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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

편집장 민철

지금부터 제가 10월의 눈을 보여드릴게요. 집중하세요.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지금껏 봤던 가장 아름다운 눈을 보게 될 거예요.


“눈이 내린다. 아름답게.”


자 그리고 눈을 감아보세요. 여기까지 읽지 마시구요. 어서. 어때요, 보셨나요? 안보였다면, 속는 셈 치고 소리 내서 읽고 다시 눈을 감아보세요. 가을에 눈을 볼 수 있는 경험은 흔치가 않으니까요. 또 웃으셨나요? 적어도 저에게는 성공률이 꽤 높은 마법인걸요. 마법의 이름이요? 비밀인데요, 바로 ‘쓴다’는 마법입니다. 그리고 여기 저희가 한여름 치열하게 ‘쓴’ 책을 당신께 내보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편집장 민철입니다. 부끄럽지만 편집장이 되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당신은 매번 무엇이 부끄럽냐며 웃곤 하셨지만, 이건 저에게 마냥 우스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은 저의 일생일대의 고민에 가깝습니다. 저는 적어도 저란 인간만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만일 이것마저 느끼지 못할 때에는 정말 쓸모없는 놈이 되어버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편집장이 되면 제일 먼저 쓰리라고 다짐했던 이 글도 미루고 미뤄, 여름이 다 가는 지금에서야 부끄러운 무언가를 적어봅니다.


마감이 한창이던 지난달, 온이가 수술을 했습니다. 그 애는 마취가 덜 깨서 짖지도 못하고 낑낑댔습니다. 만약 강아지에게도 울음이 있다면 이 모습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조그만 것이 한 마리나 되는 닭의 뼈를 삼켰습니다. 일은 잠깐 사이에 일어났는데요, 제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온이는 쓰레기통을 뒤져 먹다 버린 기름진 그것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습니다. 그 애가 뼈를 잘근잘근 씹었는지 꿀꺽꿀꺽 삼켰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온이의 배를 갈라야 했습니다. 만약 그 애의 죄가 있다면 본인의 위장을 찢을 수도 있는 날카로움을 삼켰다는 것이고, 이는 채 소화하지도 못할 것을 곧잘 삼켜버린다는 점에서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병원비 120만 원을 결제하고 온이를 안았습니다. 온이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 오줌을 갈기며, 제 품을 파고들었어요. 그 애를 집에 눕혀놓고, 혼자서 깜빡이던 노트북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밤새 떠는 작은 것을 오래 쓰다듬었습니다. 오래. 그 작은 아이의 심장이 뛰고 있었습니다.


호기롭게 시작한 일이 마음처럼 안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일이 그렇겠지만, 쓴다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세계를 변혁”하겠다는 고대문화에 들어오기로 결심했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제가 느꼈던 것은 지독한 좌절, 그뿐이었습니다. 너무 뻔한 주제는 싫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복잡한 주제에도 고개를 내젓습니다. 적당히, 내가 다룰 수 있으면서 화제가 될만한 주제를 찾아와 8주간 꾸역꾸역 적어내고선, 이만하면 괜찮다고 손을 훌훌 털어냅니다. 그리고는 어느 하룻밤을 잡아 이 모든 방관을 부끄러워한 후에 스스로 악수를 청합니다. 그다음은요? 네, 다시 주제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 문득 당신께 고백할 일이 떠오릅니다. 사실 나는 세상을 변혁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노라고.


그렇게 또 주제를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길을 걷다가 수레를 끄는 한 노파를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 몸의 몇 배가 되는 수레를 끌며 한 차선을 통째로 막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차들이 그 뒤로 느릿느릿 따라오고 있었지만, 적어도 노파를 바로 볼 수 있는 운전자들은 아무도 경적을 누르지 않았어요. 물론 간간히 저 먼 곳에서 빵- 하고 울리긴 했습니다만, 그것은 그들이 노파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 만약 그들도 그 수레를 보았다면 절대 경적을 누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앞에 있으면서도 그 노파를 차마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괜히 바닥을 차며 못 본 척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매번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진짜 슬픔을 앞에 두고는 고개를 돌렸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을 슬픔이라는 부르는 일도 저를 위한 것이었을지 몰라요. 그 노파는 그저 매일을 살아낼 뿐인데, 저는 왜 그를 보고 슬픔을 느꼈을까요? 그건 다 거짓이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저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저의 글쓰기는 지금껏 순전히 자기 위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날, 고대문화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만난 것은 그즈음이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당신은 우리가 그 여름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처음 만났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사실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들어온 첫 날부터 지금까지 말입니다. 동네 책방과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과 안암병원 젠더 클리닉과 성소수자부모모임과 수레바퀴와 고대 노조와 도축장과 변희수 하사 추모 공간과 편집실에 서 있던 당신을 떠올립니다. 그런 당신은 그날 제게 우리의 글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 작고 위선적인 사람인데, 그냥 당신의 이야기를 아주 잠깐, 정말 잠깐 들었을 뿐인데. 저는 아직도 그날의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남아 쓰기로 했습니다. 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하지만요. 그래도 오래 온이를 쓰다듬던 그 마음으로 쓰리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세계를 변혁”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너무 어려운 주제도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다시 한 번, 듣기 위해 쓰고 싶다는 마음 뿐입니다.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저희가 한여름 치열하게 쓴 ‘책’을 당신께 다시 한번 내보입니다. 그때, 저희의 글이 마법처럼 아름다운 눈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가장 추운 곳에 천천히 내려 오래 머문다는 점은 그것과 닮아있기를 부끄럽지만, 바라봅니다.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편집실에서, 책 너머의 당신을 생각하며.

민철 드림.


추신. 글을 쓰면서 한 번 써봤는데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지금부터 마술을 보여줄게.” 당신이 말했다. “내가 지금부터 여기에 눈을 내리게 할 거야. 그것도 가장 예쁜 눈을.” 그리고 당신은 주문을 외우듯 나지막이 읊조렸다. “눈이 내린다. 아름답게.” 그 순간 정말로 나의 머릿속에는 지금까지 내가 봤던 가장 아름다운 눈 오는 날의 풍경이 펼쳐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흰빛이 오래 머물렀다.


편집장 민철 / a4003413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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