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님 Jun 23. 2024

멀미가 내 인생과 닮은 꼴?

나의 멀미 역사

남편 생일이라고 아들네 가족과 30분 거리의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자가운전으로 다니다가 아들 차의 뒷좌석에 앉으니 편하긴 ‘한 것 같다’. 내가 싫어하는 말 중에 자신의 의견이나 느낌을 말하면서 ‘~한 것 같다’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나 자신도 되도록 이런 표현보다 확실하게 말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아들 자동차 뒷좌석에 승차하는 나의 느낌을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편한 것인지, 아닌지. 나 스스로 운전하면 멀미를 하지 않지만 동승자로 타니 행여 멀미가 나서 즐겁지 않은 표정이 될까 봐 살짝 긴장되는 마음 때문이다. 멀미하는 걸 알면 가족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일이다. 나의 멀미 역사는 내 인생만큼이나 오래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반공교육이 한창이던 때였다. 무장공비가 서울에 잠입하였다가 김신조만 남고 나머지는 사살되었다고 했다. 전주에서 그들이 사용했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 학생들에게 관람을 시키고 있었다. 학교 대표로 몇 명이 기차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생전 처음 타보는 기차였다. 가는 도중 멀미가 났다. 속이 메슥거리며 진땀이 나고 토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창문을 열었을 때였다. 빠~아앙 기적이 울리더니 캄캄해졌다.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얼굴을 후려치는 바람 속에 까슬거린 것이 느껴졌다. 토하는 것을 멈출 수도 없고,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터널을 빠져나왔다. 얼굴이 서걱거렸다.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내 얼굴을 보고는 화를 낼 수 없었는지 모두들 웃었다. 이제는 박물관에나 남아있을 석탄으로 가는 기차였다. 기차의 연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탄가루가 널리 흩어지지 못하고 터널 안에서 퍼졌던 것이다. 터널을 지날 때 창문을 열면 안 되는 일이었다. 오수에서 전주까지 의 철도는 유난히 터널이 많았다. 전주에 도착하여 야외 전시장에 갔다. 무장공비들이 입었던 낡아진 옷, 무기, 그 외 소지품,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의 처참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반공교육 목적은 최상으로 달성된 것 같았다.      




중학교 입학을 하였다.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는 버스를 타고 25리 길을 가야 했다. 멀미가 심하여 학교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에 버스를 내려 쉬었다가, 나머지 길은 걸어가곤 했다. 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차장이 남자였다. 힘이 좋으니 시골 농산물을 가지고 타는 승객들의 짐도 번쩍 들어 실어 주었다. 상냥하기까지 하면 인기 만점이었다. 남자 차장의 위력은 5일 장날에 더욱 빛났다.

“안으로 들어가요, 들어가~”

외치며 문의 양쪽 난간을 잡고 몸을 배치기 하듯 밀어 넣으면 불가능해 보였던 인원이 모두 올라탈 수 있었다. 나는 죽을 맛이었다. 가는 도중, 멀미를 못 참을 정도가 되면 내려야 했다. 밀착될 대로 밀착된 버스 안에서 구토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으로  밀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출입구에 있는 기둥을 붙잡고 버텼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철봉처럼 길게 설치된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이었다. 어젯밤 닦은 내 손과 닮아 있었다. 손의 주인을 찾아보니 선배 남학생이었다. 어젯밤 이 선배도 따뜻한 물에 손을 불려 매끈한 돌로 때를 밀었을 것이었다(때밀이 타월이 나오지 않을 때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뼈로 인해 불거진 부분은 과하게 밀어져 피부가 맨질맨질하다 못해 붉었다. 뼈와 뼈사이 들어간 부분은 잘 밀어 지지 않아 치어의 비늘 같은 때가 그대로 바짝 서 있었다. 누구의 손 때가 더 잘 밀어졌나 비교해 가며 정신을 팔다 보니 멀미 없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자동차에 누군가를 태워 모시기는 하나, 멀미 때문동승자로 대접받듯 얻어 타기는 어려웠다. 난 ‘무수리과라서 마님은 못된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살아온 이력도 곱게, 편하게 살아온 게 아니니 설득력 있는 것 같아 즐겨 했다. 지금은 멀미를 거의 하지 않는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만 가끔 일어난다. 그것도 약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다. 이래저래 멀미를 많이 겪어내다 보니 몸도 적응하고 내성이  생긴 것이다. 삶도 힘든 일들을 원래 내 몫인양 다독이며 살다 보 크게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생겼다. 잘 다듬진 한 사람의 인생이 되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멀미를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듯이, 살아가는 것 또한 스스로 헤쳐갈 길이었다.

이제는 가볍게 정리하는 자세로 살아보려 한다. 그래도 조금은 두렵고 무거운 과제들이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이 남은 과제들이 삶의 동력이 된다.  적당히 긴장하고, 해 나갈 일이 있음이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행여 멀미가 나더라도 견딜 수 있듯이 앞으로의 삶에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지금까지 살아내공으로 지혜롭게 나아가 볼 일이다. 어쩌면 나의 멀미의 역사가 나의 삶과 닮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야, 너 아직도 그러고 사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