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스타일링
학부 시절 떠난 유럽 여행은 굴지의 미술관과 명성 높은 박물관을 쏘다니며 걸작을 뇌리에 담느라 바빴다. 남의 시선으로 박제된 것을 2D 형태로만 보다가 현실로 접하게 되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오감을 동원하여 명작과 예술의 공간을 접해보니, 미처 예상치 못한 수준으로 철저하고 완벽하게 관리 중이었다. 그들의 빗발치는 매력은 충만한 무게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완벽히 이색적이고 더없이 특별한 공간에는 숨 쉴 틈 없이 빼곡하게 명작이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차츰 감동의 감각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외부를 통해 다음 전시관으로 건너가며 정제되지 않은 천연의 공기를 들이켰다. 깊이 삼킨 코 넘김에 강한 자극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순간 무뎌진 정신이 쾌청하게 맑아졌다. 정원 한쪽에는 사람의 키를 넘어설 법한 체구로 마음껏 풍성해진 재스민 군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리하게 급소로 스며든 찰나는, 잠시 다른 세계로 들어선 듯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환상적이었다. 다시 한번 맛있게 들이킨 들숨에 힘입어, 속성 각인의 중간 저장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후각 기억은 유명 예술품의 자태보다 훨씬 더 고스란히 간직 중이다.
일상의 여러 순간을 곱씹어보면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모먼트의 핵심 촉매제는 향취이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후각이 기억의 중추에 깊이 관여하는 모양이다. 인상 깊었던 내음과 비슷한 공기를 접하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 순간 이동하여 당시의 추억으로 소환되어 있다. 지나간 인연은 옅어져도 향은 남는다는 말은 믿을만한 풍문이다.
보드랍고 촉촉한 어린 아기의 체취. 맛을 보지 않아도 이미 먹고 있는 착각을 일으키는 엄마의 반찬 냄새, 그리고 이제는 단종되어버린 좋아하던 향수의 미들 노트 등은 오감을 무력하게 하고 잠시 생각을 뮤트(mute) 시킨다.
어느 날 '쾅'하고 펼쳐질 의미 있는 공간을 선사하는 것도 비슷한 작용이다. 에센셜 오일이 눅진하게 뭉쳐져서 짙은 향내로 가득 채워진 호텔과 백화점. 드넓은 청량함 사이에 그 어떤 생명의 꼬릿함이 한 가닥쯤 섞여 있는 바다. 건조하면서도 묵직하고 차분한 도서관의 공기. 숨을 아껴 들이켜야 할 것 같은 지하실의 습도 짙은 먼지 냄새. 이처럼 공간이 강력한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은, 그곳만의 향취와 오버랩되는 것이 필연적인 메커니즘이다.
어린 시절 '소머즈'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부러워하며, 남들보다 조금 더 발달한 후각을 가졌다는 것에 뿌듯해하곤 했다. 약간 우월한 이 능력치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맞물려, 공간을 인지하고 분류하는 카테고리의 요소로도 자리 잡았다. 흩날리는 꽃 향기에 마음이 말랑해지고, 흐르지 못한 물의 생명력 잃은 악취에 날숨을 길게 쉬는 것은 거의 반사작용에 가깝다. 이처럼 공기의 뉘앙스는 공간의 좋고 싫음을 판단하는데 깐깐하게 간섭하는 것이다.
빛으로 방 한 칸을 가득 채워서 인정받았다는 현모양처 면접 이야기를 넘어서서, 향기로 상황을 구성하고 핵심 기억으로 도모하는 공감각적 팁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호텔에서 자주 쓰는 플로랄 디퓨저 하나만 잘 모셔서 둔다면 깨끗하게 비워진 공간도 고급스러운 화려함이 가득 찬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 건축은 향기든 악취든 냄새 관리를 절대 놓치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다.
응원해 마지않는 월드 스타가 타인의 눈에는 과도하리만큼 디퓨져와 향초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는 향기를 꽤나 즐기는 나에게 나와 잘 맞는 향수를 더 적극적으로 탐닉하게 하는 동기를 유발하였다. 악취를 방지하고 향을 취하는 것은 건물도 사람도 신중해야 한다. 잘 어울림으로 얻어내는 시너지 효과가 썩 자신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