝 아티스트로서의 노선을 걸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음악이 언더의 음악이라고 여겨지는 일(언더에서 ‘온’ 음악이긴 하지만 빌보드 차트인에는 항상 성공했다.)은 없었다.


퀴어적이고, 우울과 불안이 내재한 하이퍼팝이 갑자기 주류 사회에서 인정이라도 받은 것일까? 이번 앨범의 성공은 그녀가 정규 5집 〈Crash〉 (2022)에서 팝스타의 전형적인 노선을 걸으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것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이퍼팝이 망하고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이 앨범이 성공한 이유에 대해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무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마저 스스로를 ‘Brat’이라고 칭했다. 이렇게 주류 사회에 찰리의 음악이 편입되는 과정은 하이퍼팝 장르의 기반인 정체성의 불확립과 주류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울을, 무한한 자기 긍정의 형태로 바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찰리가 ‘버릇없는 녀석’이라는 의미에서 ‘자신감 있고 독립적인’ 의미로 바꿔 쓴 ‘Brat’은, 시장에 편입되며 ‘너희들이 뭐라 하든 나는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했다.’ 식의 힙합 장르에서 볼 수 있는 성공한 자신을 뽐내는 태도가 됐다. 이런 태도는 미국 내의 많은 여성 래퍼(니키 미나즈 등)가 자신을 ‘bad biXch’라고 부르며 이 단어를 재구성하고,[23] 능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자기 계발적 주체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과 유사하다. 결국 카멀라 해리스가 말하는 ‘Brat’은, ‘소수자 정체성을 지녔음에도 역경을 뚫고 민주당의 미국 대선 후보가 된 성공한 나’를 표현하는 단어였다.


이런 무한한 자기 긍정의 태도는 성공한 자신뿐만 아니라 우울한 자신을 긍정하는 것까지 확장된다. 빌리 아일리시가 〈WHEN WE ALL FALL ALSLEEP, WHERE DO WE GO?〉 (2019)를 발매한 이후, 팝 시장에서 Emo 장르[24]가 절찬리에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 지점이 힙합이 지배적이었던 2010년대의 파티 음악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Emo 장르는 슬픔을 느끼고, 그 슬픔을 숨기지도 않는다.) 여기에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SOUR〉 (2021)가 발매되며, 다수의 여성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우울함(대다수의 경우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워서 우울하다는 등)을 긍정하는 포즈[25]를 취하며 포스트-에이브릴 라빈을 자처했고, 팝-펑크라는 모순적인 이름의 장르를 택하며 반항과 우울을 섞은 자신들의 음악을 팔아 성공을 꿈꿨다.


자신이 느끼는 우울한 감정과 그것을 야기한 상황을 나열한 이후에, '그럼에도 나를 사랑할 거야' 식의 근거 없는 자기 애착은 마크 피셔가 「반-치료」에서 '진심 연출하기'라고 부르는, '실제로 느끼고 있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감정을 공적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난 끝에 성공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내리는 명령인 '근본적이며 실질적으로 무한한 자기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두 발로 설 수' 있는 자신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불안을 야기한 원인, 즉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불안함(신자유주의하에 서로를 신뢰하는 일의 불가능성, 관계 맺기가 스트레스가 된 상황)은 지워진다. '결핍된 주체'로서의 자신과 '자긍심을 갖는 주체'로서의 자신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 작업. 이는 마치 끝없는 고백 이후 그 상황으로부터 단절되고 자유로워진다고 착각하는 서구적 전통의 연장선상(그러므로 그들의 음악은 곧 고해성사이고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은밀한 소재의 이야기여야 한다.)에[26] 있다.


찰리가 페미니즘과 같이 억압에 저항하는 의제 자체를 〈Brat〉에서 전면으로 내세운 게 고난 끝에 성공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백하고, 그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에 맞서 당당한 자신을 연출하는 작업은 푸코가 말했듯,[27] 권력과 분리되어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권력망 속에서 움직이는 행위이다.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 (Capitalist Realism)에서 서술한 ‘너바나의 역설(MTV에서 반항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린)’에 찰리도 빠진 것이다.


4. 빈곤한 이미지의 〈Brat〉


앨범의 유행에는 찰리가 앨범 커버를 [그림 1]처럼 낮은 해상도의 이미지로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Brat’에 들어가는 문구를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기여했다. 이는 자유롭게 변형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프로필이 되었고,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까지 ([그림 2]) 이 열풍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AD_4nXdUQPkBleRGAL15CVJHdxQmOeRyEkCM6hd5rHqmXL07HOWwFNDti95BrSizEAU1KtemComjTWZxn6YW1h3nRj5om6EpeYVOHTX1NL44egb4G2lvZHqC23EASi-AxdCIK0edoI47?key=vIEzxhNRjfnPzYG2i2ag4Q


[그림 1] 〈Brat〉의 앨범 커버 ©Pitchfork

초록색 배경에 영어로 brat이라 적혀 있다. 그림 설명 끝.


AD_4nXf9_2V8IKf6xfvFB45F1rd_vPyI2nERBwbndbvDB5U0CezByY9hvQxlyt28NOU1HKe9pE65R8iQSyBuA6hKQRwdOSdEGtlF1ApNFlQVq2Lzu7D0X-IFtBhL9aAwQw6G1z-d7Kwkzg?key=vIEzxhNRjfnPzYG2i2ag4Q


[그림 2] 나토가 변형한 〈Brat〉 ©X

나토가 brat이라는 글자를 peace로 바꾼 이미지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그림 설명 끝.


이는 히토 슈타이얼이 ‘빈곤한 이미지’라고 부른[28] 해상도가 낮고, 원본성이 떨어지고, 복제와 전용이 쉬운 이미지처럼 보인다. 찰리가 〈Brat〉의 앨범(그뿐만 아니라 이전의 모든 앨범 또한 유사한 저해상도의 이미지로 바꿨다.)커버를 [그림 1]과같이 바꾼 이유는 팝 시장의 여성 성 상품화(고해상도의 성적 이미지를 앨범 커버로 삼는)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29] 그러나 커버의 자극적인 정도를 줄이고, 물신적 가치에 대항하기 위해 도입한 이미지는 찰리의 의도와 다르게 작용했다. 찰리의 앨범 커버 역시 인상과 강렬함에 집착하는 정보 자본주의에 통합될 뿐이다. 찰리가 고해상도의 포르노그래피적 이미지에 대항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빈곤한 이미지는, 빠른 속도로 복제와 전용을 거쳐서 시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나토가 앨범 커버의 이미지를 변용해서 스스로 정체화한 것이다. 래윈 코넬은 정체성 정치의 역설로 지배 집단의 ‘정체화’[30]를 말한다. 〈Brat〉은 소수자들을 연결하고, 시각적 유대를 만들어낸 만큼이나, (통제할 수 없는 자본주의 속 흐름으로 인해) 지배 집단(카멀라 해리스, 나토 등)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단으로 쓰였다.


5. 〈Brat〉은 실패했는가?


〈Brat〉은 하이퍼팝과 그 안에 잠재된 좌파적 의제까지 계승하려는 시도였다. 하이퍼팝을 탈맥락화·탈역사화해서 가져오는 게 아닌, (애초에 찰리는 장르 전성기를 이끌었다.) 레이브 문화라는 역사적 맥락까지 가져오는, (팝에 미래가 없고 진보하지 못한다고 평가받는) 이 시대에 팝의 미래를 개척하면서 동시에 부조리한 체제에 저항하는 시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도는 펑크가, 너바나가, 힙합이 그랬듯이 하나의 상품이 되는 데 그친 것처럼 보인다.[31] 이 음악이 메인스트림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자체가 시장이 승인한 좌파 음악이었기 때문이고, 이는 권력이 이 음악에서 승인될 법한 부분들을 고르고 멋대로 왜곡(자기 계발적 주체의 긍정 등)해서 시장에 유통한다는 의미이다.


제도에 속하지 못한 퀴어들의 음악이었던 하이퍼팝은 〈Brat〉을 통해 시장으로 편입되며 중산층 여성의 성공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Brat〉을 듣고 자신의 프로필을 변형된 앨범 커버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체제에 저항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호수동성[32]의 음악으로 바뀌었다. 퀴어한 정체성으로 인한 우울은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워서 헤어지는 바람에’ 생긴 우울로 바뀌었고[33] 손쉬운 이미지의 변용으로 인해서 이미지를 사용하는 이라면 누구나 소수자성을 쉽게 흉내 내고 정체화한 이후에 패션 아이템처럼 자신에게 걸치고 소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Brat〉은 실패한 앨범인가? 여기서 글 초반에 다루었던 하이퍼팝의 장르적 특성에 대해 다시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하이퍼팝이라는 장르의 특성상(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조합되는) 장르 자체의 정의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장르는 무엇으로 정의되는 걸까? 기술복제시대에 아우라를 보존하는 예식의 역할을 맡은 진정성[34](하이퍼팝의 경우 정체성의 불안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만들어야 하고, 음악이 언더에 속해야 진정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 등)은 사운드적 특성과 함께 결합해 장르를 정의한다. 그러나 나원영 평론가가 말했듯,[35] 장르를 구성하는 고정된 요소를 상정하고 장르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90년대 기술 발전(DAW[36] 등)과 함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 되었고, 장르적 특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 음악의 특정한 청취·창작 양태에 집중하는 것이 더 실효성 있는 방법이 되었다.


언디는 하이퍼팝이 인간 혼자 만드는 장르가 아니라, 기술적 요소(알고리즘·디지털 아카이브)와 인간이 결합한 장르라고 주장한다.[37] 디지털 아카이브와 알고리즘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존에 존재하던 요소들을 재조합하고, 이는 새로운 장르를 구성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지위를 의심받는다. (앞서 말했듯, 하이퍼팝은 소비 사회에서 상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슬픔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이퍼팝에서 어쩌면 인간보다 중요한 건 새로운 조합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기술적 요소이고, 여러 새롭다고 느껴질 만한 조합의 가능성이 모두 상실된 이후, 하이퍼팝의 몰락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에서 말한 거대 서사(종교·국가 등)가 몰락한 이후의 포스트모던 사회(끝없이 탈맥락화·탈역사화해서 각종 요소를 조합시키는)의 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레트로 마니아’[38]들의 시대에 하이퍼팝이 기존의 포스트(), ()리바이벌, 네오(), 레트로 장르들과[39]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조합 자체를 장르가 가지는 중요한 특성 중 하나로 삼고 이를 가시화시켰다는 점(마크 피셔가 온톨로지 음악에 대해 미래 없음과 어긋난 시간성을 전면화한다고 본 것과 유사하다.[40])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객체화된 인간을 체험할 수 있을 뿐더러, 집적회로 속에[41] 살고 있는 인간 자체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얻는다. 하이퍼팝이라는 장르와 그것을 조합하고 소비하는 인간의 정체성 모두 순수하지 않은 사이보그로서 존재한다.[42] 하이퍼팝은 이를 극한으로 증폭시켜 장르적 특성으로 활용한다. 이 음악에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각종 기술을 통해 마구 뒤섞여 있고, 창작자는 정체성의 불안을 겪는 동시에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조합하는 사람’이 된다. 하이퍼팝은 순수하지 않은 오염의 음악인 것이다.


‘끝없이 조합되는 것’을 장르적 특성으로 가지는 하이퍼팝을 왜곡시킨 후 오염되지 않은 음악으로 고정하려는 것(브랫을 그저 성공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힙한’ 수단으로 사용, 정체성의 불안을 피상적인 우울의 포즈를 취하는 정도로 변환, “낮은 오토튠 노래+사이보그스러운 비트+격렬히 찢어지는 퍼즈”[43]로 도식화)은 하이퍼팝이라는 오염을 숨기기 위한 권력의 전술이다.[44]


〈Brat〉은 장르적 오염과 인간관의 오염에 더해 한 축의 오염을 추가하는데, 그것은 메인스트림과 언더 간의 오염이다. 히토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가 자본주의의 미디어 생산 라인과 대안적 시청각 경제 양쪽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현 체제에 혼란과 마비를 가중할 사유와 정동의 파열적 운동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이를 옹호한다.[45] 이와 마찬가지로 〈Brat〉은 메인스트림과 언더그라운드에 걸친 채, 현 체제의 혼란과 마비를 가져올 운동을 유발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파열적 운동을 막기 위해 권력은 음악을 메인스트림과 언더라는 이분법으로 분류하고, 어느 한 측에 위치시키며, 양측 모두에 속하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은 라투르가 말하는 ‘근대 헌법’[46]의 연장선에 위치한다. ‘근대 헌법’은 자연/사회, 정치/과학을 명확히 구분하고 하나의 대상은 어느 하나의 분류에만 속하는 것처럼 판단하게 함으로써, 어느 한 측으로 구분될 수 없고 양측 모두에 속하는 하이브리드를 비가시화 시키기 위해 제정되었다.[47] 〈Brat〉은 메인스트림과 언더 양측에 속한 하이브리드이지만, 권력은 이를 메인스트림만의 음악으로 만들고, 우리가 더 이상 언더의 음악으로 존재하지 않는 〈Brat〉이 진정성을 상실했다고 판단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Brat〉이라는 하이브리드는 비가시화된다.


파솔리니가 주장했듯,[48] 2차 대전 시기의 역사적 파시즘(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주도한)의 종결 이후 소비주의의 도래와 함께 시작된 네오 파시즘은 모든 문화를 획일화시키며 개개인의 인간적인 출현을 삭제하고 개인들이 스스로를 상품으로써 전시하도록 만들었다.


〈Brat〉을 마주할 때의 거부감은 여기서 기인한다. 메인스트림이 된 음악은 더 이상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고 ‘상업성’만이 느껴진다. 우리의 것이 네오 파시즘의 획일화 기획에 포획되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이 장르가 메인스트림이 되었다고 포기하며, 애초에 하이퍼팝은 진정성이 없다고, 기존의 것들이 기술을 통해 조합된 장르라는 이유를 들며 포기를 정당화한다. 이는 진정성 담론에 사로잡힌 결과다. 장르를 구성하는 고정된 요소를 상정하는 진정성에 대한 믿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비판해야 할 것은, 메인스트림에서 언더의 음악이 들리는 것 자체가 아니라, 권력이 음악을 획일화시키기 위해 하이퍼팝을 왜곡한 후 마치 메인스트림만의 음악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기획이다.


우리는 이런 허상의 진정성을 만들어내는 기획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 마크 피셔는 2011년에 있었던 ‘런던 주식거래소 점거 운동’ 때 주식거래소를 점거하는 이들이 스타벅스 매장을 이용하고, 아이폰을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면서[49] ‘너희도 자본주의에 기여하는 사람들’이라며 우파 세력이 행한 비난을 비판했다. 이런 우파 세력이 욕망을 점유하게 두면 안 되고, 좌파가 자본주의가 이룩한 기술적 장점들을 포기할 필요 없이, 이 기술망을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데 써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68혁명의 실패 중 하나는 상업 예술과 순수 예술을 구분하며 상업 예술을 타락한 것으로 보는 이분법이고, 이는 기성 좌파가 68세대가 말하는 욕망의 긍정을 거부하는 오판에서 기인했다고 분석한다.


우리가 음악을 소비할 때 진정성 담론에 갇혀서 우리의 음악을 더 이상 소비하지 않기로 하는 것은 문화를 우파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피셔가 앞선 글에서 말했듯, 우리는 자본주의가 만족시켜 줄 수 없는 욕망을 해소해 줄 힘을 지니고 있음을 자각하고, 권력이 메인스트림이라고 규정해 놓은 허구의 장에 침입하는 것을, 상품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문화가 상품이 되는 것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푸코가 주장한 것처럼, 권력과 분리된 ‘순수한 지식’[50]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과 분리되어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바나의 저항이 실패한 원인은 어쩌면 그것이 시장에서 상품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통된 이후에 우리가 그것을 방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Brat〉이라는 오염된 상품은 시장의 승인하에 그 속으로 침투하는 것에 성공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부를 교란하며 체제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힘겨루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편집위원 정후 | rkskek181@naver.com




[1] Rate Your Music의 약자. 각종 음악, 영화, 게임 등에 별점을 매기는 온라인 커뮤니티로, 힙스터들이 많이 애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2]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한 하위 장르로, 투스텝에 기반한 리듬에 자메이카의 덥 음악의 요소가 섞인 음악이다.

[3] 신스팝은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을 이용해서 댄서블한 팝 음악을 만드는 음악 장르이다.

[4] 레이지는 2020년대부터 유행한 힙합의 하위 장르로, 강한 신스 사운드와 디스토션이 강한 808에 기반해서 하이퍼팝과 유사할 정도로 자극적이고, 트랜스를 유발하는 게 특징이다.

[5] 포스트 펑크는 단순한 쓰리코드 연주에 기반한 펑크 장르를 기반으로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장르이다.

[6] 슈게이징은 노이즈와 리버브가 걸린 기타 사운드와 암울한 가사를 특징으로 가지는 락의 하위 장르이다.

[7] 유운성 (2014.10.24.). 시네마-에이돌론: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입문, 혹은 논쟁을 위한 서설 [온라인 블로그].

[8] The Lost Promises of Hyperpoptimism (2024.10.03.). Pitchfork.

[9] Remembering SOPHIE, the architect (2021.02.04.). CRACK.

[10] The Lost Promises of Hyperpoptimism (2024.10.03.). Pitchfork.

[11] Mark Fisher (2022). Ghosts of My Life: Writings on Depression, Hauntology and Lost Futures. 174-175.

[12]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2013). 미래 이후. 141.

[13] 같은 책. 71.

[14] A.G. Cook, 〈The Best Day〉, 2020.

[15] A.G. Cook, 〈The End Has No End〉, 2020.

[16] Too Pop? Too Weird? A.G. Cook of PC Music Is Stepping Out on His Own (2020.09.09.). The New York Times.

[17] 래윈 코넬 외 (2024). 젠더스터디. 242.

[18] 강덕구 (2024). 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 272.

[19] Anti-Hauntology: Mark Fisher, SOPHIE, and the Music of the Future (2021.01.02.). Blue Labyrinths.

[20]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 작업이 단순히 개념을 파괴하기 위한 게 아니라, 개념의 토대를 의심하고 새롭게 정초하며 비판적으로 개념을 다시 정초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법의 힘』을 참조.

[21] 레이브는 영국에서 노동계급들이 클럽 음악을 즐기는 파티를 의미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다.

[22] 언더는 주류에 편입되지 않은/못한 음악을 통틀어 지칭한다. 메인스트림은 흔히 ‘차트’에 오르는 음악과 그 음악들을 따라하는 음악들을 지칭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오갈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 편의상 단순한 이분법을 사용했다.

[23] 김수아, 홍종윤 (2017). 지금 여기 힙합. 73-75.

[24] Emo는 자신의 우울·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을 서스럼 없이 드러내는 음악 장르이다.

[25] 스케이트보드를 타지 않는데 스케이트보더처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이다.

[26] 미셸 푸코 (2020).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79-80.

[27] 같은 책. 15-16.

[28] 히토 슈타이얼 (2018). 스크린의 추방자들. 41.

[29] “I wouldn’t have a career without the LGBTQ+ community”: Charli XCX on pop culture, heritage and using her voice for good (2024.04.01.). Vogue Singapore.

[30] 래윈 코넬 외 (2024). 젠더스터디. 237.

[31] 마크 피셔 (2018). 자본주의 리얼리즘. 24.

[32] 같은 책. 30.

[33]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덧붙이자면, 이런 피상적인 우울을 취하는 아티스트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퍼팝과 같은 비(반)주류 장르들이 주류로 오면서 변형·왜곡되는 것은 아티스트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구조적인 힘에 의해서다. 시장의 선별 과정으로 인해 정치화의 가능성이 있는 우울이 담긴 음악들은 승인되지 않고, 탈정치화된 안전한 우울의 음악들만이 승인(허락)된다. 마크 피셔는 「반-치료」에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문화가 가진 정동과 재현의 역량의 역량을 극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작동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글을 쓰는데 주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마크 피셔의 「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 또한, 무기력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좌파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런 좌파만을 ‘승인’하는 자본을 공격하는 글이다.

[34] 앤드류 포터 (2016).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전자 버전]. 3장 예술적 아우라를 소비하는 사람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71577.

[35] 나원영 (2024.06.03.). [문학과 사회] 우리의 포스트-록을 이해하기 멈출 때 [온라인 블로그].

[36] Digital Audio Workstation의 약자로, 프로그램으로 작곡, 프로듀싱, 녹음 등이 가능하다.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스튜디오가 아닌 환경에서도 음악 제작이 가능해졌다.

[37] 언디 (2024.11.22.). 하이퍼팝과 기술 〈1〉 – 재귀적 데이터의 초월 [온라인 블로그].

[38] 사이먼 레이놀즈 (2014). 레트로 마니아.

[39] 영국의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현대의 대중음악이 진보하지 못하고 과거의 음악을 끝없이 재조합하는 레트로 마니아들의 시대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레트로 장르들, 포스트 혹은 리바이벌의 접사를 달고 있는 장르들이 이 시대의 반영이다.

[40] 마크 피셔는 데리다의 온톨로지 개념을 빌려서, 온톨로지라는 음악 장르(대표적인 아티스트로 Burial이나 The Caretaker가 있다)는 더 이상 음악이, 나아가서 사회의 진보가 없어지며 어긋난 시간의 이음새를 음악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한다.

[41] 도나 해러웨이 (2019). 해러웨이 선언문. 61.

[42] 같은 책. 83.

[43] The Lost Promises of Hyperpoptimism (2024.10.03.). Pitchfork.

[44] 미셸 푸코 (2020). 감시와 처벌. 66.

[45] 히토 슈타이얼 (2018). 스크린의 추방자들. 58.

[46] Bruno Latour (1993). We Have Never Been Modern. 29.

[47] 같은 책. 34.

[48]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2012). 반딧불의 잔존. 30.

[49] Mark Fisher (2012). Postcapitalist Desire. What We Are Fighting For: A Radical Collective Manifesto.

[50] 미셸 푸코 (2020). 감시와 처벌. 68.




참고문헌


단행본


강덕구 (2024). 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 을유문화사.

김수아, 홍종윤 (2017). 지금 여기 힙합. 스리체어스.

도나 해러웨이 (2019). 해러웨이 선언. 황희선 (번역). 책세상.

래윈 코넬 외 (2024). 젠더스터디. 후마니타스.

마크 피셔 (2024).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번역). 리시올.

미셸 푸코 (2020). 감시와 처벌(번역개정 2판). 오생근 (번역). 나남.

미셸 푸코 (2020).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4판). 오생근 (번역). 나남.

사이먼 레이놀즈 (2014). 레트로 마니아(초판). 최성민, 함영준 (번역). 작업실유령.

아즈마 히로키 (2012).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번역). 문학동네.

앤드류 포터 (2016).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전자 버전]. 노시내 (번역). 마티.

자크 데리다 (2004). 법의 힘. 진태원 (번역). 문학과지성사.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2012). 반딧불의 잔존(초판). 김홍기 (번역). 길.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2013). 미래 이후. 강서진 (번역). 난장.

히토 슈타이얼 (2018). 스크린의 추방자들(개정판). 김실비 (번역). 워크룸 프레스.

Fisher M. (2022). Ghosts of My Life: Writings on Depression, Hauntology and Lost Futures. Zer0 Books (2nd ed.).

Fisher M. (2012). Postcapitalist Desire. What We Are Fighting For: A Radical Collective Manifesto. Pluto Press.

Latour, B. (1993). We Have Naver Been Modern. Translated by Catherine Porter. Harvard University Press.


기사 및 온라인 자료


나원영 (2024.06.03.). [문학과 사회] 우리의 포스트-록을 이해하기 멈출 때 [온라인 블로그]. 접속일 2025.02.16.. Retrieved from https://blog.naver.com/onezero96/223467982918?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마크 피셔 (2020.10.22.). 반-치료 [온라인 블로그]. 접속일 2025.02.16.. Retrieved from https://playtime.blog/2020/10/22/%eb%b0%98-%ec%b9%98%eb%a3%8c/

마크 피셔 (2020.01.30.) Mark Fisher_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 [웹진]. 접속일 2025.02.16.. Retrieved from http://www.critic-al.org/?p=5525

언디 (2024.11.22.). 하이퍼팝과 기술 〈1〉 – 재귀적 데이터의 초월 [온라인 블로그]. 접속일 2025.02.16.. Retrieved from https://blog.naver.com/neoj10/223669989851

유운성 (2014.10.24.). 시네마-에이돌론: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입문, 혹은 논쟁을 위한 서설 [온라인 블로그]. 접속일 2025.02.16.. Retrieved from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4/10/blog-post.html

Bluemink, M. (2021.01.02.). Anti-Hauntology: Mark Fisher, SOPHIE, and the Music of the Future. Blue Labyrinths. Retrieved from https://bluelabyrinths.com/2021/02/02/anti-hauntology-mark-fisher-sophie-and-the-music-of-the-future/

Fisher, M. (2013.09.24.). The Man Who Has Everything: Mark Fisher on Drake’s Nothing Was the Same. Electronic Beats. Retrieved from https://www.electronicbeats.net/started-from-the-bottom-mark-fisher-on-drakes-nothing-was-the-same/

Fisher, M. (2013.04.13.). The Secret Sadness of the 21st Century: Mark Fisher recommends James Blake’s Overgrown. Electronic Beats. Retrieved from https://www.electronicbeats.net/mark-fisher-recommends-james-blakes-overgrown/

O’Neill, S. (2021.02.04.). Remembering SOPHIE, the architect. Crack Magazine. Retrieved from https://crackmagazine.net/article/profiles/remembering-sophie/

Pareles, J. (2020.09.09.). Too Pop? Too Weird? A.G. Cook of PC Music Is Stepping Out on His Own. The New York Times. Retrieved from https://www.nytimes.com/2020/09/09/arts/music/ag-cook-pc-music-apple.html

Press-Reynolds, K. (2024.10.03.). The Lost Promises of Hyperpoptimism. Pitchfork. Retrieved from https://pitchfork.com/features/article/the-lost-promises-of-hyperpoptimism/

Ray, C. (2024.04.01.). “I wouldn’t have a career without the LGBTQ+ community”: Charli XCX on pop culture, heritage and using her voice for good. Vogue Singapore. Retrieved from https://vogue.sg/charli-xcx-cover-story/

이전 17화민주동덕에 봄은 온다 : 동덕여대 교지편집위원회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