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장비에 의존하는 인공 등반... 또 다른 스타일의 등반일 뿐
피카소는 미술사에 획을 그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따라 그리는 시대에,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다. 미술처럼 등산에도 사조가 있다. 19세기 영국인 등반가 머메리(Albert F. Mummery, 1855~1895)는 미술로 치면 피카소 같은 존재다. 모두가 가장 쉽고 빠른 길을 찾아 산 정상을 오를 때, 그는 굳이 어렵고 다이나믹한 길로 올랐다. 이분법적 구분에 의하면, 전자를 등정주의(登頂主義), 후자를 등로주의(登路主義)라고 한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등로주의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현대까지 유효한 등산 정신으로 통한다.
머메리는 등로주의를 주창했다. 그래서 등로주의를 머메리의 이름을 딴 머메리즘(mummerism)이라고도 한다. 머메리는 이런 자신이야말로 '올바른 방법으로(by fair means)' 산을 올랐다고 말했다. 'By fair means'란, 자신의 육체를 최대한 활용하여 자연과 동화되는 것을 말한다. 보다 순수한 형태의 등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단독 등반, 무산소 등반, 동계 등반, 종주 등반, 경량 등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백무동에서 올라 중산리로 내려가는 최단 코스보다 화엄사에서 대원사를 잇는 지리산 종주에 더욱 가치를 둔다면, 그것이 'by fair means'다.
등산은 발만 사용하는 하이킹(hiking)과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하는 클라이밍(climbing)으로 나뉘고, 클라이밍은 사용하는 기술의 종류에 따라 다시 암벽 등반(rock climbing), 빙벽 등반(ice climbing), 인공 등반(aid climbing) 등으로 나뉜다. 인공 등반이란, 쉽게 말해 인간의 힘으로 오를 수 없는 곳을 인공적인 보조 수단의 도움을 받아 오르는 것을 말한다. 대개 그런 곳은 거대한 절벽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거벽(巨壁) 등반, 빅월(Big wall) 등반, 대(大)암벽 등반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장비를 사용하면서까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은 머메리의 'by fair means' 정신에 어긋날 것이다. 머메리만큼이나 혁명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1944~)에 의하면, 장비의 사용은 곧 '산을 작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소통을 사용하면 8,000m 산도 쉽게 오를 수 있고, 바위에 볼트를 박고 사다리를 걸면 돌출된 벽도 충분히 오를 수 있다. 1970년 마에스트리라는 등반가가 세로 토레의 화강암 벽에 400여 개의 볼트를 남용하여 산악계의 지탄을 받은 사례는, 등반에 있어 'by fair means'가 얼마나 중요한 지 곱씹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문명의 이기를 일절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고착된 생각이다. 1908년 에켄슈타인(Oscar Eckenstein, 1859~1921)이 아이젠을 개발했을 당시에도 등산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아이젠은 보수적인 등반가 사이에서 외면받았다. 그때까진 '스텝 커팅(step cutting)'이라고 해서 일일이 얼음을 깎아 계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필수 장비가 됐다. 결국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시대에 따라 기준은 바뀐다. 장비의 사용을 어디까지 허용할지는 주체에 따라, 목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등산은 기본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인 만큼 장비는 보조 수단으로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인공 등반은 또 다른 형태의 등반일뿐이다. 지구에 중력이 존재하는 한, '장비빨'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