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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울과 철학 Nov 28. 2021

죄의식과 불안



죄의식


도덕적 규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식의 개념은 자아 내에  본유하고 있다.

그러한 죄의식은 도덕적 규율을 만족하지 못한다는 생각과 결합하는 것이다.

죄의식은 자아 내에 본유하고 있고 어떻게 해서도 현실의 도덕 규율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인간은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죄의식이 본유적 개념이듯 절망도 본유적이다. 대상이 어떤지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이 절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즉 절망은 필연적인 것이다.


죄의식은 죄에 선행한다. 죄의식이 죄에 후행한다면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은 죄의식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의식은 자아의 도처에 널려있다. 죄의식은 절망을 낳는다. 절망 역시 자아의 도처에 널려있다. 키에르케고어가 죄는 절망이라고 했을 때 이는 절망이 필연적으로 죄의식에 후행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리라.


인간의 정신은 허약하다.

첫째로 우리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우리가 감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안도하거나 두려워하면 된다. 슬퍼해야 한다면 울면 되고, 우는 것에 지치면 죽으면 된다.

감정은 확정적이다. 한 가지 감정에 휩싸였을 때 그리고 그 감정을 영원히 느껴야 한다면 자살은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죄의식과 절망에 있어서 자살은 해결책이 아니다. 죄의식과 절망은 본유적인 것으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건 존재하지 않건 죄의식과 절망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오성의 개념들은 완전하지 못하다. 오성의 개념들은 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심리적 습관에 다름 아니다. 감성의 두 형식도 마찬가지이다. 아인슈타인은 공간과 시간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현대 물리학의 우주론은 수십 차원으로 이루어진다. 공간과 시간은 칸트가 말한 것처럼의 단순한 형태는 아니다. 그런 단순한 형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성의 개념들이 명징하고 완전했다면 우리는 죄의식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태들은 우리의 오성의 개념에 따라 그물망이 쳐진다. 거기에는 불확실성이 없다. 모든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죄의식을 느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 오성의 개념들이 불완전하다는 점은 인간의 정신의 허약함을 상정하게 되는 두 가지 근거가 된다.


인간의 정신이 허약하다는 점은 우리를 계속해서 죄의식에 빠지게 한다. 이러한 죄의식의 상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정신이 허약하다는 상황은 결코 개선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그러한 상태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정신의 허약함에서 유래하는 것은 신의 존재이다.


불안

외계의 어떤 사태들이 하나의 사태로 수렴하지 않는다는 점은 신의 존재를 요청하게 만들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하나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제로인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태들의 결합은 우리에게 결정불가능성이라는 좌절을 안겨준다. 결정 불가능성의 사슬에 묶여 있을 때 우리가 결정을 내리게 하는 힘은 신이 그것을 바라고 있다는 인식이다. 결정불가능성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개인에게 신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선택의 정당성은 자신이 만들어 주겠다고 말한다.

사태들이 결합하여 결정불가능성이라는 관계를 형성할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불안은 우리 내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계의 사태들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불안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확정성을 가진다. 기쁘면 기쁜 것이고 슬프면 슬픈 것이지 기쁘면서 슬픈 일은 없다. 두려우면서 안도하는 일도 없다. 만약 우리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는 상황이 온다면 그것은 불안이 지배하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은 하나로 수렴하는 확정성을 가지는 대신 불안은 다양하게 발산하는 발산성을 가지고 있다.

불안을 잠재우는 것은 신의 존재이다. 신이 대신 선택해줄 수 있다. 우리는 최소한 안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의 존재는 우리 내계에서 한 번 유래하고 우리 외계에서 다시 요청된다. 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하신다. 하나는 우리의 결정을 대신해 준다. 둘은 우리 정신의 허약함을 돌보신다.

드디어 우리는 신을 대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불안과 죄의식을 통해 우리 앞에 현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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