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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Feb 27. 2022

태양도 마음도 뜨거운 날

‘놀이가 답이다. 뛰어노는 학교 행복한 학교, 청원시 교육청’ 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이글이글 타는 태양 아래 뜨겁게 빛나고 있다. 내가 주차를 하는 동안 시현이 엄마는 더위를 피해 건물 그늘로 걸어간다. 화려한 장식이 붙은 늘씬한 청바지에 허리가 보일락 말락 짧은 흰 면티를 입고 긴 머리를 찰랑이는 시현이 엄마는 뒤태만 보면 아가씨다. 레드카펫을 밟는 모델마냥 굽이 높은 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저 눈부신 여인이 이 교육청에 폭탄을 던지러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냥 이 상태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마음이다. 

시현이 엄마는 그늘로 들어가 얼굴에 부채질을 해댄다. 더위에 잠시도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길죽한 얼굴에 낀 까만 선글라스가 반짝 빛난다. 나는 그냥 주차장에서 기다려도 되는데...시현이 엄마는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빨리 오라는 눈치다. 차 문을 여는 순간, 더위가 확 몰려오고 내 얼굴이 찌푸려진다. 최대한 빨리 건물로 들어섰다.

학교 교육팀 4층, 우리가 가야 할 곳이다. 건물로 들어서니 살 것 같다.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건물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걸 생각하면 조금 열이 받기는 하지만, 지금은 고맙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니, 시현이 엄마가 계단으로 가자한다. 계단을 오르면서 마음 정리를 해야 한단다.

계단 하나 숨을 들이 마시고, 다음 계단 숨을 내쉬고,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호흡을 한다. 계단 7개, 다시 10개, 다시 7개, 숨을 들이 마시고 내 쉬는데 5초, 계단 두 개 5초다. 시현이 엄마도 나를 따라 호흡을 한다. 시현이 엄마는 시멘트 계단에 구두 굽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게 조심 조심 발을 내딛는다. 저러다 허리 병나지 싶다. 시현이 엄마나 나나 키가 비슷한데 그 힐 때문에 내가 고개를 들어야 시현이 엄마와 눈을 마주칠 수 있다. 51번째 계단에 발을 들여놨을 때는 더 천천히 숨을 내 뱉었다.

학교 교육팀 학교폭력 전담, 담당자를 찾았다. 

시현이 엄마는 담당자에게 그동안 시현이가 겪은 일이 빼곡히 적힌 서류를 내민다. 담당자는 전학을 시키라고 한다. 시현이 엄마 목소리가 커진다. 왜 시현이가 전학을 가죠? 착하게 공부만 열심히 한 내 딸이 왜 이사를 가야 하죠? 그 학교 걔네들만 빠지면 조용해요. 지난 학기에 서옥이, 그 아이 전학 갔죠? 왜 갔는지 아세요? 걔네들이 하도 못살게 구니까 간 거잖아요. 그 아이들 놔두고 착한 나머지 아이들이 다 전학을 가야 하나요? 그러면 학교를 옆에다 하나 지어주든지요. 다 전학시키게. 담당자는 말이 없다. 

시현이 엄마는 서류를 넘겨 담당자 앞에 내민다. 여기 보세요. 이 팔에 멍, 팔 안 부러진 게 다행이에요. 애들 일이라 장난이겠지 했죠. 그리고 서옥이, 걔는 공부도 잘 하고 워낙 조용했잖아요. 그래서 전학 간다고 했을 때 좋은 학교로 가나보다 했죠. 이렇게 시달리다가 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런데 서옥이만 그랬어요? 진희도 희정이도, 제가 아는 애들이구요, 제가 모르는 아이들이 더 있겠죠. 이게 걔들이 참 나쁜 게, 한 아이 건드려서 나올 것 없으면 다른 아이 건드리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피해자가 얼마인지 생각해보셨어요? 애들이 쪽팔리니까 이야기 안 하고, 돈이야 다시 엄마한테 달라면 되니까 이야기 안 하고, 공부하기 바쁘잖아요. 서옥이 엄마도 더 상처 안 받는다고 갔다 하더라구요. 이 학교 학생수가 천 명이에요. 걔들 그대로 놔두면 아마 천 명을 다 건드릴걸요. 이번에 싹을 뽑아야 해요. 

시현이를 괴롭힌 아이들은 5공주다. 다섯이서 긴 생머리를 똑같이 하고 다닌다. 미용실을 같은 날 같이 가서 머리 모양을 똑같이 맞춘다 했다. 처음에는 그냥 간식을 얻어먹는 정도였단다. 그 간식 횟수가 늘어나고, 간식은 피자 뷔페, 초밥 뷔페, 스테이크로 바뀌면서 시현이가 모아놓은 돈이 바닥이 났단다. 시현이는 친구들이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지갑이 비면서 얻어 맞는 일이 생기면서 들통이 난거다. 시현이는 5공주 틈에 끼어 6공주로 한동안 재밌게 놀기는 했다. 다른 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5공주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노는 재미가 쏠쏠했단다. 둘씩 짝을 지어 월미도도 가고, 롯데월드도 가고, 한 한기를 재미있게 다녔는데, 시현이 통장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힘들어 진거라 했다. 시현이 엄마도 주말에 친구들과 놀기 위해 평일에 열심히 공부하는 시현이가 기특했단다. 그게 한 한기를 넘기지 못했고, 시현이는 여름방학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전화기를 꺼버리고 방문을 잠가 버렸다. 에어컨을 계속 돌리면서 긴 팔을 입고 있는 시현이, 휴대폰을 붙들고 살다가 꺼버린 시현이, 방학인데 혼자 공부하겠다고 학원을 끊어버린 시현이, 이상함을 감지한 시현이 엄마가 상담사인 나를 집으로 들이면서 사건이 드러났다. 시현이와 시현이 엄마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시현이 엄마는 엄마가 미안하다고, 못 알아채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시현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교육청 담당자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집에 돌아가 계시면 학교를 통해 연락하겠다고 했다.

시현이 엄마는 펄펄 뛰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학교에서도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방학이라 학교는 조용했고, 담임은 출장 중이라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학년 주임만 죄송하다고, 뭔가 애쓰는 흔적이 있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더운 여름 시현이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고, 5공주의 인스타그램은 바닷가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자랑하는 사진들이 매일 넘치고 있었다. 5:1, 시현엄마는 냉장고에 든 수박한통을 반절로 쓱 잘라 숟가락으로 퍼 먹으면서 개학날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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