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생활교육 경험담

by 선 p

해가 바뀐 스승의날, 2학년이 된 지수가 빼곡히 한 장을 채운 손편지를 주러 왔다. 선생님 덕분에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 평범한 다른 아이들처럼 지낼 수 있게 되어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뿌듯한 마음과 함께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다 학교를 떠난 연화의 눈물이 떠올랐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2학기 첫날, 새로 담임을 맡게 된 학급의 분위기는 묘했다. 아무 일이 없어보였지만 서로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주변 교사들에게 물어봐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는 반응이었다. 괜한 불안인 걸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학생들과 친해져 보려고 하던 어느 날 정아가 학교 폭력 피해를 호소하며 교무실을 찾았다. 정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초지종을 파악해보니 상황은 심각했다.

1학기 초 지수가 반장이 되고 난 뒤 지수와 가까운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서 학급 내에서 교사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 권력은 폭력이 되었다. 담임교사는 밝게 웃는 지수의 말을 믿고 학급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은 지수와 그의 친구들이 무서워 입을 열지 못했다. 지수와 친구들은 교사가 자리를 비우면 수시로 심한 욕설과 함께 학급 전체에게 언어폭력을 행하거나 약한 학생들을 조롱했다. 그 중 가장 심한 욕설을 했던 학생은 연화였다. 정아는 1학기 초에는 지수의 무리였다가 1학기가 끝날 무렵 어떤 일로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고 급기야 언어폭력과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아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정아가 아니었다면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도 몰랐을 텐데 정아의 고발 덕분에 진실이 알려지게 되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이 있을 때는 폭력을 휘두르다가 권력을 잃고 나자 자신의 피해에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모습이 괘씸하기도 했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진짜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심하게 곪아 있었고 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쉽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아휴직 전에도 담임 경력이 꽤 있었지만 학급 내 갈등이 생겼을 경우 학급 안에서 해결하거나 학년부장 교사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던 경험이 전부였어서 학생부에 신고하는 것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었다. 대신에 당시 교사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던 회복적 생활교육의 방법을 사용해보기로 했다. 학년부장 교사의 도움으로 예산을 확보하고 문제해결서클을 진행해 줄 전문가를 섭외할 수 있었다. 서클은 2시간씩 3회기로 진행되었고 서클 전후로나와 부장교사가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상담하며 서클을 준비했다.

지수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연화만큼은 끝까지 자신이 욕설과 폭력을 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계획대로 서클은 진행되었다. 학급 전체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전원이 참여하는 서클을 기획했고 첫 서클에서는 사건과 상관없는 놀이, 감정 표현하기 등으로 서로 간의 신뢰를 쌓았다.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시간이 되자 긴장되었다. 아직 학생들이 두려움 때문에 피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던 때여서 제대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봐 걱정되었다. 역시나 일고여덟명 순서가 지나도록 의미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희의 차례가 되었다. 가희는 지수의 무리는 아니었지만 놀림받는 아이도 아니었다. 가희가 혹시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때에 가희가 입을 열었다.

;우리 반에서 몇몇 친구들이 반 친구들한테 심한 행동을 할 때가 있는 거 같아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고 짧은 한 마디였지만 강력하고 용기있는 한 마디였다. 그 자리에 있던 학급 아이들 모두는 그게 누구의 무슨 행동을 지칭하는지 알 수 있었고 모두가 숨겨왔던 진실이 모두 앞에서 꺼내지는 순간이었다. 가희의 순서 다음부터는 봇물 터지듯 증언들이 터져나왔다.

;욕을 너무 심하게 해서 힘들었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이라고 소리지르는 게 싫어요

;몇몇 친구들한테 놀리고 그러는 게 너무 기분 안좋아요

누구라고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나오자 지수와 친구들은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고 고개를 숙인 채로 ;욕하는 건 잘못인 거 같다, 놀리는 건 안 된다 등의 두루뭉술한 말을 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의 증언들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말이었기에 큰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연화는 끝까지 꼿꼿하게 앉아서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그 서클이 끝나고 직접적인 피해를 호소했던 학생들을 따로 상담했다. 학생들은 지수와 친구들이 사과를 하고 행동을 고쳐주기를 바랬다.

부모님들과도 상황을 공유했다.

지수와 친구들을 불러 상담을 했다. 서클 이후 아이들은 많이 변해있었다.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 이제야 깨달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사과 편지를 써왔고 진심을 담아 사과의 마음을 반 친구들에게 전했다.

마지막 서클은 화해와 회복의 서클이었다.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된 서클에서 아이들은 마음을 나누었고 한 자리에 모여 손가락으로 그린 원을 사진으로 남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남은 2학기는 여느 1학년들처럼 즐겁게 보냈고 지수와 친구들은 더 이상 욕도 조롱도 하지 않았다. 학급 아이들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작은 갈등들도 숨김없이 교사와 부모들에게 이야기했다.

학년부장, 동료교사들, 서클 전문가 선생님들과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고 고민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가희의 용기있는 한 마디가 물꼬를 터주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기에 가희에게 너무 고마웠다. 한번 가희를 따로 불러 고마움을 표현했지만 가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 모든 과정에 연화는 빠져있었다. 연화는 사과편지에도 진심을 담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은 채 어느날 불쑥 진로를 이유로 전학을 가버렸다. 연화가 떠났기에 학급에 쉽게 평화가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이유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연화를 무서워했다. 나도 연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목격자가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자신은 욕을 한 마디도 한 적 없다고 거짓말을 하며 펑펑 울던 연화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연화의 눈물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해에 회복적 생활교육은 뿌듯한 성공과 알수없는 실패를 남겼다. 다음 해에 담임을 맡고 나서는 3월부터 회복적 생활교육을 본격적으로 도입해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했고 그 덕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1년을 보냈다. 매주 월요일 아침조회시간과 금요일 종례시간마다 미니서클로 한 주를 열고 닫았고 매달 1번씩 자치회시간이나 수업 시간을 활용해서 1시간짜리 신뢰서클을 진행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활동들을 하면서 학급 내의 신뢰를 단단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다른 해와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나타났다. 서로 성향이 다른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무리를 짓게 되고 서로 너무 다른 아이들과는 아예 관계를 맺지 않거나 사이가 나쁘게 지내기 일쑤다. 싸우지는 않더라도 함께 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그 해에도 물론 학급 아이들과 성향이 크게 달라 섬처럼 지내는 서너명의 무리가 있었다. 그 아이들은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이들에게 느끼는 거리감 때문인지 서클에서도 입을 잘 열지 않았다. 일상에서도 자기들끼리 모여있고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좋든싫든 서클이 계속되다 보니 언젠가부터 입을 여는 횟수가 많아졌다. 말을 하지 않고 토킹스틱을 넘기기만 하던 민서가 한 마디 짧은 자기 생각을 말하거나 단답형 대답만 하던 지연이가 길게 이야기를 하는 등 변화가 보였다. 서로 친해지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불편하지는 않은 관계. 그거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2학기 중간 무렵, 한 학생이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냥 떠나보내기가 섭섭해 이별 서클을 열었다. 떠나는 아이와의 추억, 떠나는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 이별을 주제로 서클을 1시간 동안 진행했고 이날에는 토킹스틱을 그냥 넘기는 아이가 없었다. 모두가 ;아쉽다, 잘가. 등의 말들을 해주었다. 전학가는 아이를 한가운데 앉히고 다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모두가 웃고 있었다. 이 사진을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본다.

학년이 끝나가던 어느날 서클에서 지연이가 이런 말을 했다. 갈등은 좋은 점이 있는 것 같아요. 갈등을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고 성장할 수 있어요.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뻔한 말이지만 1년 동안 크고 작은 갈등을 서클 안에서 함께 나눈 후에, 특히 늘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하던 지연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너무 감격스러웠다. 이게 서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정아가 내게 학폭 피해를 호소해왔을 때 학생부를 찾아가 신고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아 이외의 또다른 피해자가 나타났을까. 정아는 자신고 가해자인 사건에 대해서 끝까지 피해를 호소했을까. 지수와 친구들, 그리고 연화는 반성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할 수 있었을까. 연화는 그때에도 억울한 눈물을 흘렸을까. 정답은 없다. 교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나의 진심을 솔직하게 보라는 것이다. 어떤 의무나 매뉴얼, 책임감, 지식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솔직한 내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어려워하고 있는 것인지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찾아가 손을 내밀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의 솔직한 진심으로 학생들을 대하고 나면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좀 더 쉬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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