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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님 Dec 15. 2023

가을 손님의 방문

귀뚜라미야, 미안해!

    

귀뚜라미가 며칠을 운다.

창문을 여니 소리가 그쳤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곳을 살며시 살피니 창틀에 귀뚜라미가 있다.

으흥, 너구나.

그  쪼그만 몸에서 어찌 그리 맑고 큰 소리가 나는지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불을 끄고 청아한 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귀뚜라미 소리가 나지 않는다.

궁금하여 바깥 창틀을 살펴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안 오나보다 했다.

그런데 안방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오래전 귀뚜라미와의 악연이 있어 손을 대지 않으려고 내버려 두었다.

제풀에 나가겠지 했다. 그러나 다음 날 밤에도 방 안에 있었다.

내 방안에, 그것도 침대 밑에 언제 오를지 모르는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이, 몸이 스멀스멀해지는 듯하여 잠을  설쳤다. 밤 2시쯤, 자다 깨어 화장실에 갔다.

잠결에 보니 변기 안쪽 가장자리에 뭔가 붙어 좌우 60° 방향 정도로 빙글빙글 움직였다.

귀뚜라미였다.

아, 정말 이 귀뚜라미....   

  

30여 년 전의 귀뚜라미 사건이 스쳐 갔다.

지금은 개발되어 자취도 없어졌지만, 그때의 신갈 자췻집은 낮은 슬래브지붕에 방 한칸, 부엌 한 칸씩 다섯 세대가 살 방이 일렬로 붙어 있는 집이었다.

부엌은 문도 없이 개방된 채 연탄아궁이 하나 덩그러니 있는 흙토방이었다.

방에 불을 넣지는 않는 때여서 연탄을 피우지 않으니, 부엌에서는 늘 눅눅한 습기 냄새가 났다.

어느 때부턴가 그 부엌에 귀뚜라미가 한 마리씩 보였다. 맑은 갈색의 몸체에 등이 볼록하고 날개가 없는 모습이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곱등이‘라고 귀뚜라미와 다르다고 한다).

생김도 징그럽거니와 부엌에서 나오니 제발 떠나 주었으면 했다. 생각 끝에 모기약을 연탄 아궁이 주변에

뿌리고 잤다. 냄새가 싫으면 나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에 부엌을 보는 순간, 기겁했다.

귀뚜라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많은 것들이 어디에 그렇게 숨어 있었단 말인가.

마음 앓이를 하다 귀뚜라미를 그렇게 살해했노라고 성당에 가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했다.

그 후로 한동안 '다마스'라는 자동차를 보면 속이 메슥거릴 정도였다.

그 차의 차체가 전체 크기에 비해 과도하게 위로 솟은 모양이 귀뚜라미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게 생겨서

그때의 귀뚜라미 사건이 연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요즘은 그 차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변기 물을 내리면 또 귀뚜라미를 죽이게 될  상황인 것이다.  할 수 없이  화장실 바닥에 일을 보았다.

귀뚜라미 일에 관여하기 싫어서 그냥 나오려는데, 항아리처럼 위가 오므라진 변기통에서 스스로 나올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작은 세숫대야로 떠서 투명 플라스틱 통에 넣었다.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일 아침에 아파트 밖으로 나가 놓아줄 참이었다.

그동안 먹을 것도 없었을 텐데 배가 고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귀뚜라미 먹이를 알 수 없어 인터넷을 찾아보니 잡식성이란다.

마침 비스킷이 있어 부셔서 넣어 주었다.

엄청 열심히 빠르게 먹었다. 먹는 입 모양새가 게가 먹는 모습 같았다.

비스킷만 먹으면 목이 마를텐데...  물을 바닥만 적실 정도로 부어주고 베란다에 내놓고 잤다.

아침에 보니 누런 배를 위로하고 다리를 쭉 뻗은 채 미동도 없었다.

귀뚜라미의 배부분이 이런 누런 색인 줄 몰랐다.

아파트 화단에 묻어주며 이야기했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아파트 25층까지 올라와 가을을 전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냥 편안하게 평지에서 마음껏 가을을 만끽하며 살아라.’라고.


흔히들 귀뚜라미를 가을의 전령이라고 한다.

가을은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온다는 말도 있다.

그렇듯 자연의 순리에 의해 어김없이 가을이야 오겠지만, 굳이 귀뚜라미와 함께 맞이하고 싶지는 않아졌다.

가을의 귀뚜라미 소리가 주는 아련한 음률의 정취마저도 사라져 버린 것 같아 아쉽기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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