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는 어떻게 알피니즘 강국이 되었나
알피니즘(Alpinism):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행위 또는 그 정신. 근대 등산이 알프스에서 시작된 데서 유래했다.
세계 등반사(史)에 유독 폴란드 출신 산악인이 많이 등장한다. 알프스를 끼고 있는 프랑스·이탈리아·독일, 앵글로색슨족의 탐험 유전자와 지리적 상상력을 물려받은 영국, 그 외 돈도 많고 사람도 많은 미국·러시아·일본이야 그렇다 쳐도, 동유럽 변방의 폴란드라는 작은 나라에서 유명 알피니스트가 대거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우연이었을까? 역설적이게도, 폴란드 산악계의 전성기는 폴란드 사회의 암흑기와 시기가 겹친다.
폴란드는 1980년대를 전후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20년 동안 히말라야 고산등반을 제패했다. 수많은 폴란드 원정대를 진두지휘한 리더 안드제이 자바다(Andrzej Zawada), 야심이 가득한 스타 여성 알피니스트 반다 루트키에비치(Wanda Rutkiewicz), 히말라야 거벽등반의 선구자이자 '등로주의'를 주창한 보이택 쿠르티카(Wojciech Kurtyka), 간발의 차이로 메스너에 이어 두 번째로 히말라야 8,000m 14좌를 등정한 예지 쿠쿠츠카(Jerzy Kukuczka). 이 외에도 크지슈토프 비엘리키(Krzysztof Wielicki), 아르투르 하이저(Artur Hajzer)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폴란드 국적의 알피니스트가 히말라야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겼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동계등반이다. 폴란드는 1924년 에베레스트 원정계획을 세우고, 1936년 히말라야위원회를 설립했을 만큼 일찍이 히말라야에 눈을 떴지만, 1945년 이후 소련의 통치를 받는 동안 세계 여러 나라에게 8천 미터급 봉우리를 모두 내주고 말았다. 이는 폴란드로 하여금 새로운 등반의 패러다임, 즉 동계등반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폴란드는 1980년 에베레스트(8,848m) ·1983년 마나슬루(8,163m)·1984년 다울라기리(8,167m)·1984년 초오유(8,201m)·1985년 칸첸중가(8,586m)·1986년 안나프루나(8,091m)·1988년 로체(8,516m)·2005년 시샤팡마(8,027m)·2012년 가셔브롬 1봉(8,080m)·2013년 브로드피크(8,051m) 등 8천 미터급 봉우리 14개 중 무려 10개를 겨울에 초등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 이면에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다. 예컨대, 1982년 엘브루스(5,642m)에서 허벅지뼈가 부러진 반다 루트키에비치는 목발을 짚은 채로 K2(8,611m)를 등반했으며, 1988년 허리를 다친 크지슈토프 비엘리키는 특수 코르셋을 차고 로체의 정상을 밟았다. 이러한 폴란드 산악인들의 집념과 강인함을 두고 멕시코 산악인 카를로스 카르솔리오(Carlos Carsolio)는 “어렸을 때 너무 곱게 자란 사람은 고통을 인내하는 법을 모른다”며 폴란드의 헝그리정신을 예찬했다. 이에 폴란드 산악인 아르투르 하이저는 말했다. "우리는 살아남은 패배자가 되느니 죽은 승리자가 되겠다.”
더욱이 의아한 것은 폴란드에는 산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서쪽에서 나치독일이 하루 만에 침공하고,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이 동쪽에서 순식간에 쳐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도 폴란드가 너른 평야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 남부에 타트라산맥(Tatra)이 있는 것은 폴란드 산악인들에겐 축복이었다. 최고높이는 2,655m에 불과하지만 겨울철이 혹독하여 히말라야 등반을 준비하는 데 제격이었다. 폴란드 산악인들에게 타트라산맥은 우리나라의 북한산이나 설악산 혹은 그 둘을 합친 것만큼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타트라에서 훈련을 마친 폴란드 산악인들은 히말라야 대신 비용이 적게 드는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Hindu Kush)로 향했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서유럽 국가의 산악인들이 비행기에 짐을 싣고 네팔로 곧장 갈 때, 폴란드 산악인들은 트럭과 기차를 갈아타고 소련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시작하는 김광균의 '추일서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폴란드의 20세기는 비참했다. 독일과 소련에 의해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약 600만 명의 폴란드인이 죽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5% 수준이었다고 한다. 1945년부터는 소련의 통치에 들어갔다. 국경이 봉쇄됐고, 징병제가 실시됐으며, 보안과 검열이 최고수준으로 강화됐다. 마치 1989년 해외여행자유화가 시행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산악인들이 해외여행은 물론이거니와 원정등반을 쉽게 갈 수 없었듯이 7-80년대 폴란드 산악인들 역시 중앙정부의 허가 없이 복잡한 행정절차를 통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야흐로 등반 허가를 받는 게 등반보다 어려웠던 시대였다.
중앙정부는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산악인들의 원정등반을 허락하고 자금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심지어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공산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것을 강요받기도 했는데, 폴란드 산악인들은 끝내 등반을 선택했다. 희망도 의욕도 없는 공산주의 국가 폴란드에서 눌러사느니 본인들이 좋아하는 등반이나 하며 사는 게 더 나았던 것이다. 히말라야로 떠난 이들은 등반에서 성공해야 다음번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기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극기주의로 진화하여 높은 성공률을 보장했다. 어쩌면 폴란드 산악인들의 히말라야 등반은 현실도피의 성격을 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등반했는지 보면 지금으로선 너무나도 당연한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곱씹게 된다. 다른 서유럽의 산악인들이 국가와 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등반에만 매진할 때, 예지 쿠쿠츠카는 폴란드 남서부의 공업 중심지 카토비체(Katowice)에서 굴뚝 청소부로 일하며 원정비용을 마련하고 있었다. 1980년 겨울에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크지슈토프 비엘리키와 레섹 치히(Leszek Cichy)가 사용한 장비는 용접용 고글과 광부용 헬멧 그리고 어디선가 주워온 짝짝이 아이젠(왼쪽 10발·오른쪽 12발)이었다.
폴란드는 천재 피아니스트 쇼팽의 고향이자, 다섯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문학 강국이다. 신부(神父)로서 이례적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비(比)이탈리아인 교황으로서 500년 만에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폴란드인이다.
등반은 음악과 문학과 종교 못지않게 폴란드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캐나다의 산악 논픽션 작가 버나덱트 맥도널드(Bernadette McDonald)가 쓴 「Freedom Climbers」가 폴란드의 문화를 해외에 홍보하는 아담 마츠키에비츠 문화원(Instytut Adama Mickewicza)의 후원을 받은 것이 그 증거다. 자유로운 등반가, 그 제목에서부터 폴란드가 산악 강국이 된 이유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