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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피셜 지오그래픽 Jul 15. 2021

아일랜드 제1봉, 카론투힐을 오르며 빙하를 읽다

발로, 손으로, 몸으로 새로운 땅을 만난다는 것은 매순간이 발견이라는 것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한 대학생 지리학도가 10개 나라를 ‘탐험’한 기록이다. 이런 류의 기록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배낭여행’이라는 단어 대신 탐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찾아간 곳들의 지구생태적 가치가 우선은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구의 살갗 아래까지 날 것 그대로 바라 본 시선이 단순한 여행의 차원을 넘은 까닭이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 연재물이 가치를 갖는 것은, 젊은 지리학도가 170일간의 탐방을 통해 새로운 것들, 현상들, 문제들을 발견했다는데 있다. 이런 연유로, 연재물의 타이틀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내가 쓴 특별한(스페셜)’, ‘내가 생각을 교정하여 정의한(나의 뇌피셜)’ 등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연재물은 모두 1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난다. [편집자]


아일랜드 여행의 시작과 끝에는 기네스가 있다. 아일랜드에서의 첫끼


나는 2017년의 여름을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보냈다. 그래서인지 그해 여름은 유난히 선선하게 느껴진다. 단지 두 나라만을 여행하는데에 두 달씩이나 할애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따분함으로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이 시간마저 내겐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음을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깨달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동경하는 대상지가 있기 마련인데, 내게는 아일랜드와 영국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머물수 있었던 것은 학교에서 공모한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선발된 덕분이었다. 빠듯하기는 했지만, 숙식비를 포함한 생활비를 지원받은 덕에 가난한 대학생은 살인적인 물가 속에서도 두 달을 굶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주중에는 더블린 시내를 구경하고 주말이면 먼 곳을 탐방했다.


1,038m 높이의 카론투힐(Carrauntoohil)은 이래봬도 아일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웃 나라 영국에서도 가장 높은 산이라 한들  1,300m정도다. 산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이유는 일단 이 일대의 지반이 오래도록 빙하에 파묻혀 있다가 드러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알프스처럼 지각의 경계도 아닐 뿐더러 일본이나 뉴질랜드처럼 화산활동도 일어나지 않는 안정된 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버트 스콧·조지 말로리 등 선구적인 탐험가와 산악인들을 배출한 배경은 무엇일까. 앵글로 색슨족에게 탐험DNA가 충만한 탓이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킬라니에 도착해 거처를 찾는 중인 필자. 아일랜드에선 비가 올 때 우산을 쓰면 아마추어 취급을 받는다.
기름기 줄줄 흐르는 피시앤칩스. 영국과 아일랜드는 음식을 버리고 음악을 택했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피클 한 점 없다.


더블린에서 버스를 타고 남서부의 킬라니(Killarney)로 갔다. 카론투힐은 킬라니국립공원에에 있고, 킬라니는 킬라니국립공원에 붙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읍(邑) 정도 되는 작은 도시다. 킬라니에 떨어졌을 때는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극소수의 초고가 호텔을 제외하고는 그 많은 숙소가 모두 매진이었다. 아무리 성수기여도 그렇지, 영화 트루먼쇼랄까 조작된 도시에라도 온 듯 혼란스러웠다.


사실 오기 전부터 이렇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무턱대고 오긴 왔는데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현관에는 'NO VACANCY'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반응을 무릅쓰고 몇몇 집의 초인종을 눌러 처량한 신세를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특유의 진지한 표정과 "옆집에 한번 가보시오"라는 하나마나한 말들 뿐이었다. 주방쪽에선 김이 모락모락나고 있었다. 설상가상 뚝뚝 떨어지는 비를 맞고 있자니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일단은 노란 백열등이 새어나오는 어느 피시앤칩스 가게에 들어가 기름기 줄줄 흐르는 대구를 먹으며 몸을 녹였다.


사실 방법이 하나 있긴 있었다. 차마 거기까지는 가기 싫었는데...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거리에 대저택을 개조한 숙소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것을 지도에서 봤는데, 헨젤과 그레텔이라도 살 듯한 으스스한 분위기가 썩 내키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일단 걸어갈 작정을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느 지점부터 가로등이 사라지더니 기괴하게 생긴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후레쉬를 비추어 봐도 안개만 자욱할 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보면 꼭 이런 곳에서 악의 세력들이 등장하곤 했다. 정말 웬만해선 가겠다만, 더 이상은 못가겠다 싶은 공포에 휩싸인 나머지 발걸음을 돌려 시내로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는데 눈길이 좌우로 쏠린 노파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결국 숙박비보다 택시비가 더 나왔다. 이럴꺼면 그냥 호텔에서 맘 편히 잘 걸 그랬지... 대문을 밀어젖히고 소파에서 기타를 치고 있던 또래의 젊은 여행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긴장이 풀린 내 몸은 사르르 녹아버렸다.


아일랜드의 도로 표지판에는 게일어가 병기돼 있다.
연중 습한 환경은 달팽이의 몸집이 비대해질 수 있었던 최적의 조건이 아니었을까? 민달팽이가 손바닥만하다.


다음날 아침 바라본 풍경은 무척이도 아름다왔으니, 어젯밤의 공포는 원효대사 해골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샌드위치 하나를 싸들고 자전거를 빌려 킬라니국립공원으로 들어갔다. 잘 닦인 도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페달을 밟으니 공원의 출발지점인 크로닌 야드(Cronin's Yard)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푸근한 중년배 아이리쉬 일행과 조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늘 '거사'를 위해 더블린에서 새로 장만한 등산화의 빳빳한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일명 악마의 사다리(Devil's Ladder)라는 가장 유명한 노멀루트로 올랐는데, 평소에 운동을 안한 터라 금방 당이 떨어졌지만 한 아저씨의 주머니에서 그의 터프한 외모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무지개색의 곰돌이 젤리가 계속 나온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크로닌 야드
여행 제 1법칙. 모를 땐 일단 따라가고 본다.
사진 속 민머리 아저씨의 주머니에서 하리보가 계속 나왔다. "고마워요, 아저씨"


서안해양성기후에 놓인 아일랜드와 영국 일대의 토질이 대개 그렇겠지만, 걷는 내내 스폰지 위를 걷는 듯 폭신폭신했다. 연중 비가 많이 내리고 서늘한 기후 특성상 풀이나 이끼 따위의 초목이 완전히 부패하지 못하고 켭켭이 쌓여 형성된 토탄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목탄이 부족할 법한 아일랜드에서는 과거 이 토탄을 벽돌처럼 말려 가정 연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일랜드에서 한동안 사셨던 나의 전공 교수님은 서서히 타오르는 토탄의 냄새를 가끔 그리워하시곤 하는데, 나는 그 냄새를 경험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단단한 땅처럼 보여도 질펀한 진흙인 경우가 많다. 보그(bog)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듯 싶다. 한번은 설치다가 장딴지까지 푹 빠져버렸는데, 옆에서 본 아이리쉬들이 "그럼 그렇지, 이게 아일랜드야!"라며 나더러 좋은 경험했다고 자기들이 되레 엄청 즐거워 하는 것이었다. 차갑고 축축한 느낌이 순간 불쾌했지만 그 비주얼과는 사뭇 다르게 냄새도 전혀 나지 않을 뿐더러 혈액순환과 피부미용에 제격일 듯 싶어 다리에 묻은 진흙을 닦지 않고 일부러 놔뒀다.


토탄층
토탄
보그(bog)에 빠진 새 신발


악마의 사다리로 불리는 급경사 구간을 오르고 나니 금방이라도 텔레토비가 뛰어나올듯한 평탄한 풀밭이 드리워져 있었다. 벌러덩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보기엔 잔디밭 같지만 살갗에 닿는 풀이 생각보다 억세서 따가웠고 축축하게 젖어있어 엉덩이가 서늘했다.


아래로 카론투힐이 품은 두 개의 빙하호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드럼린일 것으로 생각되는, 숟가락을 엎어놓은 듯한 물체가 아스라이 보였다. 지형을 가리키는 용어 중에 해당 지역에서 불리는 고유어로부터 이름 붙는 경우가 많다. 빙하의 퇴적과 관련된 지형인 드럼린(drumlin)이나 에스커(esker)의 경우, 아일랜드에 드럼린과 에스커라는 동네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지금 내 눈에 담겨오는 이 초록의 풍경이 곧 빙하의 작품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은 물러났지만 한때 이 땅을 평정했던 빙하 말이다.


악마의 사다리(Devil's Ladder)를 지나 우측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이다.
아름다운 빙하호. 알프스와는 또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카론투힐을 대표하는 경관이다.
빙하가 훑고간 흔적, 드럼린. 땅을 공부한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상에는 녹이 슨 십자가가 우뚝 서있었다. 바람을 등지고 손을 비비며 차가운 샌드위치를 꺼내먹었다. 누군가 나에게 왜 자연을 찾고 높은 산을 오르냐고 묻는다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호연지기도 버물려진.


아일랜드의 가장 높은 곳, 카론투힐에서 느낀 첫번째 감상은 이것이다. 발로, 손으로, 몸으로 새로운 땅을 만난다는 것은 이렇듯 매순간이 발견이라는 것.


지구의 살갗을 느끼기에 벌렁 드러눕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아일랜드의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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