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시대의 사랑(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85)
선장은 페르미나 다사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속눈썹에서 겨울의 서리가 처음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꺾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 일부, 송병선 역
2001년 개봉한 영화 "세렌디피티"에는 운명적인 인연을 상징하는 몇 가지 도구가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헌책방을 떠돌다 주인공에게 기적처럼 돌아오는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다. 수많은 연인들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이 책을 주고받았건만, 아마 그들 중 많은 수가 본 소설의 일부도 읽어보지 않았거나 혹은 그 유명한 마지막 장만 읽었으리라 확신한다. 이 작품에서 마르케스는 연인들이 속삭이는 완전하고 오롯한 사랑의 가능성보다는, 모두 필사적으로 외면하고자 하는 사랑이라는 초시간적인 사건 속 혼돈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이 어디선가 말했던 "일부일처제(의 환상)를 유지하는 핵심 기전은 성매매"란 주장이 차라리 이 책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첫사랑이자 후베날 우르비노의 아내인 페르미나 다사를 53년 넘게 기다려 결국 애정을 쟁취한다는 중심 플롯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뼈대일 뿐 맛을 내는 살점은 아니다. 둘의 사랑이 그토록 불멸하고 영원하여 시대를 관통하기에, 오히려 작가는 시간순으로만 봐서는 이야기 속에 동석시킬 수 없는 사건들을 사랑이라는 핑계를 통해 엮어낼 수 있었다. 콜레라와 상사병, 빅토리아식 윤리와 위선, 타나토스와 에로스라는 대치되는 대상들이 둘의 연애사 속에서 제 짝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비합리적인, 그리고 비윤리적인 낭만의 윤곽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첫 장엔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인상 깊은 죽음과 사랑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의사인 후베날 우르비노가 오랜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다. 친구는 의사에게 보낸 유서에서 자기의 내연녀에게 본인의 죽음을 알려달라 부탁한다. 하지만 의사가 내연녀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이미 애인의 자살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를 너무 사랑했기에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는 물라토 여자의 말에 후베날 우르비노는 할 말을 잃는다. 그로부터 머잖아 후베날 우르비노도 앵무새가 엮인 황당한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하고, 그제야 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슬며시 나타난다.
주인공이 없기에 더욱 선명한 도입부의 주제-죽음과 사랑은, 마치 교향곡에서 그러하듯 작품 내내 다양하게 변주된다. 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어린 시절 페르미나 다사를 접하고 상사병에 걸린다. 이때 상사병의 증상은 콜레라와 분간하기 어려운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일종의 유사 죽음의 역할을 한다.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페르미나 다사에게 차이고 난 후 그는 깊은 마음은 주지 않은 채, 또 열렬한 연심을 보존하기 위한 정도의 안정을 얻기 위해 여러 여성과 관계를 갖게 된다. 그 여성들 중 하나는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몸에 그린 성적인 낙서로 인해 남편에게 비밀스러운 관계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다. 또 다른 매우 어린 나이의 여성은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갑작스럽게 자기에게 관심을 끊자 이를 비관하여 자살하고 만다.
작중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죽음은 한결같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시키는 진실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죽음은 사랑 때문이거나 사랑이라 속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미 자기 몫의 죽음-인증을 획득해버린 과부들은 이후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확인받거나 확인하지 못한 채 시간에 묻혀 잊힌다. 작가가 작중 어딘가 대놓고 썼듯 사랑(의 증명) 때문이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콜레라 시대였던 것이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가 죽지 않은 채 늙어서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은, 그럼에도 서로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은 변하지 않았을지언정 사랑과 죽음이 얽혀있던 낭만의 시대는 끝나버렸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죽음으로 사랑을 확인받을 수 없는 시대, 영원한 불안과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시선을 빌어 수많은 죽음들을 지나가는 일상사처럼 매우 담담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기술한다. 그 담담함은 이상적인 연인이어야 할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이미지에 치명타를 가한다. 애초에 이뤄지지 않은 사랑을 핑계로 온갖 난잡한 관계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남주와, 자기에게 열정을 바친 남자를 거절하고 제 의지로 편안한 인생을 찾아 부르주아 집안에 시집간 여주가 연애소설의 전형이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이 직·간접적으로 원인을 부여한 죽음들은, 더 나아가 주인공 커플이 그러한 죽음에 달관하거나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은 단순한 전형성 문제 이상을 야기한다. 이수일과 심순애를 연상시키는, 낭만적 사랑엔 이런 경우도 있다는 정도의 애틋한 예시를 넘어 애초에 사랑이란 선악이 뒤얽히고 콜레라가 창궐하는 습지처럼 지지부진한 혼돈 자체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무려 반세기를 관통하는 사랑이 그럴진대 어느 에로스가 악으로부터 자유롭겠는가.
죽음이 반드시 사랑을 확인시켜주지 않는 시대, 사랑과 얽힌 죽음을 어떤 윤리로도 옹호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 혹은 그러한 낭만적 환상에서 우리가 깨어나버린 세상이 도래했다는 것이 본작에서 마르케스가 역설하는 바다. 신의 세 역량인 전지, 전능, 지선에 빗대어 볼 때, 전지와 지선을 잃어버린 것이 탈낭만시대 인간의 사랑이다. 인간은 오직 사랑'할' 수 있을 뿐이며, 사랑을 알거나, 사랑으로 선할 수 없다.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53년 7개월 11일 동안, 그리고 아마 그 이후에도 그러했을 것이듯 말이다. 애초에 연인에게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며 책을 건네는 것부터가 그 행위 자체로 사랑일 뿐 그 이후까지를 보장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그러나 완성되고 안정된 사랑의 환상을 잃어버린 것이 인간에게 꼭 절망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어쩌면 진정 사랑에 빠진 누군가에겐, 오직 인간의 의지와 등치 되는 그 사랑이야말로 신적 불멸이 아닌 인간적 영원을 약속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여느 고전이 그러하듯 우아하다. 그러나 그 우아함은 이상으로 독자를 상승시킴으로써 획득한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연애소설의 전형성을 비트는 무지막지한 괴력과, 타나토스와 에로스를 넘나드는 의뭉스러움으로 낭만적 연애의 이상을 끌어내린 끝에 달성한 것이다. 선하고 확실한 사랑에 대한 환상이 창궐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그곳이 코로나 시대의 한국이든 콜레라 시대의 카리브해든 이 장편소설은 의미를 가지고 읽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