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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의선 Jun 29. 2023

#34. 우리 나눈 사랑은 공평하지 않았나?

[분기간 이의선]


#34. 우리 나눈 사랑은 공평하지 않았나?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은 그리움이기도 하고 기억의 조각이기도 하다. 이제는 꿈 없이도 깊숙한 잠을 잘 수 있지만, 과거 어느 한 지점 꿈에 매여 있을 적이 있었다. 꿈과 잠이 하나의 몸체를 지닌 양 현상은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잠에 들면 어김없이 어느 한 장면이 재생되고 그 속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리움과 기억의 조각이 긴밀하게 뒤엉켜 꿈인 줄 알면서도 매 순간 무너졌고 흐느꼈다. 꿈에서 깨면 멍했다. 생각 같은 건 할 수도 없게 슬펐고 그 슬픔은 연이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 무력감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어쩜 꿈에 사람이 매일 수 있을까. 꿈을 꾼 날이면 주로 우울했고 가슴이 답답했고 숨이 고르지 않았다.


그날 꿈속에서 우리는 길을 걷는 중이었다. 오랜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오고 가는 농담에 서로를 위하는 말들을 섞었다. 성인이 된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과 방학 따위에 감동하는 나이는 훌쩍 지난 후였으니까.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지만 친구들의 눈에는 다른 것이 비쳐 보였다. 이익관계, 주종 관계, 상하관계, 득실의 구조 같은 것들. 아무래도 좋다며 나는 벗과의 순간을 오래도록 보내고 싶었다. 오래오래 길을 걷다 멀리서 한 친구가 나에게 소리쳤다.


"잠깐만, 할 말 있어. 이쪽으로."


내 쪽을 돌아보는 그 친구의 목덜미가 겹겹이 접히는 것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큰 길가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야트막한 입구가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신발 앞 코로 애먼 모래를 차는 남자가 보였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 체구. 그 애였다.


"너 불러 달라길래. 괜찮지? 어때, 둘이 오랜만이지?"


나를 부른 그 친구는 입꼬리를 옴쏙이며 검은자위를 굴려댔다. 지나가던 낯선 이들의 발끝은 길과 평행하다 우릴 보고 방향을 바꾸는듯했다. 그 애와 조우하게 한 그 친구는 나를 보고 이죽대며 멀어져 갔다. 가파르게 심장박동이 올랐다. 얼굴이 뜨거워졌고 입술이 말랐다. 왜 아직도 그 애 앞에서 내 시간은 멎어버리고 마는 걸까. 그 애의 축축한 소매를 쥐고 길을 건너던 오랜 옛날처럼. 반달같이 웃는 그를 영원히 사랑하겠노라 맹세했던 그날처럼 나는 굳었다. 그 애는 나에게 끊임없이 기억을 묻는 얼굴이었다.


'기억나? 우리 그때'

'기억하지? 너 그때 많이도 웃었잖아'

'기억할걸? 내가 그때 얼마나 울었는데'

'기억해야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나는 면목없는 빚진 자처럼 또 고개를 숙였다.


'우리 나눈 사랑은 공평했지 않았나?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미워하고 똑같이 증오하지 않았나? 소 힘줄처럼 질긴 이 미련은 언제고 되돌아오는구나. '


그 애와의 시간들이 내 앞에 인민군처럼 당도했다.


숨도, 고동도, 그 애와 나 사이 공간에 푸짐하게 든 공기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그 애는 그런 나에 비해 능청맞게 안부를 물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내?"


악수를 건네는 그 애의 마르고 검은 손도, 그 애가 말할 때 음절 끝에 흘리는 미끌거리는 웃음도 그때와 같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니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순간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그 애의 손을 맞잡았다. 수분기 하나 없는 것마저 옛날과 같았다. 그 애와 내가 우리라는 이름을 쓸 때 나보다 항상 한걸음 앞서 걷던 그가 뒤로 손을 뻗치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 살집 없고 마른 손을 잡았다. 네 개의 손가락을 뭉뚱그려 부여잡다가 어떤 날은 서로의 손가락 하나하나 포개듯 깍지를 꼈다. 나에게 그 애는 세상이었다. 처음이었고 비행이었고 느슨하게 풀린 앞섬이었다.


"잘 지내고 있어. 너도 그동안 잘 지냈지?"


나는 그 애를 바라보지 못했다. 갈 곳 잃은 내 눈은 이곳저곳을 구르며 흔적을 남겼다. 숨이 빈틈도 없이 죄여왔다. 빨리 이 순간을 벗어나길 애원하면서도 영영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좋겠다는 멍청하고 고약한 생각을 했다. 그 애와 선선한 저녁을 걸었다. 간간이 그 애에게서는 미끄러운 웃음이 섞인 말들이 나왔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오직 발끝만 바라보며 줄곧 걸었다. 아주 많은 밤을 그 애 없이 보냈는데, 상처가 덧도 안 나고 깨끗하게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는 또 그 애를 잃은 날처럼 아프다. 꿈인 줄 알면서도 아팠다. 무슨 말을 했는지, 그래서 그 애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꿈에서 깨자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아픔과 내 가쁜 숨만 조용한 방 안을 메꿨다.


밤새 켜놓은 선풍기는 과열되어 뜨거운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꿈을 꾸며 내내 뒤척인 나의 목덜미는 끈적했고 이불은 서로 뒤엉켜 외딴곳에 떨어진 운석같이 존재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눈과 코와 귀가 뜨거웠고 덩어리진 느낌이었다. 얼굴에 붙고 엉킨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또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 애는 왜 다시 내 꿈에 나타난 걸까. 나는 그 애에게 무슨 그리 큰 빚을 지었길래 이리도 질긴 꿈을 꾸는 걸까.






우리 나눈 사랑은 공평하지 않았나?




오늘 아침 꿈을 꿨습니다. 악몽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한 가지 꿈을 반복적으로 꿨습니다.

이제는 꽤 나아져서 꿈 없이도 잘 자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에선가 저는 정말 꿈속에 매여 살았었습니다.

오랜만에 저를 질기게 괴롭혀온 그 꿈이 저를 또 무섭게 쫓아와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가 글로 옮겨 보면 어떨까 하고 짤막한 글을 남깁니다.

막상 쓰고 나니 너무 개인적이고 난해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지만,

또 어떤 면으로 보면 모두 악몽 하나쯤은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 하여

무턱대고 이 새벽에 글을 보냅니다.


이 악몽은 이전에 제가 썼던 짧은 소설 'Bastard, baby'의 토대가 되었던 꿈이기도 합니다.

(혹시나 읽어보지 못하셨다면 메일 최하단에 걸려 있는 <이전 이야기 읽기>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날이 끈적하고 습합니다.

비가 많이 올 거라 하니 피해 없으시도록 단단히 준비하셔요.

그럼 또 선물처럼 찾아올게요! 


이의선 드림





[분기간 이의선]이란?

연구원으로 일하는 글쓴이 '이의선'의 메일링 연재글 입니다.

직업은 연구직이지만, 직업과 전혀 무관한 글을 씁니다.

일상의 작은 감정들을 내밀하고 진솔하게 말합니다.

어떤 마음은 잘 모아뒀다가 내 이야기가 아닌 척 소설로 끼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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