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의선 May 11. 2023

#5. 연서(戀書)

[분기간 이의선]


나의 사랑에게,



참외가 맛있는 계절이야. 노오랗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참외를 잘 씻어서 얇게 껍질을 까고 숭덩숭덩 잘라서 먹었어. 향긋한 단내가 집안 곳곳에 퍼져. 손끝 냄새를 맡으니 풋내 섞인 달큰한 참외향이 난다. 참외를 아삭아삭 씹으며 그런 생각을 했어. 맞다, 이 늦봄이 참 귀하지. 벚꽃이 다 지고 새순이 신록으로 변하는 이 시기가 정말 아름다웠지. 그때 우리가 만났지 하고 말이야. 길가 좌판에 참외가 깔리는 걸 봤어. 한 소쿠리에 얼마인지 확인하느라 고개를 쭈욱 빼고 눈동자를 굴렸지. 참외 다섯 알에 만 원. 나는 얼른 시선을 옮겼어. 그런 나를 너는 놓치지 않아. 곧장 참외 사줄까?라고 물어. 금방이라도 참외 한 봉지를 사 올 것 같은 너를 말리느라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 아니야, 참외 너무 비싸다. 다음에 사줘. 씨알도 너무 작다. 두 번 세 번 되묻는 너의 소매를 잡아당겨 걸음을 옮기곤 해. 참외가 참 달고 맛있어. 그래서 너에게 참외를 보내.


우리말에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잖아. 뭐든 세 번은 겪어봐야 판단할 수 있다고. 삼세번의 지혜는 빙 돌아 나에게도 적용돼. 인생의 세 번째 연애를 하고 있는 나는 이제야 사랑의 테두리 정도 읽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을 되뇌어보면 모든 게 너의 사랑이었단 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 모든 것이 너의 열심이고 정성이었어. 나의 꺼슬꺼슬한 맨발을 당연하게 만지는 너의 손을 보고 이 고마운 사실을 다시금 느껴.


우리 그곳에 다시 돌아갈 날을 꿈꿨었는데 꿈보다 더 좋았던 거 있지. 그곳에 뭐가 있었는지, 이 길을 지나면 어디에 다다르는지 외우려 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다 그려질 만큼 그 도시의 구석구석을 사랑했었는데. 동네를 돌아보는데 얼마나 벅찼는지 몰라. 너랑 함께여서 더 반갑고 애틋했어. 너와 나를 이어준 곳이기도 하고 나의 아기 고양이를 길러내고 내게 너의 고양이를 내어준 곳이니까. 내게는 세상 그 어떤 도시보다 로맨틱하고 고운 곳이야. 우리 살던 동네를 걷고 익숙한 거리를 지나는 너와 나는 같은 마음이었을까. 말없이 걷다 멈춰 나는 너를 꼭 안았어. 놀란 기색도 없이 너는 그저 나를 더 꼭 품어 내 마음의 요동이 끝나기를 기다려줘. 이곳을 떠날 때 마음이 참 무거웠어. 이삿짐을 옮기고 물건을 정리하면서 울적한 기분을 어찌하지 못한 내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던 거 기억나? 내가 너무 멀리 온 걸까. 강하지 못해 견뎌내지 못한 걸까. 목구멍에서 쓴맛이 올라오는 참에 너는 미리 써둔 편지 한 장을 내 손에 쥐여주었지. 그러고는 다시 묵묵히 짐을 챙기기 시작하는 너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편지를 읽었어.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써 내린 편지를 읽고 먹먹해진 기분을 참지 못해 왈칵 울어버렸잖아. 그렇게 이곳을 떠난 지 벌써 반년이 넘었네. 나의 집인 그곳을 떠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에겐 네가 있는 곳이 집이더라. 너만 있으면 어디든 따뜻하니까.


너를 만나고 나는 이상과 로망에 한없이 약해지는 사람인 걸 알았어. 너랑 같이 걷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목적지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걸으며 시간을 있는 대로 쓰곤 해. 소모되는 우리의 시간을 가늠하다 보면 왜 우리의 시간은 남들보다 빨리 흘러가는 건지, 왜 우리에게는 늘 시간이 부족한지 같은 모순적인 물음에 답이 되기도 하네. 하지만 흘러가는 그 시간에도 거리에서 새로운 조각들을 하나씩 거둬 우리 나름의 밀도를 만들어내곤 하는데 그게 난 참 좋아. 세상은 무형의 마음보다 만져지는 것들을 견주라고 말해.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런 거 하나도 필요 없어. 나는 너만 필요해. 함께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돼. 걷다 보면 강가에 다다르고 그 옆에 핀 냉이꽃을 꺾어 풀꽃 음악회도 열고 편평하고 고른 잔디밭을 골라 돗자리 깔고 앉기도 하고. 이 거리에는 이런 가게가 있네, 그 골목엔 좋은 노래방이 있었어, 하며 우리만의 시간을 모으고 우리만의 지도를 만드는 게 가장 즐거워. 누가 보면 혀를 끌끌 찰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을 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내 옆에는 네가 있으니까 말이야. 사계절을 이렇게 깊이 느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라니까.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나 봐. 너 이전에 나를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 진심이야.


미래의 시간을 계획하고 그에 대해 약속하는 것만큼 불완전하고 위험한 게 있을까 싶지만, 나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하고 싶어. 우리 같이 살게 되는 날이 오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좋은 것들을 품에 안고 부모님들께 인사하러 가자. 우리가 결혼하는 날에는 그 누구도 주인공으로 만들지 말고 우리의 축제로 손님을 맞이하자. 그날에 둘이 열심히 준비한 어설픈 노래를 부르자. 아쉬운 부분도 추억하며 살아가자. 너무 힘든 평일 저녁에 지하철역 앞에서 만나 소주 한잔 마시며 털어버리자. 그리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집에 돌아와 따뜻하게 씻고 '그래, 이만하면 됐다.' 하며 달게 잠들자. 이런 느슨하고 속단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살아가자. 늘 수다스럽게 살자. 내가 먼저 말할게. 아니 내가 먼저 말할 거야, 하면서 하루를 살자. 너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너는 늘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실 이런 내 모습을 끌어내준 건 너라는 걸 알까. 너의 그 끊임없고 성실한 사랑 덕에 가려져 있던 나의 모습이 쑥쑥 자라났나 봐. 나를 바라보는 그 끈질긴 시선이 없었더라면, 매일 밤 투정하는 나의 등을 어루만지며 토닥여주는 그 너른 마음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너의 마음 중에 가장 멋진 게 뭔 줄 알아? 나의 부재에도 나의 존재를 알아주는 거야. 내가 없는 좋은 카페에서도, 내가 없는 멋진 식당에서도, 내가 없는 어느 곳에서나 너는 나의 존재를 가정하고 마음의 보자기에 가져올 수 있을 만큼의 이야기를 담아서 나와 함께할 시간을 준비해. 그 마음이 너무너무 예뻐. 나는 어쩌면 그런 너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매일 너에게 묻는 걸지도 모르겠어.


나의 사랑아. 앞으로도 매일 아침 나에게 잘 잤냐고 물어봐 줘. 꿈 얘기처럼 재미없고 휘발성 강한 이야기가 없지만, 너는 나의 그 가볍고 재미없는 꿈속 이야기를 매일 재미있다는 듯이 들어. 그러면 나는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면서 또 열심히 어젯밤 꾼 꿈에 대해 얘기해. 간밤에 추웠는지 더웠는지, 중간에 깼는지 푹 잤는지 같은 중요치 않은 말들을 하고 있어. 내게 귀 기울여주는 그 시간이 너의 사랑의 너비이라 생각해. 잠자는 시간에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마음이 사랑의 깊이가 아닐까 싶어. 그러니 매일 물어봐 줘. 잘 잤냐고.


너와 함께한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나는 하루 종일도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이제는 우리의 살이 붙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떼어내려면 흉터가 남을 거야. 흉 지지 않게 우리 더 붙어있자. 더 가까이. 언젠가는 떼어내는 게 불가능해지도록.






분기간 이의선

分期間 李宜宣






안녕하세요. [분기간 이의선]이라는 메일링 연재글을 발송하는 글쓴이 이의선입니다.

요즘 저는 작년에 보낸 이메일 글들을 다시 수정하고 퇴고해 이곳에 남겨놓고 있습니다.


오늘 올리는 <연서>라는 편지글은 제가 작년 수술에 들어가며 저의 빈 병상을 지켜주었던 저의 연인에게 쓴 편지입니다. 조금 수정해 이메일로 발송하면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편지가 되겠다 싶어 보내었습니다.

딱 작년 이맘때 보내었던 메일인데 감회가 새롭습니다.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분기간 이의선] 메일링 연재글을 신청하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신청해주세요.

이따금 소화하기 쉽고 읽기 좋은 글을 정성껏 길러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1210

매거진의 이전글 #4. 소수의 연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