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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피셜 지오그래픽 Sep 16. 2021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을 오르다

결과는 실패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한 대학생 지리학도가 10개 나라를 ‘탐험’한 기록이다. 이런 류의 기록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배낭여행’이라는 단어 대신 탐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찾아간 곳들의 지구생태적 가치가 우선은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구의 살갗 아래까지 날 것 그대로 바라 본 시선이 단순한 여행의 차원을 넘은 까닭이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 연재물이 가치를 갖는 것은, 젊은 지리학도가 170일간의 탐방을 통해 새로운 것들, 현상들, 문제들을 발견했다는데 있다. 이런 연유로, 연재물의 타이틀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내가 쓴 특별한(스페셜)’, ‘내가 생각을 교정하여 정의한(나의 뇌피셜)’ 등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연재물은 모두 1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난다. [편집자]


모두 잠든 사이 환하게 불 켜진 행정실에서 당직 불침번을 설 때면 중대장님의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위병소에서 하염없이 근무를 설 때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똑같은 거리를 재놓고 왔다 갔다 하며 무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 멈춰버린 시간을 견딜 재간이 없었다.


‘제대하고 무엇을 하면 내 삶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추가할 수 있을까?’ 나비가 되려면 번데기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 군대는 한편 꿈의 공작소이기도 했다. 말년을 바라볼수록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식은 가슴에 불을 지펴줄 무언가가 내겐 필요했다.


내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는 몇 개의 꿈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화산 탐험이었다. 나는 그 꿈을 이루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었다. 그저 그런 시시콜콜한 화산은 제외. 꿈틀꿈틀 땅이 움직이고 돌멩이들이 날아다니고 분화구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 남들이 이상하게 보면 어때, 젊을 때 좀 현실감각 없으면 뭐 어떻고. 나는 지금 이게 너무 하고 싶은데. 꿈을 꾸면 그 꿈을 닮아간다. 그리고 꿈을 이루면,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된다. 꿈을 이뤄본 사람은 누군가의 꿈 또한 응원한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녀석은 러시아 캄차카반도의 '클류쳅스카야(Klyuchevskaya Sopka, 4750m, 캄차카 화산군 최고봉)'였다. 언제 뚜껑이 열릴지 모르는 지구의 몇 안 되는 거물급 활화산이다. 거의 매년 분화한다.


캄차카에 있는 약 30개의 활화산 중에서 가장 크고 높으며 무엇보다, 아름답다. 원래 높이는 5000m였지만 1990년대 큰 폭발로 인해 정상부의 250m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 현재의 4750m가 되었다고 한다.


화산 원정대를 꾸리기 위해 온라인과 이메일을 통해 글로벌 수색망을 펼쳐보았지만 70억 인구 중에 거기 가려는 사람은 나 혼자뿐인 듯싶었다. 몇 달을 감감무소식으로 보내다 포기하고 아이슬란드로 표적물을 옮기려는 찰나, 기적과 같이 이메일이 한 통 날라왔다. 자기들도 갈 테니 합류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러시아 남자, 우크라이나 여자, 카자흐스탄 남자, 그리고 나까지 총 4명과 함께 캄차카에 사는 가이드 겸 대장을 섭외하여 엉겁결에 원정대가 꾸려졌다. 우리는 캄차카에서 7월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대장은 경비로 이것저것 포함해 한화로 따지면 총 25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며 송장을 청구해 왔다. 250만원? 난 당장 ‘싸제(px에서 파는 민간 사회 제품)’ 사는 돈도 아까워 병장이 되어서도 보급(훈련소에서 받는 저질 내의)을 입고 있는데? 당장은 형편이 안되니 적금이 깨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난 결국 군대 봉급으로 모은 돈을 모두 갖다 바쳤다. 아까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통쾌했고, 내 선택을 존중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이걸 탄 뒤로 한국에서 차멀미가 사라졌다.


드디어 시작이다.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캄차카의 주도, 페트로파블롭스크 캄차츠키에 내렸다. 차량을 대절하고 캄차츠키에서 다시 10시간을 달려 클류쳅스카야 기슭의 작은 마을 코지르브스크(Козыревск)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식량, 텐트, 장작 등의 서바이벌 키트를 소련제 헬리콥터에 싣고 클류쳅스카야 화산와 카멘 화산(Kamen, 4580m, 캄차카 제 2봉) 사이의 골짜기(saddle, 3400m)로 날아갔다.


요란한 굉음을 내며 공중부양하는 헬리콥터를 처음 타보는 나는 심장이 터질듯한 기분이었다. 헬리콥터의 기동성은 대단해서, 순식간에 침엽수림을 지나 새까만 화산쇄설물과 새하얀 눈이 보색을 이루는 화산지대에 진입했다.


열 살 터울인 가이드 로마노프(이하 로만)와 나. 웃는 얼굴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첫날밤은 너무 추워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2018년 1월, 정확히 영하 20도에 파주의 어느 야산에서 숙영했을 때 엄살부린 것을 참회하는 순간이었다. 돌아간다면 벌거벗고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저히 잘 수가 없어서 배낭에서 있는 옷을 모두 꺼내입고도 바라클라바와 비니를 뒤집어썼다. 텐트 슈즈까지 신고 시원찮은 침낭 안에 새우처럼 한껏 몸을 웅크렸다. 중학생 때 ‘등골 브레이커’로 이름을 날린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온 건 실수였다. 그걸 입고 있는 나의 등골이 브레이크될 지경이니... 바람이 텐트를 부술 기세였다. 이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낮에는 영하 5도까지 올라서 괜찮았지만, 밤에는 영하 20도까지 작동하는 손목시계에 탑재된 온도계가 작동하지 않아서 아무도 지금이 몇 도인지 알지 못했다.


몸을 틀어 옆에 누워 있는 로만을 바라보니 잠을 못자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로만, 지금 몇 도 정도 될까”라고 물으니, 침낭에서 눈만 보이고는, “뭐, 영하 30도쯤 되겠지” 이런다. 조각상 같은 몸매 못지 않게 멘탈 또한 남다르다. 역시 슬라브의 후예인가.


반면, 나는 옆에서 죽을 맛이었다. 냉동창고에 들어있는 동태처럼 버틴 잠자리는 오한과 두통을 불러일으켜 감기약을 달고 살았다. 밤에 설친 잠을 낮에 보충했다. 정신이 몽롱해서 그런지 유독 기상천외한 악몽을 많이 꾸었다.  


선글라스를 벗고 텐트 안에서 내다본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화산탄 낙석 조심! 이거 맞으면 즉사다.


텐트 밖은 온통 빙판이다. 부츠와 탈부착이 가능한 바인딩형 크램폰을 착용하지 않고는 단 세 발자국도 떼기 힘들다. 욕심내서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볼일을 보려거든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커다란 바위 뒤에 있는 변소로 가야하는데, 매번 크램폰의 스트랩을 조이고 푸는 일이 성가셨다. 스트랩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이내 너덜거려 벗겨지기가 쉽고, 일단 착용하면 코방향을 八자로 벌려 보폭을 넓게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발톱끼리 걸려 넘어져 무릎을 찧고 경사지에서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변소를 들여다보니 시기를 가늠할 수 없는 물체들이 한가득 동결건조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음식 탓에 장운동도 원활하지 않아 잔뜩 힘이 들어가는데, 칼바람까지 모질게 불어 볼일을 보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바람 때문에 도저히 휴지 하나 손에 두르기가 힘들었다.


손이 시려워서 빨리 착용해야 한다.
트리플 악셀이 가능했던 천연 아이스링크

동양인이 고산등반에 불리한 이유? 나는 단연코 '음식'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럼 그럼. 나도 하루이틀은 맛있게 먹어주었지. 그러나 2주 가까이 햄, 치즈, 빵, 스프로 삼시세끼를 해결하다 보면 도통 식도가 협조적으로 굴지 않는다.


특히 입맛에 맞지 않는 러시아식 죽 카샤(каша)를 매끼 먹을 때마다 얼큰한 김치찌개가 아른거려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내가 맛있어서 우는 줄 알았을 게다. 그것마저 싹싹 긁어먹는 벽안의 형누님을 보면서 나는 한참 멀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입맛 돋우는 발효음식이 가득한 한식이 얼마나 위대한 식문화를 지녔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만큼은 칼칼한 김치찌개에 청양고추 썰어놓고 윤기 흐르는 흰쌀밥에 한숟갈 뜨는 것이 지상 최대 소원이었다.  


아! 그리고 그곳에서 지독한 방귀냄새는 죄가 아니었다. 내 방귀냄새는 예를 들자면, [임진강에 대민지원 나갔다가 군화에 배어버린 소똥냄새(우리는 그것을 독가스라 불렀다.)]로 변하는데, 옆사람이 먼저 알게 되는 사실이 유감스럽지만 서로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이 예의였다. 그럴 땐 말없이 텐트 지퍼를 열어 환기를 시켜주었다. 시나브로 우리는 만난지 며칠만에 방구 튼 사이가 되어 있었다.


클류쳅스카야에는 오두막이 하나 있는데, 유통기한이 지난 오뚜기 스파게티를 발견했다. 몸보신 제대로 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클류쳅스카야와 카멘은 정반대로 생겼다. 클류쳅스카야는 원뿔모양의 성층화산이다. 후지산을 떠올리면 된다. 반면, 카멘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침식된 뾰족한 산봉우리이다. 호른(horn)이라고 한다. 체르마트의 마터'호른'이 대표적이다. 덧셈뺄셈도 모르고 방정식을 풀려는 나에게 로만은 애써 카멘의 빙벽에서 속성 과외를 해주겠다고 했다.


하루를 날 잡고 카멘 빙벽을 오르고 내리는 연습을 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급경사에서 크램폰을 얼마나 내 몸처럼 다룰 수 있느냐’였다. 미끄러질 때와 넘어질 때도 기술이 필요했다. 본능적으로 엉덩이와 크램폰으로 브레이크를 걸다간 떼굴떼굴 굴러 크게 다칠 수가 있다. 얼른 엎드리는 자세로 동작을 바꿔 무릎을 직각으로 접고 피켈(얼음도끼 겸 지팡이)로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카멘 화산에 눈보라가 일고 있다.
눈이 쌓인 것처럼 보여도 가까이서 보면 100% 얼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등정에 실패했다. 이미 몇 번 오른 경력이 있는 로만은 내게 올해가 유독 예년과 달리 여름치고 날씨가 이상 한파가 왔다고 했다. 따라서 노면은 눈이 녹지 않아 돌과 얼음이 뒤섞여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엄청나게 큰 시루떡 위를 걷는 느낌이랄까.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살얼음이 낀 짜파게티 분말가루를 헤집는 미생물의 심정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경사는 겁이 날 정도로 급했고, 얼음과 화산쇄설물이 뒤범벅된 지표면의 특성 상 몸의 균형을 잡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산을 지그재그로 올랐는데, 까딱하면 픽픽 쓰러질 뿐더러 한 번 미끄러지면 최소 10m 이상씩 추락했기 때문에 안간힘을 다해 피켈로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다. 로만은 특히 헤메는 나를 보며 '발목에 힘을 꽉 주고 발의 방향을 등고선과 평행하게 하라'고 일러주었다. 나중에 가서는 자일(등산용 밧줄)로 서로를 굴비 두릅처럼 엮어 추락을 방지했다.


사진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경사가 살벌하다. 그럴수록 벽에 달라붙을 것이 아니라, 몸을 구부리고 발바닥에 체중을 실어야 한다.


나는 4000m에서 그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정상을 찍고 다시 하산하려면 하루종일 걸릴 텐데, 또 하산이 훨씬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욕심내서 올라갔다간 사고가 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 한 명을 위해 팀원 모두가 내려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말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 얼마나 더 추워질지 모르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더 이상 입을 옷이 없었다. 결국 팀원들은 마저 정상으로 향했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심각한 내적 갈등에 빠졌다.


그것은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것을 해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충격이자 루저 마인드였다. 그러자 내 꿈과 방향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데, 난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는 거지?' '아무 보상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사랑이 식어버리듯, 빨리 여기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속상함으로 부어오른 마음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팀원들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 시간은 정말 길었다.


클류쳅스카야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아"


그렇게 클류쳅스카야만 하염없이 쳐다보는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나오는 한 줄의 대사가 떠올랐다. 히말라야까지 자신을 찾으러 온 월터에게 숀이 눈표범을 가리키며 건넨 한 마디. 아름다운 것들은 정녕 관심을 바라지 않는 걸까.


아니 내가 알기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치명적인 법인데 말야. 릴케가 찔려 죽은 장미 가시가 그렇고, 매혹적인 향기를 지녔지만 무시무시한 독을 품은 화이트 올랜더가 그렇다던데, 꼭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 아니더라도 자연계의 모든 것들은 아름다울수록, 화려할수록 위험함을 내포하고 있단 말이지.


하물며 사람도 그래. 이러한 것을 보면 아름다운 존재일수록 누군가의 관심을 애타게 바라고 있는 것이 맞지 않을까. 관심을 바라지 않으면 아름다울 필요도 없어. 어쩌면 이 새하얀 망토를 두른 설산이 나를 쉽게 허락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었을 거야…





베이스캠프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하산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30~40kg씩 짐을 이고 나흘간 내려왔다. 1시간 걷고 10분 쉬기를 반복하며 하루 9시간씩 주구장창 걸었다. 클류쳅스카야가 토해낸 화산찌꺼기 틈으로 빙하가 녹아서 생긴 융빙수가 간헐적 계곡을 이루고 있었고, 무질서하게 박혀있는 자동차만한 바위들의 위치에너지는 최대치에 도달하여 당장에 눈앞에서 굴러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그 험준한 언덕을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수십 번 반복, 허리와 골반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톨바칙 화산(Tolbachik, 3682m)을 이정표 삼아 걷고 또 걷는다.
톨바칙 화산의 트와일라잇
물 뜨러 가는 길에 뒤돌아서 사진 한 장


정상을 밟고 소기의 뜻을 달성한 팀원들은 한층 여유로워 보였다. 침낭에 몸의 절반만 집어넣고 옹기종기 앉아서 아이패드에 담아온 무언가를 재미나게 보는 저 틈에 나도 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로서는 한 마디도 거들 수 없는 러시아어가 그들에겐 소비에트 시절의 향수라도 되는 듯, 너무나 돈독해 보이는 그 모습이 내게는 되려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땐 설탕을 진탕 넣은 레몬티만 하염없이 홀짝였다.


하도 우려내어 조직이 풀어진 레몬 쪼가리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로만이 나를 부르더니 스틱 하나와 카메라만 챙겨서 따라오라고 한다. 어딘지도 모를 비탈길을 30분 정도 올랐을까,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꿈에선 꼭 이런 절정의 순간에 잠에서 깨더란 말이지. 의식을 가다듬고 복식으로 소리를 뱉어보니 다행히 꿈은 아니다. 신이 장난치다가 깜박하고 그냥 가버린 것만 같달까, 땅은 접힌 카펫처럼 울어 있었고, 벨벳보다 고운 이끼가 햇살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소쉬르라는 철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은 언어로 대상을 인식한다는데, 대체 이 '말도 안되는' 광경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펜을 칼처럼 휘두르는 김훈이라면 가능할련가, 그 옛날 연암이 요동벌판을 지나며 한바탕 통곡하고 싶다한 심정이 이러한 걸까, 러시아 태생의 천재 화가 마르크 샤갈이라면 혹시 모르지. 그래, 그러고 보니 샤갈의 작품 같다. 이 아득한 날 것의 대지 앞에 언어는 무용지물일 뿐.


손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 눈에 아무리 담아보아도 자꾸 어디론가 새어나가는 느낌이 꼭 깨어나는 순간의 꿈과 같았다. 로만이 힙플라스크에 담긴 술을 건네주기 전까진. 보드카는 아니지만 할머니가 담궈준 러시아 전통 증류주라며, 유일하게 정상을 밟지 못한 나의 아쉬움을 달래주려고 일부러 이곳까지 길을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한 모금 꼴깍이고 코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때만큼은 한껏 취하고 싶었기에..


코끝서부터 눈동자와 머리를 차례로 지나 가슴을 뜨겁게 데우는 그 맛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기억될 뿐이다.


이젠 아름다움이 뭔지 알 것 같다. 그건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로만
러시아의 위대한 화가, 샤갈의 작품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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