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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유영 Jul 19. 2022

순종적인 아이로 자란다는 것




   이모들은 우리 엄마에게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신다.


   "언니는 진짜 딸 거저 키웠지."


   엄마도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으신다. 내가 자라면서 엄마의 속을 썩인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나는 순종적인 아이였다. 부모님의 지시에 싫다는 의사표현을 해본 적이 많이 없었고, 부모님에게 대놓고 분노를 표출하거나 짜증을 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심지어 사춘기도 조용히 지나갔다. 


   이것은 나의 타고난 천성이 무던하고 순한 덕이 컸다. 그러나 자라면서 훈련받은 영향도 있었다. 홈스쿨링을 하며 중점을 두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성품 훈련'이었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잘못을 하면 매를 맞았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부터 우리 집에는 늘 회초리가 구비되어 있었다.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아빠의 "회초리 가져와." 이 한 마디였다. 다양한 벌이 있었지만 그것이 내게는 가장 궁극적인 체벌의 수단이었다. 


   나는 내 손으로 회초리를 가지고 와서 아빠에게 건넸다. 맞는 부위는 주로 종아리였다. 종아리를 걷고 아빠 앞에 서서 대나무 회초리가 바람을 가르기를 기다리는 그 순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모른다. 아빠는 늘 때리기 전에 내 잘못의 정도와 관련해 몇 대 맞을 것인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한 대 맞을 때마다 내 입으로 숫자를 세도록 했다. 고통에 못 이겨 우느라 숫자를 세지 못하면 한 대씩 늘어나기도 했다. 아빠는 하나뿐인 딸이라고 살살 때리는 법이 없었다. 마음이 약해 매를 때려도 손바닥 정도 때리던 엄마와는 달랐다. 아빠에게 맞고 나면 종아리에는 빨간 줄들이 생겨 있곤 했다.


   그렇게 때리고 나면 아빠는 다리를 후들거리는 날 안아주고 기도해 주었다. 앞으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프게 매를 맞아도 아빠가 어김없이 안아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날 때리는 아빠가 싫다기보다는 무서웠고, 날 안아주는 아빠가 좋다기보다는 그저 안심되었다. 


   부모님의 체벌 목적은 분명했다. 나를 바른 아이로 크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스케줄표에 있는 할 일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매를 맞은 적은 없다. 그러나 할 일을 하지 않고서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 매를 맞았다. 수없이 매를 맞으면서 나는 내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매를 맞는지를 대략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만큼 심각한 잘못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정직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 부모님께 버릇없게 행동하는 것,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등.


   체벌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완전히 끝이 났다. 어렸을 때 매를 많이 맞았기에 그 나이가 되어서는 매를 맞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로 자랐다. 순종적인 아이로서 그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부모님 말씀 들어서 나쁠 게 없다는 말이 맞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대체로 나에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나는 불순종했을 때의 체벌뿐만 아니라 순종에 뒤따르는 좋은 결과 또한 많이 경험했다. 


   부모님은, 특히 아빠는 아이를 엄격하게 키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 데다가 일반적이지 않은 홈스쿨링을 선택했으니 그런 생각도 납득할 만하다. 학교를 보내지 않고 키운 아이가 혹여 그릇된 길로 간다면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를 들고 키우는 교육 방식에는 부작용도 있었다. 


   내게는 부정적인 감정과 하고 싶은 말을 눌러 참는 오랜 습관이 있다. 섣불리 그런 감정을 표출했다가는 매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중요하다 배웠기에 나는 항상 부모님께 존댓말을 썼고, 부모님께 대들거나 반항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부모님께 내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조차 나는 어려워했다. 말하기 전에 거칠지 않은 표현을 선택하고 한번 더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런 습관 덕에 나는 자라서 대체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을 눌러 참는 만큼 내 안에 쌓이는 것들이 많아졌다. 나의 기분과 상관없이 순종해야 했기에 내 감정을 살피거나 그것을 표출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사춘기 때도 나는 요란하게 반항한 적이 없었다. 이전과 다르게 조금씩 퉁명스럽거나 까칠하게 구는 게 다였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알아채지도 못하는. 




   순종적인 아이로 자란 나는 분명 그 덕을 보았다. 부모님 말씀이 그 당시에는 듣기 싫고 납득이 잘 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고 보면 다 내게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착한 아이가 되는 데에는 그만큼 희생되는 것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나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속에 쌓인 것이 많다는 것. 아직도 그게 얼마만큼인지, 정확히 무엇이 쌓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종종 속이 답답하다고 느낀다.


   내가 성인이 된 지금 부모님은 나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해하신다. 주변 어른들은 우리 부모님에게 딸을 참 잘 키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착하게 컸다는 사실을 부모님도 인정하신다. 오히려 그래서 미안해하신다. 


   "너무 착하게만 키웠나 보다, 이제라도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봐. 엄마 아빠한테 하고 싶었던 말 있으면 다 해. 막 화를 내든 욕을 하든 다 해봐. 속 시원하게."


   이제 나는 부모님에게도 조금씩 할 말을 하고 있다. 부모님 앞에서 '짜증 난다'는 말조차 못 했던 내가 이제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고, 과거에는 말 못 했던 상처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혼자서도 많이 울고, 엄마 아빠랑 얘기하면서도 많이 울었다.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더뎌도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 나와 터울이 큰 남동생 둘은 옛날보다 훨씬 너그러워지신 부모님 밑에서 자라는 중이다. 엄마 아빠가 나를 (가끔은 필요 이상으로) 엄하게 훈계한 것은 첫째를 키울 때의 시행착오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남동생들은 나와 달리 표현이 자유롭다. 특히 어린 막내가 아빠에게 소리를 지르고 '싫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때면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마냥 막무가내는 아니고, 의사가 확고한 탓에 기도 죽지 않는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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