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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래 Jul 13. 2021

로맨스의 함정:유해한 남성성을 로맨스에 싸서 드셔보세요

<펀치 드렁크 러브>, <클로저>


글쓰기 모임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로 <펀치 드렁크 러브>와 <클로저>가 선정되었을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있는 작품이었고, <클로저> 또한 영화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 명작으로 언급되는 영화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로맨스 영화'를 떠올렸을 때 이 두 영화를 언급하거나 추천하는 것에 별 다른 저항이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 해서 두 영화를 십여 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둘 다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남았을 세월이 지난 영화들이니 당연히 불편한 지점들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현재에 통용되는 정치적 올바름과 도덕성을 기준으로 과거의 작품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싶지는 않다(물론 필요한 작업이지만). 하지만 두 작품을 다시 보면서 도저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왜 이 여자들은 이 한심한 남자들을 사랑하는가?’


<펀치 드렁크 러브> (2003)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했던 <펀치 드렁크 러브>를 다시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도무지 레나의 속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와 함께 배리 앞에 나타난 피아노처럼, -예전에는 이것이 사랑에 대한 끝내주게 멋진 메타포라고만 생각했으나- 레나는 갑자기 어디선가 뚝 떨어진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조건도 없이 배리를 사랑해 준다. 우리는 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신경쇠약에 걸리게 만드는 그의 가족들, 그의 독특함, 그의 외로움, 그의 불안정함은 배리의 심리를 표현해내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아주 효과적으로 잘 재단된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섬세하고 예민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레나는? 레나는 피아노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이 피아노를 배리 앞에 두고 갔는지 알 수 없다.이 영화에서 레나는 그저 배리를 사랑하기 위해 ‘나타난다’. <펀치 드렁크 러브>를 다시 보면서,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에는 여전히 이견이 없지만 나의 감상을 살짝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남자'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마음은 알 수 있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배리가 사랑이라는 황홀한 뽕에 처맞아 ‘펀치 드렁크’ 상태가 되는,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그로기와 각성에 대한 묘사는 탁월하지만 그 설명과 이해는 오로지 배리에게만 할당되어 있다. 레나는 도대체 배리에게 어떤 매력을 느낀 걸까? 가족 모임에서 창문을 깨부수고, 데이트를 하다 말고 사라져 화장실을 박살 내고, 폰섹스를 하려다가 약점이 잡혀 깡패들에게 쫓기고, 교통사고가 난 여자 친구를 혼자 병원에 남겨두고 사라지는 이 남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사랑할 만했기에 그 기행과 폭력성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손쉽게 용서하는 걸까?


어쩌면 레나도 배리처럼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다. 배리만큼이나 불안정하고, 독특하고, 이상해서 그에게 빠져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레나의 마음을 설명하는 데는 공을 들이지 않는다. 왜냐면 여자들은 너무나 쉽게 이상한 남자들과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세상은 그것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글쎄다, 내가 레나의 친구였다면 그리고 배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데이트 폭력 당하기 전에 안전이별 하라고 했을 텐데.


<클로저>의 남자들은 어떠한가. 댄은 여자 친구가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처음 만난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여자 친구가 잠시 자리를 바우자 그녀에게 왜 나랑 안 만나주냐며 징징댄다. 그리고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자기를 안 만나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사칭해 온라인에서 음담패설을 하며 또 다른 남자를 낚는 ‘장난’을 친다. 그 또 다른 남자 래리는 일터에서 얼굴도 모르는 가상의 여자와 ‘섹스팅’을 하다가 여자가 만남을 제안하니 냉큼 좋다고 의사 가운까지 챙겨 입고 달려간다. 자기도 매춘을 한 주제에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소리를 지르며 악을 쓴다. 그놈의 섹스가 뭐라고 그 남자가 나보다 더 잘하냐며 따져 묻고, 다른 남자와 한심한 남성성 대결을 펼치고, 영역 표시하듯 여자에게 섹스를 강요한다.


물론 두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고, <클로저>의 여자들도 이 남자들과 쿵짝이 맞아서 서로를 사랑했다가 배신했다가 증오했다가 또 사랑을 하는 난리법석을 떤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이렇게 사랑에 발 묶인 자들의 날뛰는 감정의 줄다리기에 어떤 금칠도 하지 않으면서 사랑이란 것의 지리멸렬함, 관계의 허무하고 얄팍한 환상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펀치 드렁크 러브>를 보며 느꼈던 위화감이 다시 고개를 든다. 앨리스와 안나는 어째서 이런 한심하고 위험한 남자들을 사랑하는 걸까?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그렇게 찌질하고 한심하고 착취적인 것이라고? 그러나 <클로저>에서 묘사되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그저 ‘끼리끼리’라며 같은 선상에 놓고 보기엔 너무나 한쪽이 모자라지 않은가?


<클로저> (2004)

<펀치 드렁크 러브>와 <클로저>는 철저히 남성 관점의 로맨스라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여성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남성 인물에게 이입한다. 세상이 여자들을 그렇게 학습시켜 왔다. 여자들은 남자에게 아주 쉽게 이입하고 공감하며 그것을 전혀 부자연스럽게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르다. 예를 들어, 남자 너드들의 성전인 <스타워즈>의 주인공이 여자가 되었을 때 남성팬들이 어떻게 여자 주인공을 보며 이입을 하라는 거냐며 성토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레이저로 된 칼을 들고, 초록색 외계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기를 수련하는 우주 사무라이의 전쟁 이야기에는 아무렇지 않게 몰입하면서 고작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었다고 이입을 못하겠다니.


남성들은 여성에게 이입하는 법을 학습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들은 ‘공감하는 존재’로 길러졌기 때문에, 십여 년 전의 내가 그랬듯이, 이 찌질하고 폭력적이고 자기 연민에 가득 찬 남자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남성들의 모습에서조차 나와의 연결점을 찾고 동일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현실의 나는 여자이기에 배리처럼 폰섹스 업체에게 내 이름과 번호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거나, 래리처럼 인터넷으로 음담패설을 하다가 발견한 남자를 신나게 만나러 갈 수는 절대 없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사회가 조형한 남성과 여성의 감정 작동 구조 방식하에 수많은 ‘로맨스물’들은 여성들의 공감능력을 볼모로 잡는다. 그리고 문제적 남성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묘사하고 그들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사랑은 그럴 수 있다고, 사랑은 원래 그렇게 본능적이고 이해 불가한 감정이며 사랑의 행위는 때때로 더럽고 추잡할 수도 있는 것이라며 문제적인 남성들의 문제적 행동들을 로맨스라는 단어 밑으로 뭉쳐 던져 버린다. 여기에는 위험한 메시지가 함의되어 있다. 풀어쓰자면 이렇다. 가끔 창문을 깨부수고, 섹스에 집착하고, 스트립 클럽을 가고, 매춘을 하고, 네 손목을 그러쥐고, 네 뺨을 후려칠 수도 있지만 다 평범한 남자들이야. 남자들은 그럴 수 있어. 사랑하다 보면 그럴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이런 남자들을 사랑해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야. 


이쯤에서 2017년에 정부 산하 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이루어진 저출산 대책 연구 aka “무해한 음모”를 떠올려 보자.

“마지막으로, 여성의 교육 수준과 소득 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하향 선택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관습 또는 규범을 바꿀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이 리포트를 작성해 부정적인 화제몰이를 한 당시 연구원 원종욱 씨는 사실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의 주장은 그다지 독창적인 주장도 아니며, 대단한 악의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을 거다. 여성들을 사랑이라는 명찰을 단 위험하고 폭력적인 관계 속으로 밀어 넣는 '문화 콘텐츠'들은 수백 년 전부터 있어 왔다. 그다지 은밀하지 않았을뿐더러, 무해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흔히 로맨스가 여성들의 장르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애초에 이러한 '로맨스물'들이 보여주는 남녀 간의 감정의 매커니즘은 현실로부터 기인한다.


사회는 관습적으로 남성에게는 관대한 기준을 허용하고(“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여자들에게는 기준의 허들을 낮추기를 강요한다(“네 눈이 너무 높아서 그래”). 그리고 남녀 간의 사랑이며, 연애며, 결혼 같은 것에 현혹적인 서사를 덧붙이고 과대 포장지를 씌운다. 청춘이라면 꼭 연애를 해야 해! 남자 친구가 있어야 해! 결혼을 해야 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불량품을 잔뜩 생산해 놓고 이 제품을 사지 않는 당신은 어딘가 이상하고 결핍된 사람이라며, 온 사회가 양심 없는 영업사원이 되어 성능 미달의 남성들을 머스트 해브 아이템인 양 강매한다. 그리고 불량품과 사랑에 빠졌던 여자들은 사랑이 실패하면 내 탓을 한다. 내가 이상한 걸까? 내가 까다로운 걸까? 내 사랑은 왜 이렇게 엉망진창일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이 사회는 언제나 유해한 남성성이라는 조미료를 잔뜩 친 불량 음식을 팔아왔다. 그리고 식당에 가서 상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났으면 식당에게 잘못을 물어야 한다. 그 식당을 고른 내가 아니라.

        


추신.

우리가 데이트 폭력, 가스라이팅, 안전이별 같은 말에 익숙해진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통계에 따르면 데이트폭력 신고 건수는 하루 평균 54건이다. 여성들은 친밀한 관계의 남성들로부터 3.5일에 한 명 꼴로 살해당하며 1.8일에 한 명 꼴로 폭력을 당한다. 피해의 특성상 신고와 집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점을 상기한다면 아마 실제 피해자 수는 더 높을 것이다. 횡단보도 보행자 사고는 하루 평균 33.2건이 발생하고 1.1명이 사망한다고 한다. 통계로 봤을 때, 횡단보도 보행으로 인한 피해자 수는 친밀한 남성으로부터 폭행이나 살해당하는 여성의 수와 엇비슷하다. 그러나 사회는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건너는 법은 가르치지만 여성에게 안전한 남성을 만나는 방법이나 남성들에게 여성을 위협하지 않는 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여성이 조금이라도 우려를 내비치면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야”라고 할 뿐이다. 횡단보도 보행자에게 안전 교육을 하고 길가에 신호등을 세우고 안전선을 넘지 말라고 운전자를 교육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나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고 화내는 운전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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